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수는 숫자에 불과하다!' 옷을 고를 때 헷갈리는 사이즈(치수)보다 자신의 체형에 맞추는 게 중요하다.
"고객님,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
옷 가게에서 이 질문에 아무 머뭇거림 없이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내 사이즈를 가늠하는 점원의 시선? 신경이 쓰인다. 여러 사이즈를 입어 봐야 한다면? 눈치가 보인다. 작아서 단추가 잠기지 않으면? 민망하다. 가장 난감한 상황은 이것이다. "고객님, 우리 브랜드는 66사이즈까지만 나옵니다."
소비자 55/66 식 표기 익숙
브랜드마다 사이즈 달라
날씬해 보이도록 편법 표기도
새 KS표기법 10월 개정 기대
점원들도 고충이 있다. 까닥 잘못했다가는 들어온 손님을 놓칠 수 있다. "66이 맞는데 끝까지 55를 입겠다고 고집하는 분이 있어요. 그럴 때에는 66인데 다른 브랜드 55사이즈랑 똑같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합니다." 한 점원의 토로다. 또 다른 점원은 "처음부터 큰 사이즈를 권하면 기분이 상하니까 먼저 66사이즈를 보여드리고, 옷이 맞을 때 이 상품은 사이즈가 좀 작게 나왔다고 말하면 고객들이 좋아한다"고 답했다.
브랜드 상품이 아니라 길거리 브랜드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옷을 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는 입어 보지 않고 치수만 믿고 샀다가 실패하는 경우가 많고, 판매자는 고객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해 66을 '통통55', '마른66' 식으로 표기하거나, 사실은 55~66사이즈만 입을 수 있는 'F'(프리사이즈)라는 단일 사이즈 상품을 만들기도 한다.
55, 77, 90, 100, 25, 29, XS, L…. 이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 몇 개가 뭐기에 여자들을 예민하게 만들고, 헷갈리게 하고, 때로는 주눅 들게 하는 것일까.
■알쏭달쏭한 사이즈 표기법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치수는 크게 55/66 또는 90/95 식의 숫자와 S/M 같은 알파벳으로 나뉜다. 그러나 정부가 정한 한국산업표준(KS) 규격은 따로 있다. 여성용 정장의 경우 '가슴둘레-엉덩이둘레-키'를 ㎝ 기준으로 '85-90-160'처럼 표기하고, 여성용 캐주얼은 가슴둘레(예 85) 또는 문자호칭(예 S)을 붙인다.
하지만 대부분 소비자는 한국산업표준보다 55/66 식 표기에 더 익숙하다. 소비자는 정확한 신체 치수보다 이해하기 쉽고, 업체는 서너 가지 치수만 만들면 되기 때문에 재고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왼쪽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여성 정장 브랜드 JJ지고트의 원피스는 44~77식 표기를, 캐주얼 브랜드 클라이드의 여성용 청바지는 허리둘레(㎝)를, 마담정장 브랜드 최연옥의 재킷은 55~77을 1~4로 표기하는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동그라미 안이 해당 옷의 사이즈. 맨 마지막 사진은 플러스사이즈 전문 여성복 브랜드 '그 여자네 집'의 사이즈 표기로 동그라미 속의 숫자 '01'은 77~88사이즈를 뜻한다. 최혜규 기자이 표기법의 기원은 197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정부가 측정한 성인 여성의 평균 치수인 키 155㎝, 가슴둘레 85㎝의 뒷자리 숫자를 따서 '55'로 칭한 것이다. 여기에서 키는 5㎝ 간격, 가슴둘레는 3㎝ 간격으로 더하고 뺀 것이 44, 66이다.
그러나 이 표기법은 KS 규격상으로는 80년대 말 이미 폐지됐다. 빠르게 변화하는 한국인의 실제 신체 치수를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기술표준원 '사이즈코리아' 사업의 최신 조사(2010년 기준)에 따르면 20~24세 여성의 평균 신장은 160.4㎝, 가슴둘레는 82.8㎝이다. 문제는 KS 규격이 의무가 아니라 권고 사항이고, KS 규격이 명시되더라도 정작 소비자는 과거의 표기법으로 옷을 구매한다는 데 있다. 날씬한 몸매를 지향하다 보니 업체에서 생산 당시부터 55사이즈를 44로 표기하는 편법도 생긴다.
같은 55/66이라도 브랜드마다 정해 놓고 있는 표준 사이즈도 다르다. 올리비아 로렌 정여진 수석 디자이너는 "같은 55라도 젊은 층을 타깃으로 딱 붙는 스타일이 많은 브랜드와 중년층을 대상으로 편안한 스타일을 지향하는 브랜드가 실제 기준으로 삼는 신체 치수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중년층 타깃 브랜드라도 좀 더 젊게 입고 싶다는 고객들의 요청에 따라 55사이즈의 기준 신체 치수를 줄이기도 한다. 디자인 과정에서도 아이템에 따라 기준으로 삼는 치수가 다르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에서 둘러본 브랜드별 사이즈 표기법도 제각각이었다. 20~30대가 주 타깃인 여성정장 브랜드 'JJ 지고트'는 44~77, 40~50대 대상 마담정장 브랜드 '최연옥'은 55를 1, 66을 2로 표기하는 방식으로 1~4, 10~20대 캐주얼 브랜드 '클라이드'는 바지의 경우 허리둘레를 26~29 식으로 표기했다. 로드숍이 주요 유통 채널인 '올리비아 로렌'은 가슴둘레를 기준으로 90~105라고 표기했다.
88 이상인 빅사이즈, 소위 '플러스사이즈'의 경우는 표기법이 또 다르다. 로드숍과 온라인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는 빅사이즈 전문 여성복 브랜드 '그여자네집'은 77~88을 1로, 88~99를 2로, 110~130을 3으로 표기한다. 체격이 큰 여성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큰 숫자보다 작은 숫자로 '호칭'되기를 선호하기 때문이다. 고객을 마음을 상하지 않게 하려는 배려이다.
■사이즈보다 내 몸 치수 '중요'
그렇다면 소비자는 '사이즈'를 둘러싼 혼란에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까. 업체들이 다양한 사이즈를 생산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방법이다.
다인종 국가가 사는 미국은 실제로 여성복 치수를 2. 4, 6, 8, 10, 12 등 여섯 가지로, 하의 다리 길이를 긴 것, 중간 것, 짧은 것으로 구분해서 생산한다. 총 18가지 치수 중에 자신의 몸에 맞는 것을 고를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옷 사이즈'에 내 몸을 맞추지 말고 '내 몸의 사이즈(체형)'에 옷을 맞추는 것이 현명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 JJ지고트의 박정은 부매니저는 "디자인마다 사이즈가 다르기 때문에 사이즈 숫자에 연연하기보다 내가 원하는 스타일이나 아이템을 먼저 요청하면 점원들도 거기에 맞는 사이즈의 옷을 권해 줄 것"이라고 말했다. 올리비아 로렌 정여진 디자이너는 "상의는 가슴둘레, 하의는 엉덩이둘레에 맞춰서 옷을 구매하고 나머지 치수는 내 몸에 맞게 수선하는 방법"을 권했다.
앞으로는 55/66식 표기 대신 KS 표기법을 참고해 보는 것도 좋겠다. 기술표준원은 의류 치수 KS 규격을 보다 단순화, 효율화하는 방향으로 개정한다. 성인 정장의 경우 가슴둘레, 허리둘레, 키 등 3개 치수를 나열하던 것을 가슴둘레를 기본으로 표기하고 나머지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호칭별 치수 범위를 정하게 했다.
예를 들어 가슴둘레-엉덩이둘레를 85-90으로 표기하고 그 범위를 각각 82.5~87.5, 87.5~92.5식으로 쓰는 것이다. 이 개정안은 업계의 의견을 수렴해 오는 10월께 고시된다. 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