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학수의 문화풍경] ‘철학의 위안’, 최악을 상상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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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철학 아카데미 숲길 대표
전 경성대 철학과 교수

최악의 사태를 미리 예견해 보는 훈련
미래의 재앙이 주는 해악 줄일 수 있어
정치적 격변기 전통 철학의 지혜 주목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책 읽기에는 겨울이 더 좋다. 겨울은 날씨가 추워 실내에 머무는 시간이 많고, 밤의 길이가 길고, 나뭇잎이 떨어진 정원의 적막함은 독서에 적합한 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12월 중순부터는 새해를 계획하며 삶의 성찰이 일어나는 시기인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사색적 저술을 찾게 된다. 그러나 전문적 철학은 너무 어려워 조금 읽다가 말아버리고, 대중적 저술은 너무 깊이가 얕거나 일방적 시각에 치우쳐 있다. 반면 알랭 드 보통은 철학과 심리학, 예술사를 섞는 독특한 방식으로 소설이나 에세이를 써서 독자의 이해를 도우면서도 더 깊은 사고를 자극한다. 대표적 저술은 1993년의 〈사랑의 에세이(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철학의 위안〉(2000), 〈불안〉(2004),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2012) 등인데, 오늘 소개할 책은 〈철학의 위안〉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책에서 위대한 철학자 6명의 지혜를 통하여 독자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준다. 제1장 ‘인기 없음의 위안’은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활용하여 세상에서 인정받지 못하면서도 자신을 지키는 방법을 안내한다. 제2장 ‘가난의 위안’은 돈이 부족하면서도 만족하는 인생을 어떻게 영위할 수 있는지 에피쿠로스의 가르침을 통해 설명한다. 제3장 ‘좌절의 위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패하여 분노하거나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어려움을 돌파할 수 있을지 스토아주의 철학자 세네카의 지혜를 통하여 인도한다. 제4장 ‘부적합성의 위안’은 몽테뉴의 통찰을 통해 비정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이 문제를 극복하도록 안내한다. 제5장 ‘실연의 위안’은 쇼펜하우어의 삶-의지 개념을 활용하여 연애 관계에서 거절당한 사람이 왜 가슴 아플 이유가 없는지를 설명한다. 제6장 ‘난관의 위안’은 니체의 사상을 도입하여 삶의 고통과 대결하는 자세를 안내한다.

최근 한국 사회는 격변을 경험하고 있다. 현대의 다수결 민주주의는 사실은 다수의 통치여서 다수의 국민과 소수의 국민은 늘 이익과 감정이 충돌한다. 선거나 탄핵과 같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날 때, 다수의 승리자는 그들의 신념과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이 시행되어 즐겁지만, 패배한 소수는 통치로부터 소외되어 좌절하고 그것이 불안과 분노를 일으킨다. 정치적 경쟁에는 승패가 반드시 따라오므로 어느 쪽이 이기든 다른 한편은 좌절의 시련과 싸워야 한다. 이런 시국에서는 제3장 좌절의 위안을 먼저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는 1773년에 그린 ‘세네카의 죽음’에서 서기 65년 로마 황제 네로의 명령에 따라 자살하는 세네카의 마지막 장면을 묘사한다. 세네카는 황제를 몰아내려는 반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화면의 중앙 왼편에 세네카가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고, 의사는 세네카의 발목과 무릎 후면의 정맥을 절단한다. 그래도 피가 상처로부터 잘 나오지 않자 세네카는 왼손을 뻗어 의사에게 독약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다. 화면 중앙 오른쪽에는 아내 파울리나가 남편과 함께 죽기 위해 역시 칼로 정맥을 자르는 장면이 나온다. 죽어가는 세네카와 아내의 표정은 억울함이나 슬픔, 고통을 넘어서 당당하다. 이런 흔들림 없는 정신의 덕성을 도야하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이상이다.

세네카는 이전에도 재앙을 겪었다. 서기 41년 공주와 간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코르시카섬으로 유배되어 8년 동안 귀양살이를 했다. 그런 좌절 속에서도 그는 평정의 자세를 유지하였다. 〈루킬리우스에게 보내는 윤리 서한〉의 ‘편지 91’에서 세네카는 이렇게 말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재앙을 맞이하면 충격이 훨씬 강렬한데, 그 예상하지 못함이 불운의 무게를 증가시키는 것이다. (…) 앞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일을 실제로 일어날 것처럼 미리 그려봄으로써 다가올 재앙으로부터 해악을 제거할 수 있다.” 미래에 일어날지도 모를 나쁜 상황을 미리 상상하는 훈련이 바로 스토아주의의 ‘최악의 예상(premeditatio malorum)’ 개념이다. 이것은 염세적 사고나 단순한 부정적 사고가 아니라, 다가올지도 모를 불운한 사건들을 미리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대책을 준비하는 기회를 일으키거나, 죽음이나 노화처럼 대책이 없는 문제에서는 당당하게 재앙을 맞이하게 하는 용기를 준다. 최악의 예상은 비관적 사고가 아니라 건설적인 부정적 사고인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철학의 위안〉에서 철학자들의 사상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었으며 엄격한 분석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점은 독자가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그런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은 전통 철학에서 실천적 지혜를 추출하여 현대의 관심에 응용하는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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