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배너
배너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대통령의 거짓말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페이스북
트위터

“DJ(김대중)는 입만 열면 거짓말!” YS(김영삼)는 DJ가 거짓말쟁이라며 집요하게 몰아세웠다. 참다 못한 DJ가 반박했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아직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두 전직 대통령 모두 한국 정치사에 길이 남을 식언을 남겼다. YS는 대선 공약에서 “직을 걸고 지키겠다”던 쌀 시장을 끝내 개방하면서 대국민 사과했다. DJ는 대선 불출마·정계 은퇴 선언을 번복했고 그때마다 국민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정치 지도자의 말 한마디는 천금과 같다. 특히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의 언사는 국민의 삶과 국가의 미래에 직결된다. 그래서 대통령의 식언과 빈말, 말 바꾸기는 도덕적 비난으로만 끝날 수가 없다. 국가의 신뢰 기반이 무너지고, 사회적 혼란이 초래되는 위험천만함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됐다. 12·3 계엄령 선포 이후 43일 만이다. 윤 대통령은 본인의 언행과 가족·지인을 둘러싼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허술한 변명이나 발뺌식 해명, 궤변 또는 모르쇠로 대응해 비판을 자초했다. 게다가 금세 뒤집힐 것이 뻔한 거짓말도 주저하지 않아 국민에 큰 실망감을 안겼다. 이제 사법의 심판대 앞에 선 윤 대통령에게 진실의 시간이 시작된다. 피의자 윤석열은 대통령 윤석열이 타락시킨 언어의 부메랑을 피할 수가 없게 됐다. 국민들은 국정 최고 책임자 스스로가 훼손한 말의 무게감에 대해 엄중한 책임 추궁을 기다리고 있다.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탄핵 찬성 집회 참가자들이 추위를 이기려 은박 담요를 덮은 채 앉아 있다. 연합뉴스 12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 인근에서 열린 탄핵 찬성 집회 참가자들이 추위를 이기려 은박 담요를 덮은 채 앉아 있다. 연합뉴스

■ 대통령 궤변이 낳은 ‘팩트 체크’ 보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15일 오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대통령 관저에서 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했다. 이에 맞선 윤 대통령 측은 불법적인 법원 영장, 수사 권한이 없는 공수처의 불법 체포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날 윤 대통령은 영상 메시지에서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서 일단 불법 수사이기는 하지만 공수처 출석에 응하기로 했다”고 주장했다. 수사와 체포를 불법으로 규정한 데 이어, 자신이 체포되는 것이 아니라 ‘출석’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윤 대통령의 주장이 궤변으로 흐르는 일이 빈번해지자 대통령 주장을 받아쓰기하는 대신 참과 거짓을 비교하는 팩트 체크(사실 확인) 보도가 확연히 늘었다. MBC, JTBC 등은 15일 윤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를 생중계하는 동시에 영장이 적법하게 발부된 사실 등을 따져 윤 대통령 주장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검증 보도를 내보냈다.

이날 궤변의 압권은 윤 대통령이 자신의 SNS 계정에 육필 원고를 올리고 부정 선거론을 장황하게 주장한 대목이다. 같은 날 CBS 시사 프로그램 ‘박재홍의 한판 승부’는 앞선 9일 국회 긴급 현안질의에 출석한 김용빈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의 ‘말도 안 되는 얘기’라는 언급을 소개하면서 부정 선거론은 망상이라고 일축했다. 김 사무총장은 윤 대통령의 대학 동기이자 친구로, 윤 대통령이 임명했다. 그는 국회에서 우리나라는 실물 투표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고, 사후 검증이 이뤄지기 때문에 투표 조작은 불가능하다고 친구인 윤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했다.

검색 포털 네이버와 다음 뉴스 서비스에 신설된 ‘팩트 체크’ 항목에는 대통령 담화나 대통령실 발표가 나오면 진위 여부를 따지는 언론사 보도가 꼭 올라온다. 윤 정부 들어 등장한 현상이다. 국정 최고 책임자의 언사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시시비비를 가려서 들어야만 하는 나라는 정상일 수 없다. 대통령의 말이 곧이곧대로 믿기지 않는다면 그 사회는 언어도단 상태가 아니고 뭔가. 극단적 유튜버의 일방적 주장만 울려 퍼지는 대신 서로의 말은 믿지도, 듣지도 않는 나라 꼴이 참담하다.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든 데는 윤 대통령의 책임이 크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체포되기에 앞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육필 원고. 윤 대통령은 계엄의 정당성을 강조한 이 글의 상당 부분을 부정 선거 의혹론에 할애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체포되기에 앞서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육필 원고. 윤 대통령은 계엄의 정당성을 강조한 이 글의 상당 부분을 부정 선거 의혹론에 할애했다. 연합뉴스

■ 언어의 타락, 신뢰의 추락

윤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사실과 다른 발언을 쏟아냈다. 후보 토론회 때는 부인과 장모가 주식 투자로 손실을 봤다고 강변했지만 검찰 보고서에 모녀가 22억 원의 수익을 올린 사실이 적시돼 의혹이 눈덩이처럼 커졌다. “특검을 왜 거부합니까? 죄 졌으니까 거부하는 겁니다.” 대선 후보 시절의 공언은 김건희 여사의 의혹을 다루는 특검을 연거푸 거부하면서 식언이 됐다. 정치 브로커 명태균 씨에게 21대 총선 공천을 약속하는 통화 음성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대통령의 신뢰는 바닥에 떨어졌다. “취임 이후 명 씨와 접촉이 없었다”는 해명이 금세 거짓말로 드러나자 민심은 싸늘하게 돌아섰다.

12·3 계엄을 둘러싼 진실 공방에서 윤 대통령의 궤변은 허언증 수준으로 악화됐다. ‘경고하기 위한 계엄’이었고, ‘계엄은 대통령 고유 권한’이라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계엄에 간여한 군·경·국정원 간부들의 반대되는 진술로 모든 팩트가 무너졌다. 검찰이 제기한 공소 사실을 보면, 윤 대통령은 폭동 수준 규모의 무장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했고, ‘총을 쏴서라도’ 국회의원을 끌어내라고 군·경과 국정원에 지시한 사실이 확인된다. 법원은 불법적 내란에 가담한 주요 종사자들 모두에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공수처 수사에선 진술을 거부하고, 헌재 탄핵심판에서는 본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2차 답변서에서 포고령 1호를 김용현 전 국방장관이 과거 군사정권 시절 문안을 베꼈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전가한 대목은 궁색하다. 최근 상황인 ‘전공의 처단’ 문구가 포함된 것이 설명이 안 되고, 원안에 있던 야간 통행금지 조항을 대통령이 빼라고 지시해 수정됐다는 대통령 해명과도 배치된다.

윤 대통령은 본인에 대한 강제 수사망이 조여 오자 되레 육필 원고의 상당 부분을 할애해 부정 선거론을 재차 제기했다. 극소수 극단 지지세에 기대려는 시도다. 보수 언론인인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은 최근 언론에서 “부정 선거론은 하나의 종교”라면서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오지를 못한다고 개탄했다. 국정원 등 국가의 최고급 정보망의 꼭짓점에 있는 대통령이 유튜버 수준의 ‘카더라’ 정보에 휘둘리는 모습에 국민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그 결과 대통령의 언어는 분열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통합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신뢰마저 떨어뜨리게 된 것이다.


15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 과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도착해 조사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15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로 체포된 윤석열 대통령이 경기 과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도착해 조사실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 ‘말의 신뢰’ 없이 국정 수행 어려워

대통령 제도가 탄생한 미국에서 최고 지도자의 거짓말은 리더십에 치명상을 남긴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재선 실패가 실례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증세는 없다”면서 “내 말을 믿으세요”(Read my lips)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당선됐지만 2년 만에 공약을 깰 수밖에 없었다. 경제적 상황에 따른 선택이었지만 다음 선거에서 빌 클린턴 후보 측의 거짓말쟁이 프레임에 속수무책으로 공격당해 결국 낙선하고 만다.

전임자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여 당선된 클린턴 전 대통령도 결국 거짓말로 탄핵 위기까지 처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다. 백악관 인턴 여직원과의 성 추문에 대해 “성적 관계가 없었다”고 공개 부인했지만 거짓말로 드러나자 하원에서 탄핵안이 가결된 것이다. 여론은 성 추문 자체보다 대통령의 거짓말에 분노했다. 급기야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법정에 화상 출석해 성 관계를 인정하고, ‘부적절한 관계’를 뉘우치는 대국민 사과 연설 끝에 겨우 상원에서 탄핵을 면했다.

불법 도청 은폐 사실이 탄로 나면서 거짓말이 드러나자 사임한 리처드 닉스 전 대통령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국 대통령은 국민 앞에 거짓말을 했다가는 가차 없이 단죄된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국민 앞에 진솔하게 사과한 경우에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도 마찬가지. YS와 DJ 역시 허물이 있었지만 진정성이 있는 사과가 통했기에 국민의 용서를 받고 업적을 남길 수 있었다.

윤 대통령은 탄핵된 대통령을 수사한 검사로서 국민적 지지를 얻으면서 대통령 자리에 올랐지만, 임기 중 탄핵소추돼 수사를 받는 기구한 운명에 놓였다. 이로써 윤 대통령의 평가는 역사가 아닌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대통령 자신뿐만 아니라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이 불운을 자초한 책임은 말의 신뢰를 추락시킨 대통령 자신에게 있다.

내란 사태 이후 대한민국의 분열상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신뢰의 리더십 회복이 급선무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신뢰의 언어를 회복할 것인가이다.


김승일 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관련기사

라이브리 댓글

닥터 Q

부산일보가 선정한 건강상담사

부산성모안과병원

썸네일 더보기

톡한방

부산일보가 선정한 디지털 한방병원

태흥당한의원

썸네일 더보기

가장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