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농부시인 '나의 삶 나의 시' 서정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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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詩가 되었고 농촌은 삶이 되었다

농부가 된 시인의 웃음이 해맑다. 삼태기에는 씨감자가 담겨 있다. 괭이로 일군 산밭 이랑에 심을 작정이다. 석달 뒤 감자가 열리면 또 행복하다. 김병집 기자 bjk@

서정홍 농부시인 「나의 삶 나의 시」


산 좋고 물 좋은 경남 합천에 가지 마시라. 합천에 가더라도 행여 나무실 마을에 가지 마시라.

설령 나무실 마을 어귀에 서서 우람한 바위산 모산재가 보이면 보고 말 것이지

농부시인 서정홍 집에는 들어가지 마시라. 눈빛 선하고, 수염 덥수룩한 얼굴을 한

농부시인 서정홍을 만나더라도 시골살이가 어떠네 저떠네 물어보지 마시라.

정 궁금해서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면, 시인의 말을 가슴에 담지 마시라.

도시에서 찌든 당신의 삶이 농촌으로 향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참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날마다 논밭에서 일하는/아버지, 어머니 손.//무슨 물건이든/쓰면 쓸수록/닳고 작아지는 법인데/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나무로 만든/숟가락과 젓가락도 닳고/괭이와 호미도 닳는데/일하는 손은 왜 닳지 않을까요?//나무보다 쇠보다 강한/아버지, 어머니의 손.

'닳지 않는 손'(전문)

중학교 국어책에 농부시인 서정홍(53)의 시가 있다. 아이들은 시인의 시를 배우고 선생님들은 농부시인의 시를 가르친다. 시인은 시의 주인공들처럼 날마다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일을 한다. 귀농 7년차. 시인은 자연과 점점 닮아가고 있다. 그동안 노동자로, 시인으로, 생태활동가로 바쁘게 살아온 삶이었다.

우리밀살리기운동을 했고, 경남생태귀농학교를 처음 열었다. 그리고 흐르는 물처럼 부드럽게 시골생활을 시작했다. 2005년 합천 나무실 마을로 왔다. 여기에서 뼈를 묻을 참이다.

나무실 마을에 봄이 왔다. 감자를 심는 날이다. 시인은 아궁이에서 재를 끄집어냈다. 싹이 막 나기 시작한 씨감자를 심기 위해서는 재가 필수란다.

"통감자를 자른 부위에 이렇게 재를 바르면 소독이 됩니다. 상처가 빨리 아물죠" 시인은 쪼갠 감자를 잿가루에 쓱쓱 버무린 뒤 두둑에 심었다.

"너무 깊게 심으면 싹이 올라오기 힘들고, 너무 얕으면 냉해를 입기 쉬워요." 초보들의 서툰 몸짓이 아무래도 불안한지 "감자야 잘 자라라! 잘 자라라! 하면서 심어야 해요. 그래야 봄 가뭄과 비바람에도 잘 버텨내지 않겠어요"라고 했다.

농부시인 서정홍. 시인이 우선 되었으나 애초부터 시인의 몸속엔 농부의 마음이 있었는지 모른다.

찢어지게 가난했다
중학교 때 공장으로 출근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한 어머니
영양실조로 돌아가셨다



마을 어르신들/너는 좋은 날 태어났으니/잘 살 거라고 출세할 거라고 했다//말이 씨가 되어/나는 지금 '출세'하여/살고 있다//이 세상 황금을 다 준다 해도/맞바꿀 수 없는/노동자가 되어/땀 흘리며 살고 있다// '58 개띠'(부분)

시인은 1958년 개띠 해 5월 5일 마산(지금은 창원) 월영동에서 태어났다. 아들 셋, 딸 셋 가운데 다섯째로 태어났다.

시인의 아버지는 일본에서 목수로 일하다가 다리를 크게 다쳤다. 그래서 다리를 절어 동네 조무래기들이 "절름발이"라고 놀렸다. 그럴 때면 화가 치밀어 나쁜 놈들에게 똥물 한바가지 끼얹고 싶었다. 노동력을 잃은 아버지가 술로 세월을 보내는 바람에 어머니가 집안 살림을 책임졌다.

어머니는 목장이나 막노동판에서 하루종일 일을 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밥 먹을 힘조차 없다며 그냥 주무시는 날이 많았다. 하루종일 힘든 노동에 어찌 배가 고프지 않았을까?

초가집 마당 한쪽에 작은 텃밭이 있어 조선상추를 길렀다. 그 상추 하나면 밥이 꿀떡 넘어갔다. 마당 빈자리마다 꽃밭도 있었다. 채송화는 천 송이나 피었다. 꽃송이를 세다가 학교에 지각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당엔 50년 된 큰 석류나무가 있어 이웃의 부러움을 샀다. 석류를 판 돈으로 형제들이 한 해 쓸 공책과 연필을 샀으니, 석류나무는 황금보다 귀한 나무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집살이/떨쳐 버리고 싶다고 보내온/큰 누님의 편지 한 장// '편지 한 장'(부분)

동무들이 모두 멋진 교복을 입고 중학교에 갈 때 시인은 공장으로 출근했다. 동무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먼 길을 빙 돌아 출근을 했다. 식구들은 중학교에 보내준다고 우겼지만, 가지 않겠다고 했다. 먹고살 양식도 없는데 무슨 공부냐며 고집을 부렸다. 형도 있고 누나들도 있었지만, 모두 굶지 않기 위해 일찍 시집을 가거나 객지로 나갔다.

아버지가 사람이 공부만 해서도 안 되지만, 일만 해서도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뒤늦게 야간 학교에 들어갔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오면 열한 시가 넘었다. 잠은 늘 모자랐고, 배는 한없이 고팠다. 열네 살 이후 어느 누구에게도 학비나 용돈을 달라고 손 내밀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는 시인이 열일곱 살이던 어느날, 아무도 없는 방에서 돌아가셨다. 어머니마저 3년 뒤 오랜 병환으로 돌아가셨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는 바람에 병명이 영양실조였다. 시인이 스무 살이던 어느 겨울, 연탄불이 꺼진 방에서 어머니는 쓸쓸히 돌아가신 것이다.

시집살이가 힘들다며 누나가 보낸 편지 한 장을 장롱 밑에 두고 꺼내 읽으며 "이 년아, 시집살이 힘들면 똥도 못 눠. 똥 잘 누는 년이 뭐가 고되다고 야단이냐"며 밤새 울던 어머니였다.

"17평 작은 흙집입니다. '내 집'이 아니라 모두의 집입니다. 놀러오세요." 서정홍 시인이 또 웃었다.

자고 일어나/달리기를 하면 삐일까 봐/조깅을 한다/땀이 나/찬물로 씻으면 피부병 걸릴까 봐/냉수로 샤워만 한다

'우리말 사랑1'(중등 교과서 수록 작품·부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술로 세월을 보내던 시인은 성당에 다니게 된다. 옆집에 사는 형이 "이 녀석, 이대로 두다간 사람 버리겠다"며 성당에 데려가 영세를 받게 했다.

그곳에서 사람들을 만났다.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역사와 문화를 동료들과 공부하고 토론도 했다. 근로기준법과 산업재해보상법을 공부했다. 그때부터 시인은 누가 시키는 대로 삶을 살지 않고,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가난한 이웃들과 살기로 다짐했다.

그러곤 '가난 때문에 병들거나 죽지 않는다면 가난만큼 큰 스승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을 깊이 일깨워 준 분이 이오덕 선생이시다.

이오덕 선생은 "가난은 책으로 배울 수 없다. 가난하게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아무리 책으로 읽어도 스스로 굶어보지 않고는 굶주린 사람의 마음을 몸으로 알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한글만 아는 사람은 누구든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말했다. 이 귀한 말씀 하나하나가 시인이 글을 쓰는 기준이 되었다.

몸으로 체득한 가난은 시가 되었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노동자로 단련되었다. 그 경험은 오롯이 시로 여물었다.



그대/처음 만나던 날//내세울 것 하나 없는/빈털터리 가슴으로/그대 앞에 앉아 있으니/나보다/그대 가슴이/더 아파 보였습니다 '맞선보는 날'(부분)

스물넷 나이에 아내 한경옥(51) 씨를 만났다. 마산 석전동 왕자다방에서 맞선을 봤다. 방황하던 동생이 안타까웠든지 누나들이 자꾸 맞선 보라기에 어쩔 수 없이 운동화에 청바지 입고 나갔다. 고운 맘씨에 반해 1년 남짓 사귀다가 혼인을 했다. 동무들이 부곡온천에 신혼여행 다녀오라고 택시를 잡아 주었는데, 택시비가 없어 신혼여행을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할 만큼 가진 것 없이 혼인을 했다.

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공단지역을 떠나 진주로 이사를 갔다. 진주 상평성당에서 성당지기를 하면서 '우리말·우리글 살리기 모임'을 만들고 '가톨릭노동상담소'를 만들었다.

1992년 어느 날 시인은 한 줄의 신문 기사를 보게 된다. 아이들이 즐겨먹는 밀로 만든 모든 음식을 100% 수입 밀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우리 목숨을 지켜주는 음식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6년 넘게 하던 성당지기 생활을 정리하고 1996년 마산가톨릭 문화원에 있던 한 신부를 만나 가톨릭농민회 총무를 맡게 되면서 우리밀살리기운동 경남·부산지역본부 업무도 하게 되었다. 온 식구들이 창원으로 이사를 하고 꿈에도 그리던 농민운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전국귀농운동본부의 도움을 받아 '경남생태귀농학교'를 시작했다. 1999년 첫 졸업생이 나왔다. 그 가운데 시인도 70여 명의 동기들과 함께 졸업을 했다. 그리고 그해 당장 하던 일을 후배에게 맡기고, 경남 함양 덕유산 자락 작은 산골 마을로 청년 몇 명과 함께 귀농을 했다. 아내는 일단 도시에 남았다. 부부도 각자 자기 삶의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서로 공유하고 있어서다.

모두들 늦깎이 농부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새벽엔 마음을 비우고, 낮엔 일을 하고, 밤엔 시를 썼다. 일하지 않은 날은 먹지도 않았고, 시를 쓰지도 않았다. 그래야 '사람의 길'을 걸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사이 아이들은 부쩍 자랐다.



아들아/너를 보면 내 가난이 쓰라리다/혼자였을 때는 모든 것이/혼자였는데…/너를 만나고 내 삶은/네 삶이 되었다 '아들에게1'(부분)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둘을 뒀다. 영교(29)와 인교(28)다. 대안학교인 산청간디학교를 나온 영교는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붕어빵 장사를 시작했다. 그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든 우리밀과 국산 팥으로 만든 붕어빵이었다. 원가가 비싸 한 개 팔면 한 개가 적자가 났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붕어빵을 팔았다. 어느날 이 모습을 본 신문기자가 대문짝 만하게 우리밀 붕어빵 이야기를 신문에 실어줬다. 대박이 터졌다. 그러나 그 추운 날씨에 하루종일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판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큰아들 영교는 지금 필리핀 피스스쿨(평화학교)에서 자원 봉사를 한다. 작은아들 인교는 대구에서 헌옷 장사를 4년째 한다. 뜻이 맞는 동무랑 둘이서 어렵게 시작했는데 지금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무 26명이 함께 일한다.

시인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공부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일반 학교에 다닐 때 아이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 문고리만 잡으면 편안하다"고 했다. 무슨 일이든 아이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했겠는가.

시인의 자녀 교육에 관한 철학은 확고했다. "공부는 하면 할수록 사람 위에 앉아 사람을 부리는 짓을 하기 쉽다. 그 짓은 대부분 사람과 자연을 괴롭힌다. 그래서 공부를 적게 해야 가난한 사람들과 땀 흘려 일하며 정직하게 살 수 있다. 공부만 하면 사람이 안 되고 '공부벌레'가 된다. 스스로 가난하게 살 각오를 해야 '진짜 사람'이 될 수 있다."
생태뒷간, 군불 때는 아궁이, 농부의 밥상, 그리고 품앗이 하러 온 이웃 농사꾼.


"아버지, 농촌에는 왜/할머니와 할아버지밖에 살지 않을까요?/할머니와 할아버지 돌아가시면/누가 농사지을까요?/우린 무얼 먹고 살지요?"

'고구마캐기 행사에 다녀와서'(부분)

"곧 감나무에 싹이 돋습니다. 연둣빛 새순은 꽃보다 더 아름답지요. 이번 꽃샘추위가 물러나면 장독 옆에 그리고 마당가에 온갖 꽃들이 잔치마당을 열 것입니다. 그때 놀러오세요. 하루하루 사는 게 공부고 여행이라지요, 그러니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시면 됩니다."

시인은 집안 곳곳을 안내했다. 가장 야심차게 보여준 곳이 생태 뒷간. 뒷간에서 희한하게도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았다. 똥을 누면 그 위에 쌀겨와 잿가루를 섞어놓은 것을 한두 바가지 살짝 뿌린다. 오줌과 똥은 분리되도록 만들어 장마철에도 냄새가 나지 않는단다. 시인은 똥오줌을 돈과 황금보다 귀하게 여긴다. 똥오줌이 몇 달 뒤엔 거름이 되어 밭으로 가고, 그 밭에서 난 곡식과 과일과 푸성귀는 다시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다. 완벽한 순환이다. 불은 땐 아궁이에서 받은 목초액은 물과 섞어 농약 대용으로 쓰니 무엇 하나 버릴 게 없다.

귀농 13년
흙이 좋아 흙에 사는 시인
몸과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아이들은 푸르게 잘 자랐다


가끔 도시 사람들이 방문하려고 전화가 오면, 한 사나흘 전부터 불량식품을 먹지 말고 오라고 한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똥만큼 정직한 게 없다고 한다.

2005년 허물어진 빈집을 사서 17평짜리 작은 흙집을 벗들과 이웃의 도움으로 지었다. 많은 이들의 정성과 손길이 닿은 집이라 내 집 이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다. 귀농한 이웃들과 열매지기 공동체를 만들고, 산골 아이들과 함께 배우고 깨닫기 위해 강아지똥학교를 만들어 기쁜 마음으로 산다.

서정홍 농부시인은 합천 황매산 기슭에서 비로소 시인이라는 감투를 훌훌 벗어버리고 생명을 기르는 진짜 농부가 되려고 오늘도 산밭으로 간다. 참, 도시 사람들에게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쓴 산문집 '농부시인의 행복론'과 '부끄럽지 않은 밥상'이 얼마 전에 나왔다.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은 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시인은 물었다. "도시는 오늘도 안녕하시나요? 모두들 자유롭고 행복하시나요?"

 
1958년 5월 5일 경남 마산 월영동 출생

1971년 공장 취업. 야학

1990년 제1회 마창노련 문학상

1992년 제4회 전태일문학상

1994년 뜻 있는 분들과 진주 우리말 우리글 살리는 모임과·진주 가톨릭 노동상담소 설립

1995년 첫 동시집<윗몸 일으키기>(현암사),

첫 시집<58년 개띠>(보리) 출간

1996년 자녀교육 이야기<아무리 바빠도 아버지 노릇은 해야지요>(보리) 출간

1996년 생명공동체운동(우리밀살리기운동, 우리농촌살리기운동) 시작

1999년 경남생태귀농학교 설립. 경남 함양 덕유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로 귀농. 두 번째 시집<아내에게 미안하다>(실천문학사) 출간

2003년 두 번째 동시집<우리 집 밥상>(창비) 출간

2005년 경남 합천 황매산 기슭 작은 산골 마을로 이사. 뜻 있는 분들과 열매지기 공동체와 강아지똥학교 운영

2008년 세 번째 시집<내가 가장 착해질 때>(나라말) 출간

2008년 세 번째 동시집<닳지 않는 손>(우리교육) 출간

2010년 첫 산문집<농부시인의 행복론>(녹색평론사), 두 번째 산문집<부끄럽지 않은 밥상>(우리교육) 출간.

이재희 기자 jaehee@busancom
촬영= 박세익 기자
영상편집= 김채희 대학생 인턴
동영상 busan.com


스마트폰으로 QR(Quick Response·빠른 응답) 코드 찍으세요. 농부시인 서정홍 씨의 인터뷰 장면을 박세익 기자가 아이폰3로 찍었습니다. 스마트폰에서 QR 코드 리더기를 작동시킨 뒤 화면 중앙 네모 창에 신문지면의 QR코드를 맞추면 동영상과 다양한 사진, 기사가 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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