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시골에서 농사 짓는 한국인 소믈리에

■사부아 농부 하석환 씨
고교 때 영화 공부하러 프랑스 갔다가 와인에 빠져
보르도서 소믈리에 과정 마치고 한국 돌아와 활동
부산서 평생 반려 만나 잘나가는 소믈리에로 인정
“잃을 게 뭐 있나” 각오로 알프스 자락에 포도 농장
3만 3000평 포도밭 일궈 와인 생산자로 자리매김
‘도멘 아쉬’ 브랜드로 10개국에 수출하며 호평 얻어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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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직접 포도 농사를 지어 와인을 만드는 한국인이 있다. ‘사부아(Savoie) 농부’ 하석환 씨다. 하 씨는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에서 잘나가는 소믈리에였다. 농사를 지어 와인을 만들고 있지만 사람들이 여전히 소믈리에라고 부르는 게 거북해서 이처럼 자신을 농부로 소개한다. 그가 만든 브랜드 ‘도멘 아쉬(Domaine H)’는 이미 국내외 애호가 사이에서 주목받는 와인이 되었다.


하석환 씨는 소믈리에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농부로 변신했다. 하석환 씨는 소믈리에에서 포도 농사를 짓는 농부로 변신했다.

지난달 28일 부산 해운대에 있는 미슐랭 레스토랑 ‘율링’ 스페셜 디너에서 그를 만났다. 율링 측은 일찌감치 그의 와이너리에 다녀간 뒤, 사람들에게 도멘 아쉬 와인을 추천해 온 인연이 있는 곳이다. 이날은 2024년 빈티지 새 와인과 그의 와인 병 레이블에 작품을 올린 부산의 김무디 작가를 동시에 소개하는 자리였다.

알고 보니 부산과의 인연은 오래되고 깊었다. 부산에서 소믈리에로 활동하다 부산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프랑스 리옹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잘 살고 있었다. 지금도 처가는 부산에 있다. 프랑스에서 직접 포도 농사를 지어 와인을 만든 이와 이날 그 와인을 함께 마셨다. 마치 만화 ‘신의 물방울’처럼 눈앞에 드넓은 프랑스의 넓은 포도밭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하석환 씨가 포도밭을 가꾸고 있다. 하석환 씨가 포도밭을 가꾸고 있다.

“포도 수확 중에 비가 와서 철수하기도 했고, 비가 예보되었는데 날씨가 좋아서 속이 타기도 했다. 비를 한두 번 맞더니 포도 상태가 갑자기 나빠져서 멘탈이 털린 적도 있었다. 와인을 만들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했다. 실수도 많았지만, 다행히 좋은 포도로 잘 자라줘서 뿌듯하다.” “처음 만든 와인을 들고 해산물로 유명한 프랑스 미슐랭 투 스타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그곳 대표와 소믈리에가 나를 와인 생산자로서 진심을 다해 존중해 주는 게 느껴졌다. 그들에게 나는 이름 없는 지역에서 와인을 막 만들기 시작한 동양의 꼬마로 보였을 텐데…. 내가 소믈리에로 일할 때가 떠올라 부끄러워졌다.” 하 씨가 자신의 SNS에 일기처럼 올린 글에는 초보 농사꾼이자 신생 와인 생산자로서의 애환이 진하게 배어 있었다.


하석환 씨가 겨울을 맞아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하석환 씨가 겨울을 맞아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다.

사부아는 알프스 산맥 서부에 자리잡아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보르도, 부르고뉴, 샹파뉴 등 세계적인 와인 산지에 비하면 덜 알려졌지만 프랑스의 포도밭으로 유명하다. 에비앙 생수가 여기서 생산되니 물 맛 또한 짐작이 된다. 사부아(Savoie)를 영어식으로 읽으면 사보이, 한국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 있는 ‘사보이 호텔’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했다.

‘도멘 아쉬’ 와인을 만드는 하 씨의 포도밭 면적은 3만 3000평에 달한다. 국제 규격 축구장으로 따지면 15개에 달하는 결코 작지 않은 규모다. 하 씨는 평생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늘 정장 차림으로 고급 레스토랑에서 서빙만 하다가 대체 어쩌다 프랑스에서 농부가 된 것인지 그 사연이 궁금해졌다.

하 씨는 고교 시절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어린 나이에 다큐멘터리에 빠져, 영화 연출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막상 가 보니 프랑스에서는 가장 싼 술도 와인이었다.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와인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프랑스어를 생각보다 빨리 익혀, 영화 학교 입학 전에 보르도에 있는 일 년짜리 소믈리에 과정에 들어간 게 시작이었다.


포도 농장 식구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포도 농장 식구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현장 실습을 위해 와이너리에 갔다가 “당신은 소믈리에를 하지 말고, 그냥 우리 와이너리에서 일하면 어떻겠느냐”라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와인 관련해서 일할 생각이 전혀 없을 때였는데, 와인은 운명이었을까? 와인 공부는 소믈리에 일 년 과정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다음 해에는 부르고뉴에 가서 소믈리에 과정에 다시 등록하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자 운 좋게도(?) 와인의 길이 열렸고, 지금까지 와인 관련해서 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2012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일하며 만났던 윤화영 셰프가 부산에 메르씨엘 레스토랑을 열면서 같이 해보자고 제안한 덕분이었다. 20대 후반 젊은 나이에 2년 가까이 메르씨엘 소믈리에로 일하며 너무 좋은 경험을 했다. 무엇보다 부산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는 큰 소득을 거뒀다. 서울보다 더 좋았고, 언젠가 한국에 다시 들어가면 부산에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부산에서 전문적인 소믈리에보다 지배인 역할에 머물러야 하는 게 아쉽게 느껴졌다.


하석환 씨가 포도 농장에서 잠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석환 씨가 포도 농장에서 잠깐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시 프랑스에서 소믈리에 생활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있었던 곳은 한국인 이영훈 셰프가 운영하는 ‘르 파스탕’이었다. 아무것도 없이 조그맣게 시작해 프랑스에 있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으로는 처음으로 미슐랭 원 스타를 받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함께 누렸다. 대신 아이들을 비롯해 가족들이 힘들어 했다. 소믈리에 일의 특성상 맨날 집에 밤늦게 들어온 탓이었다. 소믈리에 일이 좋고, 잘했고, 나이 들어서도 계속하고 싶었지만, 가족을 생각하면 지금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2019년 10월 소믈리에를 그만뒀고, 그 이듬해에 코로나 사태가 터졌다.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부르고뉴에 있는 일 년짜리 와인 경영자 과정에 들어갔다. 실제로 와이너리를 하려는 사람들만 듣는 수업이었다. 와이너리는 농사만 지어서도 안 되고, 양조만 해서도 안 되었다. 와인병과 코르크 마개에 이르기까지 모든 걸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이었다.


알프스 산맥 서부의 사부아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알프스 산맥 서부의 사부아는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사람들은 소믈리에로 일하다가 왜 갑자기 농사를 짓고 와인을 만들게 되었는지 궁금해한다. 사실 와인 종주국 프랑스에서도 소믈리에 출신 생산자는 몇 명 되지 않는다. 와인을 만들어 보고 싶다는 꿈은 쉽게 꾸지만, 실제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 씨 역시 지금도 끊임없이 자신의 가능성에 대해 걱정과 고민을 한다. 다른 이들과 차이가 있다면 ‘내가 잃을 게 뭐가 있어’라는 말을 자주 되뇌는 것이다.

집이 있는 리옹에서 사부아까지 차로 1시간 거리라 바쁘지 않을 때는 출퇴근을 한다. 요즘처럼 포도나무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겨울철에는 와이너리에 매트리스를 깔아 두고 잔다. 수확 철에도 한두 달은 그렇게 지내니, 일 년에 절반은 와이너리에서 사는 셈이다. 포도 농사를 짓다 보니 기후 위기가 피부에 와닿는다. 프랑스의 각 지역에서는 그 기후에 어울리는 포도 품종을 생산해 왔지만 너무 더워지면서 맞지 않아졌다. 프랑스 포도 농가마다 새롭게 품종을 바꾸기 위한 실험이 한창 진행 중이다. 뒤늦게 농사를 시작한 그 역시 포도밭에 다른 종류의 나무와 식물을 함께 심어 균형 잡힌 생태계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포도로 먹고사는 사람이라면 자연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23년 첫 빈티지는 5개국에 수출했다. 2024년 두 번째 빈티지는 프랑스, 한국. 스페인, 중국 등 10개국에 나가고 있다. 중국에서는 도멘 아쉬(Domaine H)라는 이름과 레이블을 보고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를 연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나 살 수 없는 명품보다 편하게 즐기면서 더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율링’ 스페셜 디너에서 하석환 씨가 ‘도멘 아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율링 제공 ‘율링’ 스페셜 디너에서 하석환 씨가 ‘도멘 아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율링 제공

얼마전에는 태국 방콕에 처음 갔다가 부산이 많이 생각났다고 했다. 방콕에는 전 세계에서 좋다는 호텔은 다 들어와 있었고, 손님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방콕이 그 정도로 외국인이 몰려들만한 곳일까? 방콕과 비교해 보니 부산은 훨씬 더 매력적이지만 안타깝게도 손님을 맞이할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방콕은 어딜 가도 예약 사이트가 영어로 잘 만들어져 있고, 매장에도 영어 하는 직원이 있다. 방콕의 타깃은 태국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 다이닝하는 친구들은 부산 경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다. 이제는 눈을 돌려 K컬처 바람을 타고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인에게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음식도 맛있어야 하지만 외국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얼마나 편하게 보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부산에 있는 레스토랑들은 아직 외국인에게 많이 친절한 것 같지 않다.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인이 부산에 오면 돼지국밥에 소주도 먹어 보고 싶지만, 하루쯤은 와인이 궁금해지기 마련이다. 매력적인 도시 부산이 그런 쪽에 더 신경 쓴다면 시장이 훨씬 좋아지지 않을까.

와인의 매력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와인을 다 마셔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매년 새로운 가치를 들고 와인을 만드는 새로운 사람이 등장한다. 앞으로 새로운 땅에 포도밭을 일궈 와인을 만드는 한국인이 더 많이 나올 것이다. 그들을 위하여, 상떼!


율링에서 하석환 씨가 김성주 헤드세프(왼쪽), 김무디 작가와 함께했다. 율링 제공 율링에서 하석환 씨가 김성주 헤드세프(왼쪽), 김무디 작가와 함께했다. 율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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