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위험한 사마리아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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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의 세바스티야는 제국들이 지나간 흔적이 더께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기원전 북이스라엘의 수도일 때 지명은 사마리아였다. ‘팍스 로마나’ 시대가 남긴 휑뎅그렁한 신전 기둥과 세례자 요한이 옥살이했다는 전승, 비잔틴·십자군·오스만 유적과 함께 이슬람 모스크가 공존하는 역사적 공간이다. 지금은 올리브 나무를 키우는 팔레스타인 농부들의 삶의 터전이다. 옛 지명 사마리아는 신약 성서에 등장해 유명하다. 강도를 만나 쓰러진 낯선 이들을 돌본 ‘선한 사마리아인’의 고장이다. 최근 이곳은 점령 당국 이스라엘의 일방적 발굴·개발 추진에 유네스코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며 저지에 나서 주목받고 있다.

유네스코는 지난 5월 세바스티야 유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행위를 자제하라는 성명을 냈다. 180만㎡(54만 평)가 넘는 옛 사마리아 부지를 강제 수용하는 이스라엘 측의 법안이 논란을 불렀다. 팔레스타인이 행사하던 유적 관리권을 이스라엘로 가져오는 것이 법안의 핵심이다. 성경에 명시된 이스라엘 고대 유산 보호가 명분이다. 유적 발굴과 감시 시설, 방문객 센터·주차장·울타리, 마을을 우회하는 진입도로에 필요한 부지를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유적과 마을이 단절되고, 농업과 관광업 생계 기반이 빼앗길 것으로 우려한다. 유네스코는 부산에서 열리는 제48차 세계유산위원회를 앞두고 세바스티야를 세계유산 신규 등재와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동시 등재를 긴급 안건으로 지정했다.

세바스티야의 운명은 196개 회원국의 투표로 결정된다. 한국은 세계유산협약 가입 38년 만에 세계유산위원회를 부산에 유치했고, 의장국을 맡아 합의를 끌어내는 역할을 맡게 됐다. 한국전쟁의 고난이 새겨진 피란수도 부산에서 인류 공동의 유산 보존을 주도하게 된 점은 감개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유적의 발굴은 국제법을 준수해야 하고, 모든 관련 당사자의 동의와 협력 아래 이뤄져야 한다.’ 일본이 사도광산의 강제노역 역사를 지우려 했을 때 우리가 느낀 분노를 떠올려 볼 일이다. 유산 등재에 개발을 멈추게 하는 강제력은 없지만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인정되는 것이라 영향력을 발휘할 수는 있다. 일방의 편을 들지 않되 동의와 협력을 주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원칙을 확인하는 일은 진부해 보여도 국제사회의 도움을 기다리는 옛 사마리아에는 결코 작지 않은 힘이 될 수 있다. 의장국 한국의 선한 영향력을 기대한다.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김승일 수석논설위원 dojun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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