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포국수, 면면히 이어져 온 음식이자 미래의 유산

전국 체인점 많아졌지만 정작 구포엔 한 곳뿐
비 온 뒤 습기 차 있을 때 말리면 최고 국수 뽑혀
밀폐 저장실 대신 재래식 숙성해야 식감 더 좋아져
부산 정체성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보존해 가야

박종호 기자 nlead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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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국수’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구포국수는 우리나라에서 지명 자체로 유명 브랜드가 된 최초의 사례다. 구포국수는 국수 공장들이 대부분 구포시장 인근에 있었고, 시장 안에 국숫집들이 많아 ‘시장국수’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구포국수는 현재 체인점으로 서울 등 전국에서 찾아보기 쉬워졌지만 정작 고향에서는 위기에 처했다. 구포시장에 가면 국수 공장은 물론이고, 구포국수를 파는 음식점조차 만나기가 쉽지 않아졌다. 부산근현대역사관이 최근 발간한 학술총서 <구포와 밀의 만남, 구포국수>는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느껴진다. 이 책에 수록된 국수 공장 대표, 노동자, 요리사, 평론가 등이 밝히는 구포국수의 숨은 이야기를 옮긴다. 예로부터 국수는 장수를 상징했다. 구포국수가 국수 면처럼 길게 이어지길 바라는 같은 마음이다.


구포연합국수 곽조길 대표는 그의 아들까지 4대째 구포국수의 명맥을 잇고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구포연합국수 곽조길 대표는 그의 아들까지 4대째 구포국수의 명맥을 잇고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구포에는 국수 공장 하나만 남아

1960~80년대 30여 개나 되었던 구포의 국수 공장이 지금은 단 한 곳만 남았다. 곽조길 대표가 운영하는 ‘구포연합국수’가 유일하다. 곽 씨의 외조모 때부터 시작한 국수 업은 그의 아들 세대까지 4대째 이어지고 있다. 외할머니의 세 딸은 곽 씨의 어머니를 비롯해 모두 국수 공장을 했다니 참으로 끈질긴 국수의 인연이다.

곽 씨는 “외할머니의 여동생 부부가 제분공장을 운영했는데 그 시절에는 배를 타고 밀양, 청도, 삼랑진에서 밀을 수매해 제분했다”라는 이야기를 전했다. 여기서 한국전쟁으로 인해 구호물자인 밀가루가 보급되기 전에는 국산 밀가루로 국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밀로 만든 구포국수 맛이 궁금해진다. 1988년에 시작된 구포국수 상표권 분쟁도 곽 씨의 작은이모부가 거북표 상표권을 특허청에 등록하면서 생긴 것이었다. 오랜 소송이 끝난 몇 년 후 고 씨는 세상을 떠났고, 거북표 상표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곽 씨는 “국수의 품질은 반죽이 좌우하는데 부드러운 밀가루를 쓸수록 밀 냄새가 덜 난다”라고 털어놓았다. 밀가루에 포함된 밀 껍질의 함양인 회분이 적을수록 식감이 부드럽다. 국수는 그날 날씨에 따라서 반죽을 어떻게 치고 어떻게 건조해야 하는지가 다르다. 그는 “다른 식품은 다 급속으로 말리지만 국수는 그렇게 말리면 다 부서진다. 적어도 24시간은 건조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수를 만들기에 이상적인 환경이 있다. 비가 오고 나서 바닥이나 바깥에 습이 차 있을 때 그 바람에 국수를 말리면 최적의 국수가 된다. 습기로 인해서 국수가 자기 몸의 수분을 은근하게, 서서히 빼면서 말려가는 과정에서 국수가 야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면 식당에서 “국수가 잘 안 삶아진다”라며 말이 많다니, 국수 참 쉽지 않다.


58년 개띠인 정무수 씨는 열아홉 살에 국수 공장에 발을 들여 국수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58년 개띠인 정무수 씨는 열아홉 살에 국수 공장에 발을 들여 국수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날씨 맞추는 국수 공장 노동자

58년 개띠로 김해 대동 출신인 정무수 씨는 열아홉 살에 국수 공장에 발을 들여 국수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오랜 국수 공장 노동자 경험을 살려 지금은 경남 창녕에서 ‘숭어표 국수’를 운영하고 있다. 정 씨가 들어갈 당시에는 국수 공장이 신발이나 섬유 공장보다 업무 환경이 좋지는 못했지만, 숙식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좋은 일자리였다. 일이 힘든 만큼 급여가 높아 타지에서 온 사람도 많았다. 국수 공장은 보통 가족 단위로 운영되었지만 한 공장에 종업원이 한두 사람은 있었다. 숙식 환경이 좋지는 않아서 주로 공장 다락에 있는 숙소에서 생활했다.

국수 공장 노동자들은 직업 특성상 별도로 배우지 않고도 하늘을 보고 일기를 잘 맞췄다. 습기가 있는 바람이 불면 비가 올 확률이 높아 생산을 중단하거나 국수를 실내에 들여놓아야 했다. 날씨가 건조한 봄에는 국수가 휘거나 잘 부러지기 때문에 암실에서 조정했다. 암실 주변으로 비닐을 감아놓고 외부 공기를 차단하면 휘어진 국수가 다시 펴졌다.

구포국수 관계자들은 공통적으로 구포국수의 특징은 습기를 머금은 낙동강의 바람에서 나왔다고 말한다. 정 씨는 “부산 시내 실내에서 하는 공장에서는 샛바람이 불면 ‘똥가리’가 많이 나는데, 구포는 낙동강에서 샛바람이 불어도 습도가 몰려오니까 그런 경우가 드물다. 바닷가도 괜찮다. 바닷바람이 불면 국수가 훨씬 빨리 마른다”라고 말했다. 지금은 대개 실내에서 국수를 말리고, 밀폐된 저장실에서 숙성시켜 완제품이 8시간 만에 나온다. 재래식으로 숙성 시간을 거쳐서 완제품까지 24시간이 걸리면 식감이 좋아진다.


구포촌국수 김향이 대표는 김해 대동면 안막마을 장터에서 국숫집을 하던 할머니 가게를 이어받았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구포촌국수 김향이 대표는 김해 대동면 안막마을 장터에서 국숫집을 하던 할머니 가게를 이어받았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구포국수, 나의 운명이었네

수많은 국숫집 가운데 단 두 곳이 구포국수와 관련해서 소개됐다. 부산 금정구 남산동의 ‘구포촌국수’와 구포시장의 ‘이원화 구포국시’가 그 주인공이다. 구포촌국수는 김해 대동면 안막마을 장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노영자 씨가 1969년 간판도 없이 장터에서 국숫집을 열었다. 농민들이 새참으로 즐겨 먹었기에 면이 붇지 않도록 두꺼운 중면을 썼고, 육수를 따로 주전자에 담아 옮겼다. 이 방식은 일반 잔치국수와 다른 대동 안막마을 국수의 상징이 되었다. 영양사로 일하던 손녀 김향이 씨가 2000년에 가게를 물려받으며 부산 금정구 남산동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다.

구포촌국수는 국수 단 한 가지만 고집한다. “다른 메뉴 하지 말아라. 하나만 해라. 이걸 더 잘해라”라는 노 씨의 철학에 따른 것이다. 육수에 쓰는 멸치는 4종류 이상 들어간다. 큰 멸치, 중 멸치, 작은 멸치를 섞어야 조화로운 맛이 난다. 3일 정도 물기를 빼는 전처리 과정도 필수다. 그래야 육수가 텁텁하지 않고 깔끔해진다. 육수 한 주전자가 나오기 위해 12시간을 끓인다.

단골이 개발한 구포국수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 국수는 삶은 다음에 찬물에 씻기에 면이 차갑다. 여기다 뜨거운 육수를 부으면 국물이 미지근해진다. 면 온도가 상온까지 올라오게 육수를 조금씩 부어 달래주는 게 좋다. 처음에 양념장에 비벼서 서너 젓가락 먹고 그다음에 육수를 부으면 진정한 온국수가 된다. 일단 육수부터 한 컵 따라 마시는 건 기본이다.


‘이원화 구포국시’ 이원화 대표는 수십 년간 다른 일을 하다 운명처럼 다시 국수 가게로 돌아왔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이원화 구포국시’ 이원화 대표는 수십 년간 다른 일을 하다 운명처럼 다시 국수 가게로 돌아왔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이원화 구포국시’ 이원화 대표의 외할아버지는 구포국수를 만든 1세대다. 이 씨는 외가로부터 독립해 국수 공장을 운영하는 부모 밑에서 다섯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국수 공장의 자잘한 일을 도왔고 커서는 제면 공정을 맡기도 했다. 이 씨 가족은 국수 공장 일이 너무 힘들어 1980년에 공장을 닫았다. 이 씨도 수십 년간 다른 일을 하다, 운명처럼 다시 국수 가게로 돌아온 것이다.

다른 공장들은 밀가루로 반죽을 해서 면을 뽑아내고 건조해 국수 완제품으로 나오는 데 하루밖에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 씨의 아버지는 무조건 3일을 들였다. 반죽의 횟수를 늘리고 숙성 기간을 충분히 가질 때 면발이 더 쫄깃해진다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이 씨의 어머니는 국수 포장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손가락 지문이 다 닳았단다. 이 씨는 자신의 국수 레시피를 주고 2006년부터 이원화 구포국시를 공급받고 있다. 완제품까지 3일의 원칙은 무조건 고수한다. 가게에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고, 국수 대신 ‘국시’를 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 씨는 “5000원짜리 국수를 팔지만 5만 원짜리 상품을 제공한다는 마음으로 한다. 손님이 현금을 주시면 거스름돈은 신권으로 나간다. 좋은 재료로 좋은 음식을 대접하자는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2022년 부산의 미래 유산으로 선정된 구포국수가 길게 이어지길 소망한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2022년 부산의 미래 유산으로 선정된 구포국수가 길게 이어지길 소망한다. 부산근현대역사관 제공

■국수 면발처럼 길게 이어지길

최원준 음식 칼럼니스트는 ‘부산 국수 문화사’라는 칼럼을 통해 구포국수와 관련된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대표적인 것이 ‘삯국수 문화’다. 광복 후 부산의 국수 공장들은 서민들이 배급받은 밀가루를 가져가면 공장에서 삯만 받고 국수를 뽑아줬다. 국수가 서민들의 허기를 달래주던 소박한 음식이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는 사례다. 또한 1960~70년대 경부선 기차 안이 구포국수를 받아 김해, 밀양, 청도, 창녕 등 영남 전역으로 팔러 나가는 ‘구포국수 아지매’들로 가득했다는 이야기도 전했다. 구포국수 아지매는 ‘재첩국 아지매’, 기장에서 동해남부선 열차를 타고 먹장어를 팔러 다녔던 ‘꼼장어 아지매’와 더불어 부산의 3대 아지매로 명성을 떨쳤다.

부산근현대역사관 김기용 관장은 “구포국수는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근현대 부산 생활사의 중요한 단면이자 지역 정체성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다. 구포국수는 과거의 추억이자 오늘의 음식이며, 앞으로도 이어질 문화다. 이번 총서가 시민들이 구포국수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구포국수는 2022년 부산의 미래 유산으로 선정됐다. 구포국수가 길게 이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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