[밀물썰물] 한반도와 부싯돌 상자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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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의 〈부싯돌 상자〉(The Tinderbox)란 동화가 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가난한 병사는 우연히 만난 마녀를 죽이고 많은 돈과 부싯돌 상자를 뺏는다. 무심코 부싯돌 상자를 열자, 소원을 이뤄주는 마법의 개들이 달려온다. 그 개들의 도움으로 부자가 된 병사는 성주와 왕비의 방해를 물리치고,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한다. 안데르센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일확천금의 꿈같은 이야기’를 꿈이 가득한 동화로 만들었지만 현실에서 살인과 강탈, 여성 납치까지 이르는 스토리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그래서 근래에 부싯돌 상자는 ‘불’ ‘위험’ ‘일확천금’ ‘폭력’ ‘전쟁’ 등의 키워드로도 쓰이고 있다.

1835년에 발간된 동화가 갑자기 소환된 것은 북한의 러시아 파병 탓이다. 최근 해외 언론을 중심으로 한반도를 ‘부싯돌 상자’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동북아시아에는 남북한과 일본은 물론, 미국·중국·러시아 등 강대국까지 엄청난 병력과 화력이 집중돼 있다. 자칫 잘못하면 부싯돌 상자에서 엄청난 파열음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국정원은 “북한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돕기 위해 파병을 진행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북한은 최정예 특수부대인 병력 1만 2000명 파병을 준비하고, 선발대가 이미 도착한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이 남북한 연결 도로와 철도 폭파 등 한반도 긴장을 의도적으로 고조시키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선언과 1990년 한국과 소련의 역사적인 미국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이후 올해로 한국과 러시아 수교 34주년을 맞고 있다. 양국은 85여 년간의 외교관계 단절을 극복하고,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했다. 하지만, 신냉전과 북한의 참전으로 34년간 일궈왔던 신데탕트가 막을 내리고 있다. 한국 정부는 주한 러시아대사를 초치해 북한의 러시아 파병을 항의했고, 북러 군사협력이 ICBM 및 정찰위성 기술 제공 등 레드라인을 넘을 경우 우크라이나에 최첨단 공격용 무기까지 직접 지원하는 방침을 고려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과 러시아의 관계가 180도로 바뀌는 상황이다.

국제 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 존재할 뿐이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어떤 형태로든 종결된다. 전쟁 이후에도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우회해 평양으로 가겠다’라던 1990년 담대한 북방외교의 정신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혹시나 그 평화와 번영의 불씨를 되살리기 위한 비상용 부싯돌 상자는 양국이 물밑에서 준비하고 있기를 바란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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