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아~ 통영이여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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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은 다도해 부근에 있는 조촐한 어항이다. 부산과 여수 사이를 내왕하는 항로의 중간 지점으로서 그 고장의 젊은이들은 조선의 나폴리라 한다.” 한국 현대문학의 거장 박경리의 소설 〈김약국의 딸들〉 첫 도입 부분이다. 소설에서처럼 통영은 아름다운 항구란 의미로 동양의 나폴리로 불린다. 하지만 통영은 처음부터 통영이 아니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두룡포로 불렸다. 통영이라는 지명은 임진왜란 이후 설치된 조선 수군의 최대 본영인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유래한다. 기록상으로는 선조 37년(1604년) 제6대 삼도수군통제사 이경준이 통제영을 두룡포로 옮기면서 통영이란 명칭이 등장한다. 군영의 명칭이 공식 지명이 된 흔치 않은 경우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1593년 삼도수군통제사 직제를 새로 만들어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에게 통제사를 겸임하게 한다. 이때만 해도 통제사의 본영은 지명과 무관하게 삼도수군통제영 또는 약칭으로 통제영, 통영이라 불렀다. 두룡포를 통영이라고 부르기 전까지는 통제영이 있었던 전남 여수, 경남 거제도 등의 통제사 지휘소를 통영이라 칭했던 것이다. 역대 통제사에는 제1대 이순신을 비롯해 원균, 이시언, 정기룡 등이 이름을 올렸다. 통제영이 통영에 설립된 이후부터 1895년(고종 32년) 7월에 폐지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200여 명의 장군이 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2014년 10월, 통영의 한 텃밭에서 조선시대 통제사의 공덕을 기리는 사적비가 발굴됐다. 그 수는 무려 24기에 달했다. 이는 국내 역사학계의 큰 관심을 끌었고, 비석을 통해 통제영의 군사제도와 운영, 재정 실태를 확인할 수 있어 문화재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통영시와 국가유산청이 예산 부족 등의 이유로 10년 넘게 복원 작업을 미루고 임시 가림막만 두른 채 방치하고 있다고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통영의 지명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통제영의 역사는 곧 통영의 역사다. 통제사 사적비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라 통영의 역사와 정체성을 담고 있는 소중한 자원이다. 통영은 박경리, 유치환, 김춘수, 윤이상, 전혁림 등 수많은 예술가를 배출했다. 시인 백석과 정지용, 화가 이중섭 또한 이곳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래서 통영은 흔히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불린다. 300년 통제영이 그 뿌리를 내려 문화의 꽃을 피웠다. 백석은 “자다가도 일어나 가고 싶은 곳이 통영이다”라고 했을 정도다. 통영의 빛깔과 향기에 걸맞은 그런 통영이길 바란다. 통영시와 국가유산청의 각성을 촉구한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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