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현대사 관통한 '전쟁 같은 삶' 살아
■ 질곡으로 점철된 권씨의 삶
1968년 한국인을 멸시한 일본인 야쿠자 2명을 살해한 후 인질극을 벌이던 당시26일 향년 82세로 숨진 권희로 씨의 삶은 한 개인이 감내하기 어려울 만큼 모질었다.
민족차별에 대한 저항으로 무려 31년8개월 장기복역했던 신산의 삶은 고국으로 영주귀국한 뒤에도 사기와 치정 등 형사사건으로 얼룩지면서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재일교포 2세로 태어나
차별저항 인질극 펼쳐
영주귀국 후 부산 거주
치정 등 형사사건 얼룩
"일본 어머니 묘 참배"
소원 못 이루고 영면
그의 형극의 삶은 1928년 일본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에서 재일교포 2세 즉, '조센진'으로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4세 때 사고로 아버지를 여의었고 모친의 재가로 김 씨 성을 얻은 그의 유년 시절은 순탄치 못했다. 소학교에서 퇴학당한 뒤 절도 등의 형사사건에 곧잘 연루됐다. 인생의 결정적 전환점은 41세 되던 해인 1968년 찾아온다. 야쿠자들이 '조센진,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하는데 격분해 이들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직후 인근의 온천여관에서 투숙객 13명을 붙잡고 88시간 동안 인질극을 벌였다.
당시 민족차별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그의 인질극에 일본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살인 및 감금죄로 기소된 그는 8년간의 법정공방 끝에 무기징역을 살게 된다.
재일교포 2세 '김희로'가 벌인 이 인질극은 한국에서 '김의 전쟁'이라는 영화로 제작되어 그를 민족차별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부각시켰다. 그에 대한 동정여론도 확산되면서 각계에서 귀국운동이 시작됐고 특히 부산 자비사의 삼중스님은 후견인 자격으로 일본 법무성을 통해 은밀히 석방교섭을 추진해 결국 1999년 9월 '일본에 재입국하지 않는다'는 조건부로 가석방을 이끌어내기에 이른다.
부산 영도구에 호적을 둔 생부의 성을 되찾아 '권희로'가 된 그는 부산으로의 영주귀국을 앞두고 밝힌 귀국인사문에서 "나의 전쟁은 내가 아니라도 누군가에 의해 반드시 일어났을 사건이었다"고 의연히 밝혔다.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사건의 주인공 권 씨의 귀국에 한국 여론은 그를 '영웅'으로 환호했다. 방송사들은 특집방송을 편성했고 귀국 기자회견은 내외신 기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반면 일본 언론들은 애써 거리를 두고 이 사건을 보도했다.
부산 정착 이후 그의 삶은 또 다시 시련을 맞게 된다.
귀국한 뒤 두 달 만에 일본에서 태풍 피해가 발생하자 일본 신문사에 의연금을 기탁하는 등 여유롭게 고국에서의 제2의 삶을 시작하는 듯 보였던 그는 이듬해인 2000년 후원자의 남편을 살해하려한 혐의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치료감호소에 보내져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 사건이 일본에 크게 보도되면서 일본에선 '거 봐라'는 식의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어 2001년 9월에는 그의 부인이 권 씨 소유의 6천만원 상당의 현금과 예금을 빼돌려 달아나는 바람에 경찰에 체포되는 등 잦은 형사사건에 휘둘리기도 했다.
이후 권 씨는 간간히 일본 언론들의 취재에 응하기는 했지만 대외적인 접촉은 자제해 왔다. 지병인 전립선암이 악화되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이달 초 일본 언론에 "죽기 전에 어머니의 묘에 절을 올리고 싶다"며 일본 입국을 희망했다. 이에대해 일본언론들은 재입국 포기롤 조건으로 가석방했던 법무성이 입국을 허가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으로 어머니의 묘를 참배하려던 권 씨. 일본 당국에 보낼 방일 탄원서를 준비하던 그의 사모곡은 끝내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조센진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생을 마감한 권 씨, 그는 이제 그 모진 삶과의 전쟁을 끝냈다.
김승일 기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