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속살을 보여주는 ‘기억기관’을 찾아가다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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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모던 산책 / 박미향

미술관·도서관·박물관·기념관
인류 집단 기억의 수호자 역할
우리 것 전승 문제도 생각해야


<도쿄 모던 산책>은 일본의 ‘기억기관’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보여 준다. 사진은 도쿄역의 모습이다. 부산일보DB <도쿄 모던 산책>은 일본의 ‘기억기관’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보여 준다. 사진은 도쿄역의 모습이다. 부산일보DB

제목만 보고 오해할 수 있겠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하다. <도쿄 모던 산책>은 깊이 있는 문화예술 탐구서다. 에도시대부터 현대까지 일본의 ‘기억기관’을 통해 역사와 문화를 보여 주고, 세계사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저자가 자주 쓰는 ‘기억기관’이라는 용어가 다소 생경하게 들린다. 이 책에서 기억기관은 미술관, 도서관, 박물관, 기념관 등을 포괄하는 큰 우산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 기관은 인류를 위한 집단적 기억의 수호자 역할을 수행한다. 기억기관은 한 사회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전시하는 것을 넘어, 그 사회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반영하는 중요한 문화적 거점이라는 의미다.

‘문화와 건축으로 만나는 모던 도쿄’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특정 장소를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근현대 미술작품의 보고인 도쿄국립근대미술관에서 시작해 고난의 전쟁사와 생활사를 기억하는 장소인 쇼와관, 기업가가 문화적으로 기억되는 오쿠라집고관 등을 차례로 순례한다. 저자가 방문했을 당시(2020~2023년) 진행되었던 전시를 디테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매력이다. 2022년 가을 쇼와관에서 ‘과자의 기억:달콤하고 쓴 추억들’이란 이름으로 열린 전시가 소개되어 있다. 그 가운데 중일전쟁 당시 병정놀이를 하는 소년의 모습을 담은 모리나가제과의 밀크캐러멜 광고 포스터가 있었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캐러멜의 파시즘적인 광고 포스터에 충격을 받았다.

1부에서는 근대(모던)를 살피고 2부에서는 근세로서의 에도를 다룬다. 가까운 과거부터 보다 먼 과거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공간적으로 가까운 곳을 묶어 소개하고 있어 이 책을 참고해 도쿄 여행 때 방문 계획을 세우기에도 좋겠다. 세계사적인 사건의 흐름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도록 연표로 정리해 수록한 것도 돋보이는 부분이다.

저자는 20년 넘게 국회도서관에서 전문 사서로 근무하며 도서관의 역할을 기획하고 관리해 오고 있다. 스스로를 ‘기억기관 칼럼니스트’라고 부른다니 기억기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사실이 느껴진다. 와세다대학교 방문 학자로서 몇 년간 도쿄에 살며 구석구석의 기억기관을 탐구한 결과를 담았다. 그의 안목을 믿고, 그가 이끄는 대로 도쿄의 기억기관을 따라가면 되겠다.

메이지 시대의 주역들은 에도 시대 폐쇄된 사회에서 벗어나 서구를 국가 발전의 모범으로 삼고 근대국가를 만들어 갔다. 현재 우리가 일본 고유의 것으로 생각하는 전통적 생활 감각이나 멋, 단단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만든 물건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재구성되고 재해석되어 살아남은 것들이 많다. 학문 영역에서 일본은 근대화를 서구화로 받아들이고, 정부 차원에서 대규모 번역 작업을 수행했다.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 학술용어를 개념화하면서 이를 일본어로 번역했다. 당시 번역은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단어를 만드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우리는 일본이 해석한 서구의 세계를 재해석하면서 일본식 근대화를 참고하고 때로 모방하면서 발전했다. 저자는 일제강점기에 대한 집단적 트라우마로 스스로 인식의 장벽을 만들어 우리의 근대사를 세밀하고 보다 객관적으로 조명하기가 쉽지 않았다고 털어 놓는다. 또한 지금의 일본을 있는 그대로 살펴볼 수 있는 첫걸음으로 일본의 기억기관을 찾아가보자고 권한다. 뛰어난 문화예술은 국경의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 책을 보며 공간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집과 사무실이 아닌 제3의 장소가 필요하다. 삶을 더 윤택하게 하고, 창의적으로 만드는 좋은 장소를 많이 발굴할수록 현재의 삶에 가능성을 보태게 되기 때문이다. 위대한 일상과 마법 같은 영감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는 생활공간이 많을수록, 이런 환경에서 양질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을수록 좋은 도시다.

역사적 켜가 많은 도시는 시대를 넘어서는 매력으로 세계시민의 눈길을 끌어 도시의 미래 지속가능성으로 연결된다. 어떤 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미래 세대에 어떻게 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욱 중요해질 것 같다. 도쿄를 깊게 만나고 나니, 우리가 사는 부산을 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될 것 같다. 부산의 기억기관은 온전한가 생각하게 된다. 박미향 지음/지에이북스/304쪽/2만 3000원.


<도쿄 모던 산책> 표지. <도쿄 모던 산책> 표지.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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