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한강 문학 정신, 계엄을 뒤집었다
노벨상 수상, 전국서 축하 분위기
뒤이은 계엄에 작가가 던진 질문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느냐”
탄핵 가결, 과거 민주화 정신 계승
지난해 연말 광주를 다녀왔다. 광주는 축제 분위기로 충만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축제라고 해서 폭죽을 터트리면서 먹고 마시는 분위기만 연출하는 것은 아니다.
광주 출신 소설가 한강(54)의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기념하는 축하행사는 물론 책 읽기와 수상 배경을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엿보였기 때문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해 10월 10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을 선정했다. 아시아 여성 작가로는 최초 수상이다. 한국인의 노벨상 수상은 2000년 고 김대중 대통령의 평화상 수상에 이어 두 번째, 아시아 작가 수상은 2012년 중국 작가 모옌 이후 12년 만이다. 한림원은 한강 선정 이유로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이라는 평가했다.
광주에서는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이후 3개월 지난 최근까지도 민주화 정신을 계승하는 차원의 책읽기가 이어지고 있다. 민주화의 상징인 옛 전남도청 별관을 비롯한 광주시내 곳곳에 수상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내걸리고, 각종 기관에는 기념행사가 계속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정중동으로 그 정신을 이어주는 곳이 도서관이다. 광주 북구에 있는 무등시립도서관에는 그해 11월 16일 ‘한강의 소설 깊이 읽기-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라는 특강을 비롯해 연말까지 한강 작가 작품 20여 점 전시회를 열었다. 도서관 현관에는 한강 작가 소설을 읽은 시민들의 감상문이 전시돼 있다. 한강 작가 책에 대한 대출 신청이 폭주하자, 도서관들은 ‘당분간 대출이 어려울 수 있다’는 안내문까지 게시했다. 도서 대출 요구가 쇄도하는 것은 물론 책을 읽기위해 열람실을 찾는 방문객이 전국에서 꾸준히 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왜 이렇게 열광할까? 광주 출신 작가의 노벨상 수상이라는 거대한 ‘상장’ 무게보다, 과거 쓰라린 아픔을 간직한 광주 민주화 정신이 책으로 조명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한강의 여러 작품 중 노벨문학상에 이르게 한 결정적 작품으로는 〈소년이 온다〉가 꼽힌다. 이 책은 1980년 군사 정권의 비상계엄 선포와 5월 광주 학살로 이어지는 타임라인을 정면으로 마주한 작품이다. 책에는 군부의 잔혹함과 살아남은 이들의 후유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는 소설을 관통하는 ‘죽지 말아요’란 문장을 통해 ‘5월의 광주’라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노벨상 수상은 전국을 국가적 축제 분위기로 달궜다. 수상자 발표 당시 라오스를 방문 중이던 윤석열 대통령도 당일 페이스북에 축하 글을 올렸다. 그는 “대한민국 문학 사상 위대한 업적이자 온 국민이 기뻐할 국가적 경사”라며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승화시켰다”고 칭찬했다. 하지만 두 달 후인 12월 3일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민은 어안이 벙벙했다. 계엄 실상을 다룬 작품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나라에서 두 달 만에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비상계엄이 선포된 것이다. 44년 전 총을 들고 광주 시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군대는, 다시 한 번 총을 메고 국회에 난입했다. 계엄 때문에 겪었던 44년 전 아픔을 문학으로 치유했다고 자찬하는 순간, 계엄이 또다시 등장한 셈이다.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국회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일주일 만에 한강 작가는 노벨상 시상대에 올랐다. 그는 수상 기념 강연 ‘빛과 실’에서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는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한강의 문학 정신은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에 강력한 메세지를 던졌다.
그가 낭독했던 ‘빛과 실’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에서 다시 울려 퍼졌다. 12월 14일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윤 대통령에 대한 2차 탄핵안 제안설명을 하면서 “저는 이번 12·3 비상계엄 내란사태를 겪으며,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라고 답하고 싶다. 1980년 5월이 2024년 12월을 구했기 때문이다. (중략)44년 전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죽음을 각오하고 계엄군과 맞섰던 광주 시민들의 용기가, 그들이 지키려 했던 민주주의가,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고 강조했다.
당시 국회 앞과 거리에서 탄핵을 갈망하던 국민들의 열망은 국회를 통과했다. 44년 전에는 계엄이 국민을 짓밟았지만, 2024년에는 문학이 계엄을 뒤집는 힘이 됐다. 정치가 추락시킨 국가의 품위를 문학이 떠받친 셈이다.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선 한강의 문학 정신이, 광주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김길수 중서부경남본부장 kks66@busan.com
김길수 기자 kks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