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응원봉을 든 청년들을 위해
차가운 거리에 선 ‘응원봉 청년들’
무엇이 그들을 이리도 분노케 하나
민주적이며 자유롭고 행복한 사회
함께 더 단단한 각오로 지켜나가야
지난 21일 밤, 서울 도시철도 종각역 인근. 엄청난 사람의 물결이 끝도 없는 긴 무리를 지어 행진한다. 광화문 인근에서 집회를 마친 이들이 명동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다.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 에스파의 위플래시, 로제의 아파트 등 흥겨운 K팝과 구호가 땅을 울린다. 형형색색 빛나는 응원봉도 일사불란하다. 일주일 전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안이 가까스로 가결된 뒤 꺾일 줄만 알았던 열기가 그대로다.
‘고양이 발바닥 연구회’, ‘우리나라 정상영업 합니다’, ‘당근 아니라고 보석이라고‘(세븐틴 팬덤 캐럿), ‘마법학교 입학편지 누락 마법사 연합’…. 허공에 가득 휘날리는 깃발은 듣던 대로 발랄하고 기발하다. 면면을 찬찬히 보니 앳된 20대 여성이 대부분이다. K팝 콘서트에서, 대학 캠퍼스에서 보던 바로 우리 아들딸들이다. 평소 사회 문제를 인지하고 관여하던 ‘한쪽’이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 나선 게 아닐까 작은 의심을 품었지만, 그게 아니란 걸 확인한 것이다.
같은 날 밤, 적지 않은 청년들이 다시 서초구 남태령으로 달려갔다. 상경하던 농민들의 트랙터 행렬이 경찰에 막히자 수천 명이 집결했다. 소통 도구는 옛 트위터 엑스(X), 인스타그램 등 SNS다. 각종 음식과 편의용품은 물론 난방용 버스들까지 등장했다. 결국 그들의 에너지가 28시간 만에 견고한 차벽을 뚫어냈다.
무엇이 시린 영하의 날씨에 거리에서 청년들을 뭉치게 했을까. 평화로운 주말을 즐기고 있어야 할 그들을 보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불행이라고 해야 하나’ 의문이 꼬리를 문다.
대한민국은 ‘그날’을 기준으로 역사가 새로 쓰이는 듯하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평소 제각각 폐쇄적이던 각종 팬덤의 온라인 플랫폼들이 계엄이라는 빅뱅에 의해 하나로 대동단결을 이뤘다. 이제 정치 고관여층이 50대 이상이라는 말도 통하지 않게 됐다.
그곳에서 만난 청년들은 한마디로 ‘우리의 자유와 생명은 우리가 지키겠다’고 했다. ‘가만히 있으라’던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겪으면서 당연한 줄 알았던 자유와 자신의 생명이 더는 보장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견딜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탄핵 관련 소식에서 눈을 뗄 수 없다. 응원봉의 연대는 과거 최루탄 냄새가 가득한 거리에서 투쟁가를 소리쳐 부르던 ‘엄빠’ 세대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빼앗긴 자유를 되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었다.
그간 이른바 ‘뉴스 회피자들’은 세계 언론의 고민거리였다. 뉴스를 외면하는 청년들을 유인하는 것이 큰 숙제였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청년들을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성하게 된다. 기성 세대는 그들이 자신만의 세상과 이기적인 즐거움을 위해 사회 문제를 외면한다고 쉽게 판단했다.
오히려 기성세대가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거나 변화하려 하지 않고, 오래된 잣대로만 뉴스를 공급해 온 결과라는 확신이 든다. 라디오에서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마냥 기쁘고, 가수나 배우의 사진이 담긴 책받침을 소중하게 여기던 기성세대이지만, 응원봉을 든 젊은 세대의 생각과 변화에는 둔감했던 것이다.
지금 청년 세대는 유인물을 뿌리던 과거 세대와 달리 SNS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녔다. 이제 다시 처참하고 무도한 폭력의 밤이 그들을 겁박하려 시도한다면 순식간에 들불 번지듯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다.
비상계엄과 탄핵 사태가 나라를 뒤흔들지 않았다면, 거리의 청년들은 크리스마스와 연말에 가족과 함께 행복하고 따뜻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고난은 늘 새로운 세상을 열 기회로 작동했다.
이번 사태가 더 성숙하고 단단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할 원동력이 될 것임은 명백하다. 비폭력과 연대로, 믿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치우치지 않는 민주적인 견제와 균형이 살아 있는 사회에서 비로소 청년들은 희망을 가질 수 있다.
서로 생각과 속도가 다르더라도, 상대를 존중하고 인정하는 우리 아들딸이 꿈꾸는 나라를 위해 우리가 든든한 버팀목과 기둥이 되어야 한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청년들이 더는 거리로 나서지 않도록, 포기하지 않고 미래를 위해 조금씩 나아가도록.
박세익 플랫폼콘텐츠부 부장 run@busan.com
박세익 기자 ru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