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라도 밝혀져 홀가분합니다. 처벌은 달게 받겠습니다.”
동거하던 연인을 때려 숨지게 한 뒤 시신을 집 베란다에 암매장했다가 16년 만에 덜미가 잡혀 법정에 서게 된 50대(부산일보 9월 24일 자 8면 보도)가 검찰에 털어놓은 심경이 눈길을 끈다.
오래전 저지른 범행임에도 범행 일시는 물론 주변 상황까지 명확히 기억하고 있던 그는 끔찍한 기억을 지우려 마약에 손대고 극단 시도까지 했다며 오히려 지금이 홀가분하다고 진술했다.
창원지검 통영지청 형사2부(부장검사 송인호)는 지난 11일 살인 및 마약류관리법위반 혐의로 A(58) 씨를 구속기소 했다. A 씨는 2008년 거제시 한 다세대주택 옥탑방에서 함께 살던 B(당시 33세) 씨를 살해하고 시신을 여행용 가방에 담아 은닉한 혐의를 받는다.
사건을 수사한 검찰과 경찰은 최초 “모르는 일”이라면 발뺌하던 A 씨가 자백 이후엔 순순히 조사에 응했다고 전했다. 특히 16년 전 일임에도 범행 일자와 구체적인 시간은 물론 타격 도구, 부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시멘트 작업을 마치고 나니 조선소 직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퇴근하고 있었다” 등 구체적인 당시 정황까지 설명했다. 이런 진술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꾸며내기 어려운 사실관계라는 게 검찰 설명이다.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엔 범행 후 피폐해진 삶을 돌아보며 뒤늦게 후회했다. 그는 검찰 조사에서 “16년간 심적으로 괴로워 마약에 극단 선택 시도까지 했다”며 “이제라도 밝혀져 홀가분한 마음”이라고 했다.
어긋난 인연의 시작은 26년 전인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의 한 유흥업소에서 디제이로 일하던 A 씨는 손님으로 온 B 씨를 만났다. 연인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2004년 거제에서 동거를 시작했고, 2007년 4층짜리 원룸 옥탑방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듬해 10월, 이성 문제로 시작된 언쟁이 끔찍한 살인으로 이어졌다. 감정이 격해진 A 씨는 둔기를 휘둘렀고, 머리와 얼굴을 구타당한 B 씨는 결국 숨졌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A 씨는 시신을 여행용 가방에 넣어 베란다에 암매장했다. 이곳은 좌우가 막혀 옥탑방 창문을 넘어가야 닿을 수 있는 좁은 통로다. 여기에 벽돌을 쌓아 만든 공간에 가방을 숨기고 시멘트로 채웠다.
B 씨 모친은 3년이 지난 2011년에야 실종 신고를 했다. 평소 왕래가 뜸했던 탓이다. 그러나 실종 사건은 당시 행방을 추적할 만한 단서나 뚜렷한 범죄 혐의점을 찾지 못해 미제로 종결됐다. 당시 동거인으로 참고인 조사를 받은 A 씨는 “헤어졌다”고 둘러댔다. 이후 암매장한 시신을 곁에 둔 상태로 8년 넘게 평소와 다름없이 생활하던 A 씨는 2016년 마약 투약으로 구속됐다. 1년 뒤 출소한 A 씨는 형제자매가 있던 양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가 떠난 뒤 세입자가 없어 공실로 남았던 옥탑방은 명도 소송을 거쳐 건물주 개인 창고로 사용됐다.
그렇게 영영 묻히는 듯했던 사건의 진실은 지난 8월 옥상 방수 공사를 하다 실체가 드러났다. 건물주 의뢰로 수상한 콘크리트 더미를 부수던 인부들이 여행용 가방을 발견한 것이다. 속엔 백골화가 진행 중인 사체가 있었다. 전담 수사팀을 꾸린 경찰은 A 씨를 유력 용의자로 특정, 지난달 19일 체포했다.
하지만 범행 도구나 지문, DNA 등 물증 없이 정황 증거와 진술만 있는 상황이라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할 경우, 무죄로 뒤집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마약 전과에 체포 당시에도 필로폰에 취해 있었던 점 등에 비춰 자백 신빙성이 낮다고 보고 진술 구체성과 일관성, 범행 동기를 과학적으로 검증하는 데 집중했다.
특히 필로폰은 통상 7~10일 내 체외로 배출된다는 점을 고려해 마지막 투약 10일이 지난 시점부터 추가 조사를 진행하고 대검찰청 통합심리분석도 병행한 끝에 공소 유지가 가능하다고 판단, 살인죄로 재판에 넘겼다. 사체 은닉은 공소시효(7년)가 만료돼 혐의에서 제외했다.
검찰 관계자는 “죄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을 받도록 공소유지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라며 “국민 생명을 침해하는 중대 강력 사건이 암장 되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해 범죄자는 반드시 붙잡혀 처벌을 받게 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도록 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