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을 갈망하는 우리가 희망의 등불이 된다면”
사회복지사가 꿈인 만학도들
부산여대 사회복지학과 모여
가족도 몰랐던 이야기 털어놔
■쉿! 내 안의 숨은 페이지들/이경희 외
“집에 TV, 냉장고, 세탁기 있는 사람 손 들어라!” 학교에서 이렇게 호구조사하던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의 학력도 물었다. 그럴 때면 우리 아버지는 중졸을 고졸로, 어머니는 국졸을 중졸로 올려서 적어 가라고 했다. 자식 기죽지 말라는 배려였을 것이다. 그렇게 안 하셔도 괜찮았다고, 이제 이야기한다.
<쉿! 내 안의 숨은 페이지들>은 배워서 남을 주는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부산여대 사회복지학과에 모인 만학도들의 자전적인 이야기이다. 가장 어린 학생은 50대, 큰언니는 70대이다.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로 지레짐작했지만 오산이었다. 진솔한 글이 주는 생생한 울림이 컸다. 자존심에 남편과 자식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하고 평생을 묻어둔 고름 보따리를 터뜨렸다는 표현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캐디와 학생을 병행하는 이경희 씨가 ‘세상은 꿈꾸고 행동하는 자의 것’으로 책을 연다. 노동자들에겐 ‘눈물 젖은 빵’이 설움의 상징이듯이, 캐디에겐 ‘물에 젖은 돈’이 그렇다고 한다. 7월에 많은 비가 내려도 골프장은 막판까지 휴장을 미루며 비가 잦아들길 기다린다. 그래서 캐디는 ‘대기 인생’이 되기 일쑤다. 성추행을 당하고 들어와 북받쳐 오른 설움의 눈물을 쏟아내다 용기 내어 맞서보려는 이야기가 가슴 아프다.
경희 씨가 대학에 면접을 보러 가던 날은 비록 골절 때문에 목발에 의지했지만,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단다. 대학이 현실의 벽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향해 나아가는 탈출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다리를 다치지 않았고, 인생을 되돌아보지 않았다면, 새로운 삶을 꿈꿀 수 있었을까? 경희 씨는 배움이란 어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법을 깨닫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배미경 씨의 ‘엄마를 빛나게 한 초록 거북이’는 장애와 모성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주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태어난 둘째 아들 세웅이와 미경 씨에게 세상은 냉정하고 이기적이었다. “천벌 받았네”부터 “장애인 엄마 주제에”까지 너무나도 심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경 씨는 아이를 요양 시설에 맡기라는 주위 사람들과는 단절했고, 친정 식구들과도 삼 년간 만나지 않으면서 지냈다.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까지 그야말로 전쟁의 연속이었다.
서서히 기적이 일어났다. 의사는 “뇌가 다친 걸 보면 이 아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말을 이렇게 잘하는 건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라며 세웅이를 꼭 껴안아 주었다. 세웅이가 대학에 가던 해에 미경 씨도 같이 대학에 갔다. 대학에 오니 장애를 앓는 아이를 키우면서 답답하고 힘들었던 설움이 아득히 사라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정례 씨는 ‘덤 인생 배움 통해 나아가리’라는 글을 썼는데, ‘덤 인생’이라고 한 이유가 있었다. 정례 씨가 초등학교 때 심하게 홍역에 걸려 병원까지 40리 길을 업혀 갈 때였다. 아버지는 “업고 가다가 죽으면 산에 버리고 묻어주라”고 했다. 평생을 친정과 시댁을 오가며 돌보는 삶을 살았던 정례 씨였다. 할머니도 배워야 손자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나이 60에 중학교 과정을 시작한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도와주는 게 역경을 헤치고 살아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보답이라고 믿고 있었다.
고달픈 세상에서 거친 파도를 이겨내는 삶을 살다 배움의 시기를 놓친 열세 명이 ‘작가’라는 타이틀로 우리 앞에 섰다. 이들은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가슴 속 종양으로 곪아 가던 아픔을 용기 있게 세상에 드러낸 우리들의 이야기가 배움을 고민하고 갈망하는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되기를 소망한다”라고 말했다. 역시나 만학에 상인 운동가로서 〈골목상인 분투기>를 냈던 이정식 지도교수의 성원이 이 책이 나오게 된 밑거름이 된 것 같다. 자신을 되돌아보기 좋은 연말이다. 나는 학교를 어떤 마음으로 다녔는지 돌이켜보게 된다. 지금의 어려움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하는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책이다. 이경희 외 12인 지음/도서출판 동문사/216쪽/1만 6500원.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