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다시 태어나도 아이들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강기홍 아동문학가
제1회 '용두산문학상' 수상
평생 중구에서 아이들과 함께해
초등학교 1학년 담임만 38년
"이야기하듯이 쉽게 글 쓰길"
“다시 태어나도 꼭 초등학교 선생 하겠습니다.”
부산중구문인협회가 제정한 용두산문학상을 초대 수상한 강기홍(87) 아동문학가의 첫마디였다. 용두산문학상은 피란 시절 한국 문학 역사의 중심에 놓였던 부산 중구 지역 문화 부흥의 일환으로, 그 문학적 가치를 일깨우고 이어가자는 취지로 제정되었다. 강 작가는 작품 이야기에 앞서 초등학교 선생이 왜 그렇게 좋은지 그 이유(?)부터 설명했다. 그는 “하루는 귀가 잘 안 들려 동아대병원에 있는 의사 제자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고 나오니, 의사 가운을 입은 7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졸업 기수대로 서 있다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자기들끼리 의논해 끝에 서 있던 의사에게 “니가 약 타서 선생님께 갖다 드려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초등학교 선생은 중고교 선생과도 대우가 많이 다르단다.
작가의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가 지금도 아이들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만큼은 100% 사실이었다. 부산 중구 보수동에서 태어난 강 작가는 평생을 중구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다. 1965년에 부산 남일초등(지금의 광일초등)에서 6년 근무한 뒤 남성초등에서만 36년간 있었다. 학교 이사장이 불러서 교장을 하라고 해도 거절하고, 남들은 기피하는 1학년 담임만 38년을 했다니 모르긴 해도 대한민국 기네스 기록이 아닌가 싶다.
한 번은 4학년 담임을 맡아서 잘 가르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고 했다. 그는 “주말마다 8명씩 한 팀을 만들어 교대로 집에 초대를 해서 하루씩 재우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냈다. 토요일 저녁을 우리 집에서 같이 먹고 마당에 간이 풀장을 만들어서 놀았다. 다음 날 아침 먹고 보내려고 하면, 아이들이 안 가려고 해서 점심에는 짜장면을 시켜 먹였다”라고 그 시절을 회고했다. 그때부터 전통이 이어졌다니 요즘 세상에 참 보기 드문 선생님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엄마들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강 작가가 아이들과 함께한 생활 자체가 동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동화를 쓰는 건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1969년에 동화집 〈개구장이〉를 내고, 197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다.
얼굴에는 여전히 개구장이 같은 동심이 읽히지만 삶에는 감내하기 힘든 일도 찾아오기 마련이다. 강 작가는 2년 전 그동안 받은 상장과 상패, 사진 등을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동아대 의대에 시신을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이같은 결심은 가슴에 묻은 두 딸에 대한 기억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그는 “루게릭병이 고등학교 때 발병한 큰 애는 33세에, 대학교 때 발병한 작은 애는 35세에 세상을 떴다. 인생의 꽃도 피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간 딸들에게 미안하고, 지금도 그때문에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나중에는 의사 표현이 힘들어진 딸들과 소통하기 위해 직접 도구까지 개발했지만 여전히 죄책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딸들이 그의 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잊히질 않아 쓴 동화가 1996년에 나온 〈종이학 사랑〉이다.
강 작가는 신기한 인연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그의 큰딸은 “눈을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그 딸이 죽기 전에 눈을 적출한 의사의 아들이 공교롭게도 다음 해 그가 맡은 학급에 입학했고, 지금까지도 인연이 이어지고 있단다. 용두산문학상 수상 역시 거절했지만 지난 9월에 발간된 아카이브집 〈황혼의 추억〉으로 받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수양딸인 사단법인 ‘빛을 나누는 사람’ 박상애 대표의 성화에 못 이겨 발간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후배 작가들한테 조언을 부탁했다. 강 작가는 “너무 글을 만들어 가지고 어렵게 쓰면 독자에게 외면당한다. 쉽게 그냥 막 이야기하듯이 쓰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용두산문학상 시상식은 29일 오후 4시 중구청 3층 중회의실에서 열린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