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보리는 겨울에 자란다
1960~1970년대 농촌에서 유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보리는 추억과 애환이 깃든 말이다. 겨울이 오면 아이들은 보리밭에 나가 보리밟기를 했고, 보리가 조금 더 자라면 보리피리를 만들어 불며 놀았다. 때로는 설익은 보리를 구워 먹고 입 주변이 시커멓게 변한 채 돌아다니기도 했다. 보리개떡, 보리죽 등 보리로 만든 음식은 집안 살림이 어려웠던 이들에게는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의 애환으로 남아 있다. 보리타작은 또 다른 기억의 한편에 있다. 보리타작할 때마다 까끌까끌한 보리 수염이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어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부산에도 보리와 관련된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 1953년 윤용하가 작곡하고 박화목이 작사한 노래 ‘보리밭’의 일부다. 교과서에 실려 학창 시절 누구나 한 번쯤은 불러본 가곡이다. 부산 중구 남포동 자갈치시장에 가면 이 노래비가 있다. 비에는 ‘윤용하 선생이 종군작곡가로 활동하던 시기,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박화목 시인과 술잔을 기울이다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는 내용의 이 노래 탄생 배경이 새겨져 있다.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에도 보리밭과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있다. 유엔군 묘지를 조성하던 시기,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와 관련된 얘기다. 1952년 12월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대선 승리 후 부산을 방문해 조성 중이던 유엔묘지를 둘러보기로 예정돼 있었다. 미군은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유엔묘지에 푸른 잔디가 깔려 있기를 원했다. 당시 부산에서 피란 생활을 하며 미군 사업을 수주해 회사를 성장시키고 있던 정 회장은 겨울에도 푸른 잎을 틔우는 낙동강 변의 보리를 몽땅 사들여 묘지를 단장했다고 한다.
보리밥이 서민의 밥상에서 물러난 이후로 보리밭은 우리 곁에서 보기 힘들었다. 한데 최근 부산 수영구 민락해변공원 광장에 청보리밭이 조성돼 눈길을 끈다. 수영구는 1800㎡ 규모의 청보리밭을 조성해 수확 시기인 내년 5월까지 운영한 뒤, 광안리어방축제 기간에 맞춰 수확과 탈곡 등의 체험 행사를 진행할 거라 한다.
보리는 밟혀도 다시 일어서는 강한 생명력을 가졌다. 긴 겨울의 모진 추위를 견디면서도 푸른 생명력을 잃지 않으며, 추운 겨울을 품어 건강한 봄을 생산해 낸다. 그래서 보리는 겨울에 자란다고 말한다. 들판에 나가서 보리밭을 파보면 겨울이 봄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 경제가 한파를 겪고 있지만 분명 따듯한 날이 오리라 믿는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