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 가리던 버스기사, 연가 노랫가락에 마음 열어 [세상에이런여행] ⑯

<오세아니아의 섬 ④ 쿡 제도>

남태평양 섬나라 중에서 오지 중 오지
가장 가까운 나라가 1500km 거리

비행기서 만난 뉴질랜드은행 간부 여성
심야에 차 태워준 여성 등 호의에 감동

시골버스 운전기사와 노래 하나로 소통
퇴직교사 도움 받아 뜻하지 않게 섬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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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암초와 환상적으로 넓게 펼쳐진 산호섬, 그리고 하얀 모래해변이 눈부신 섬나라 쿡 제도는 남태평양에서 오지 중의 오지다. 가장 가까운 이웃이 서쪽으로 1500km나 떨어진 미국령 사모아와 동쪽으로 역시 1500km 떨어진 타히티일 정도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으로도 알려져 가긴 힘들어도 한 번 가 본 사람은 다시 꼭 여행하고 싶어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시골버스를 타고 돌아본 쿡 제도 시골길. ⓒ도용복 오지여행가 시골버스를 타고 돌아본 쿡 제도 시골길. ⓒ도용복 오지여행가

■비행기 옆자리 여인 주디

뉴질랜드에서 출발한 쿡 제도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는데, 옆자리 여성이 눈길을 끈다.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는데 무슨 책인지 궁금하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그녀는 말을 걸 틈을 주지 않는다. 그때 핸드폰을 보니 얼마나 반가운지….

“오, 삼성!”

여성이 돌아보며 밝게 웃는다.

“예, 삼성이에요.”

그녀는 내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작은 전자제품 하나가 태평양 상공에서 처음 만난 이국 여인과의 서먹한 분위기를 일순간에 해소시켜 준다. 영문명함을 건넸다. 엘살바도르 명예영사라는 직함에 더 관심을 보인다.

“중앙아메리카에 있는 엘살바도르?”

숙소를 못 구해 공항 로비에 마냥 앉아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숙소를 못 구해 공항 로비에 마냥 앉아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여성이 자신을 소개한다. 이름은 주디. 뉴질랜드은행 간부여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는데, 연말이라서 오랜만에 고향 쿡 제도로 가는 중이란다. 공항에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도 했다. 공항에서 차로 30분 거리의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또 2시간을 가야 하는 섬에 살고 있다고 했다.

나의 호기심이 발동하며 구체적으로 섬의 이름과 가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하자 그녀가 주춤한다. 이방인에 대한 경계라고 할까.

“쿡 제도의 수도는 북쪽 아바루아예요. 항공기 기착지가 아바루아지만 도심까지는 꽤 거리가 됩니다. 도심에 호텔이나 호스텔이 모여 있지요. 공항에 도착하면 도심까지 태워드릴게요.”

감사하다고 하자 주디는 이내 와인을 음미하듯 마시며 읽던 책에 집중했다. 나는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그녀와 만난 내용을 적는다. 그녀가 신기한 듯 묻는다.

“메모장이네요? 무엇을 그렇게 빼곡하게 적은 건가요?”

나는 수첩을 펼쳐 보이며 대답했다.

“주디를 만난 소감을 적고 있습니다. 이번 여행지는 오세아니아의 14개국이에요. 나이가 78세여서 기억이 가끔 깜빡깜빡하기에 그때그때 메모해 둔답니다.”

오지 여행가이며 현재 180개국을 다녀왔다고 했더니 다시 나이를 묻는다.

“78세.”

놀라며 이번 여행이 마지막이냐고 또 묻는다.

“아니에요!”

이번에는 오세아니아를 여행하고 북극과 아이슬란드, 그리고 남극에 갈 예정이라고 하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보인다.


■경찰서에서의 하룻밤

쿡 제도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 입국수속을 밟는 데 1시간이나 걸렸다. 첫 방문자인 나는 까다로운 검문검색을 받아야 했다. 더구나 직원은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서인지 꼬치꼬치 묻는데 영어가 짧아 애를 먹었다.

무사히 입국심사를 마치고 시내까지 차를 태워 준다는 주디를 다시 만났다. 많은 인파와 차량 속에서 기다려 준 주디의 뒷모습을 보고 달려갔지만 그녀에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다.

내국인에겐 입국절차가 간소했기에 일찍 공항 밖으로 나왔을 터. 그런 그녀가 나를 기다려줬다는 것으로 너무나 고마웠다. 고향까지 가는 길이 많이 남은 그녀를 빨리 보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밤은 깊었고 숙소도 정해 놓지 않아 난감했지만 현지에서 맞닥뜨리는 곤경의 체험도 나중에 돌아보면 소중한 경험이 되고 추억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낙담하지 않았다.

공항 밖에서 리조트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도용복 오지여행가 공항 밖에서 리조트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도용복 오지여행가

일단 시내로 가야 한다. 그 사이 많던 사람은 하나 둘 사라지고 공항 로비는 나홀로 남겨진 듯 썰렁하다. 지나가는 남자의 명찰에 ‘△△리조트’가 눈에 띈다. 직원이 고객을 맞이하러 나왔으려니 생각하며 물었다.

“저렴한 숙소를 찾는데 알려줄 수 있겠어요?”

그는 흔쾌히 따라오라고 한다.

“가격은 가서 얘기하시죠.”

직원의 안내로 차에 오르자 이미 8명쯤 타고 있다. 짐으로 가득 채워진 15인승 미니버스에 몸을 구겨 넣듯이 밀어 넣고 30분을 넘게 달려 도착한 호텔은 1인실이 1박에 10만 원이란다. 새벽 두 시가 지났고 기껏 서너 시간을 자기 위해서라면 너무 비쌌다. 더 싼 숙소를 물었지만 고개를 젓는다. 이 호텔마저 곧 문을 닫을 것라며 “갈 데는 없어요” 하는 호텔직원에게 경찰서가 있는 곳을 알려 달라고 했다. 오던 길을 차로 10분 정도 돌아가야 한단다. 택시를 부르는 대신 쿡 제도의 새벽을 걷기로 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까만 밤을 더듬거리며 걸었다. 지나는 차 한 대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하다. 얼마쯤 걸었을까. 마침 차가 지나기에 서둘러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지나친 줄 알았는데 후진해 왔다. 달려가 보니 젊은 여성이 운전하는 차였다.

“호스텔을 찾고 있어요. 없으면 경찰서까지라도 태워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타세요.”

처음에는 경계하던 여성은 순순히 승차를 허락한다. 경찰서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한다. 친절한 여성의 이름은 리아나. 주디와 리아나 덕분에 쿡 제도의 첫 인상은 아주 좋았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경찰서에서 만난 경찰 역시 이곳저곳 숙소를 알아봐 준다. 경찰은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문을 연 숙소는 한 군데도 없다고 전한다. 인상 좋고 공손한 경찰을 보니 경찰서에서 자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불편할 텐데 괜찮겠어요?”

예상치 못한 쿡 제도 경찰서에서의 첫날밤. 긴 나무의자에 누워 있으려니 몸은 피곤하지만 잠이 올 리 없다. 남태평양의 오지 섬나라 경찰서에 몸을 누이는 상황에 처한 내 자신이 신기하기만 했다.

뒤척이다 잠깐 잠이 들었다. 주야 근무하는 경찰의 교대로 눈을 뜬 나는 단출한 물소가죽 가방만을 맨 채 경찰서에서 빠져나왔다. 새벽 6시. 버스정류장에서 눈곱이 낀 듯 빡빡한 눈이지만 가슴은 상큼하게 여명을 맞이했다.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작은 카페. ⓒ도용복 오지여행가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찾은 작은 카페. ⓒ도용복 오지여행가

■섬나라의 시골버스

정류장에 30분이나 앉아 있었지만 버스는 오지 않았다. 태평양의 섬나라는 바삐 사는 한국인의 시간과는 다를 것이다. 기다리는 것이 시간낭비 같아 걷기로 했다. 2차로의 좁은 도로. 인도와 차도 구분이 없는 길을 따라가니 좀 더 넓은 2차선 도로가 나왔다. 오른쪽으론 해안이, 왼쪽으론 건물이 늘어선 마을에 도착했다. 눈으로만 봐도 평화로운 도시다.

이른 아침인데 문을 연 카페가 보인다. 아침식사로 빵을 사서 미국화폐를 내놓자 뉴질랜드화폐만 사용한단다. 다행히 카페주인이 환전을 해 준다. 고맙다는 표시로 우유와 다른 먹을거리를 더 샀다. 인심 좋은 주인은 샌드위치 값만 받고 나머지는 서비스라고 한다. 거리에 서서 아침식사를 하며 바라보는 전경은 맑은 공기처럼 깨끗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사람이 한둘 모이기 시작하자 버스가 다가왔다. 가성비가 좋아 10회권 승차권을 구입하고 첫차에 무작정 올라탔다. 승차권에 구멍을 뚫어 1회 사용을 확인하는 것이 시간을 30∼40년 전으로 돌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외국에 나가면 나라마다 자연이 다 다르듯이 사는 모습도 다 다르다. 문명의 차이로 디지털시대에서 아날로그시대를 맛보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경험했던 일이다. 한국에서는 사라졌던 것을 만나면 과거의 나, 어릴 적이나 청년시절로 돌아가게 해준다. 그 기분은 말이나 글로는 표현할 수 없다. 이러니 직접 가서 그곳을 걸어보고 돌아보고 만나보고 대화해봐야 제맛의 여행을 즐길 수가 있다.

우리나라 시골버스처럼 이곳 버스기사는 승객을 다 아는 눈치다. 서로의 일상을 묻는 기사와 승객 간의 대화를 엿듣는 재미가 쏠쏠하다. 영어가 아닌 마오리어를 사용해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그들의 표정으로 대화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잘 지냈어? 요즘 어때?”

“응, 좋아, 괜찮아.”

고개를 세로로 끄덕이지만 가끔은 가로로 젓기도 한다. 사람 사는 모습은 한국이나 이곳 태평양의 섬나라나 다를 바가 없다. 생김새나 입은 옷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한결 같이 얼굴에 미소를 짓는다. 오고 가는 미소가 나를 이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들게 만든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시골버스 기사 자크. ⓒ도용복 오지여행가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시골버스 기사 자크. ⓒ도용복 오지여행가

이름이 자크라는 기사는 크리스마스가 지났는데도 산타복장을 하고 있다. 외국인인 나에게 낯을 가리는 건지 운전에 집중하려는 건지 반응이 없다. 나는 그의 뒤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침 창밖에 해안이 펼쳐져 있고 끝없는 바다는 시원하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이 노래는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포카레카레 아나(영원한 밤의 우정)’에서 유래됐다. 서로 다른 부족의 남녀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의 반대로 어려움을 겪지만 끝내 결혼해 행복하게 산다는 사랑의 노래다. 마오리어를 쓰는 모든 민족이 즐겨 부르는 우리나라의 ‘아리랑’ 같은 노래다.

예상한 대로 기사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싱긋 웃어 보인다. 나는 마주친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계속 노래를 불렀다. 그가 호기심을 보이며 어디서 왔느냐며 궁금해 한다. 방실방실 웃는 그에게 나도 벙긋벙긋 미소 짓는다. 역시 노래하듯 대답한다.

“도레미파솔라시도…레미, 내 이름은 레미, 도레미!”

이름이 멋지다며 운전대를 잡은 왼손을 들어 엄지 척을 해 보인다. 영국의 지배를 받은 영향으로 운전석은 오른쪽이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고 서먹해 하던 그가 어머니는 필리핀인이라고 알려 준다. 원래 오세아니아의 섬 주민 상당수는 오래전 대만과 필리핀을 거쳐 이곳으로 진출했다.

버스기사의 환대로 용기를 얻은 나는 타고 내리는 승객 모두에게 미소와 손짓으로 인사를 했다. 친구가 된 자크와 헤어지려니 아쉽다. 그도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의 운전시간을 일러주더니 또 만나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포옹한다. 나도 마음이 울컥한다. 두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퇴직 여교사의 뜻하지 않은 도움

섬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수도 아바루아의 도심으로 돌아왔다. 음악과 춤이 있는 곳을 찾았지만 다 스노클링이나 마사지, 관광 상품만 즐비한 간판만 보인다. 코로 킁킁, 귀로 쫑긋하면서 감각에 의존해보기로 한다. 따라가다 보니 이스라엘 국기가 꽂힌 파란색 승용차가 보인다. 이런 외딴곳에 이스라엘이라니.

양손에 짐을 들고 있지만 걸음이 반듯하고 표정도 밝은 중년여성이 주차장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내 직감은 ‘저 분’ 했다. 그녀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이름을 밝히고 이스라엘 깃발을 가리키며 이스라엘과 파푸아뉴기니에서 얻은 유대식 이름 데이빗으로 나를 소개했다.

여인은 이스라엘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는 손자 얘기를 꺼냈다. 자동차의 이스라엘 깃발도 손자가 꽂아둔 것이라고 했다. 여행객임을 알아차린 그녀가 섬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먼저 선심을 보인다.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40년간 교사로 살아왔다는 그녀는 정년을 맞은 마지막 학교에 같이 가보자고 했다. 나는 이런 우연한 기회를 얻는 재미로 혼자서 오지 여행을 즐긴다.

“쿡 제도의 학교는 어떨까? 궁금했는데 정말 잘 됐네요.”

퇴직 여교사의 도움을 받아 방문한 박물관. ⓒ도용복 오지여행가 퇴직 여교사의 도움을 받아 방문한 박물관. ⓒ도용복 오지여행가

여인이 앞장서 들어간 학교에는 작가의 집이라는 박물관이 있었다. 작품을 팔기도 하는 작은 상점 같은 곳이 학교 안에 있다. 입장료도 내야 한다고 해서 흔쾌히 뉴질랜드화폐로 8달러를 내고 들어섰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속에 들어간 느낌이 들었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동화책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이 들었다.

원시생활의 조상들이 전시된 방안을 기웃하고 들여다보는 창가의 덩굴이 더 인상적이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처럼 유적과 나무의 뿌리, 줄기가 한데 엉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어울린 세월의 흔적을 보여 준다.

여인은 언제 떠나느냐고 묻는다. ‘내일’이라고 대답하려니 정말 아쉽고 안타까웠다. 그녀도 그랬던 모양이다.

“하룻밤은 잘 수 있겠네요.”

딸과 손자가 오면 지내는 빈방이 있으니 괜찮으면 그 방에서 하루를 쉬고 떠나면 어떻겠냐고 묻는다. 좀 더 함께 있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 동무가 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럼요, 저는 영광이지요.”

여인의 집은 망고나무가 줄지어 맞이하는 길을 따라 안쪽에 예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망고차를 내놓는다.

내일 떠나야 하다니…. 일정을 정해 두고 다녀야 하는 여행이 때로는 더 큰 오지탐험을 가로막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앞에 기다리고 있다. 우연은 때로는 욕심을 줄이고 절제하는 겸허를 가르쳐주기도 한다. 아쉬움으로 남겨둔 여행은 그 여행을 영원으로 이끌었고, 안타까움으로 이어진 여행은 다음 여행에 더 충실하게 나를 또 인도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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