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이데올로기를 비틀다
배찬효의 '복장 속의 실존' 연작.만들어진 이데올로기를 근본에서 뒤흔드는 도구가 허구의 장치라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고은사진미술관 본관에서 전시 중인 김희정, 배찬효, 데비한의 사진은 발랄하지만 날카롭다. 왜곡된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다분히 실험적인 작업이다. 이들은 거짓말을 통해 기존의 문화적 이데올로기가 구축한 정체성의 허구성을 비틀고 꼬집는다. 전시 제목은 '사진, 시선의 현대성' 전.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교육받고 자란 데비한. 그는 한국 문화 속에서 서양을 기준으로 획일화된 미(美)의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둔다. '여신들'(Graces) 연작은 미인의 상징인 고대 그리스 비너스의 얼굴과 한국 여성의 몸을 기호로 끌어들여 아름다움에 대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사진작가 김희정·배찬효·데비한 작품전
美·여성성·백인우월주의 '허구성' 폭로
작가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여성의 몸을 촬영한 후 섬세한 디지털 작업을 거쳐 피부 질감을 대리석 조각처럼 매끄럽게 보이도록 만들었다"고 했다. 이렇게 만든 '여신'들은 얼굴을 제외하면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한국 여성이다. 작가는 '여신'들의 지극히 현실적인 몸짓을 통해 서구와 구별되는 아시아의 문화를 드러낸다. 특히 유방암 수술과 같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진 여성의 현실적 몸이 고대 그리스 여신의 얼굴과 결합함으로써 오랫동안 유포돼 온 이상적인 미의 전형이 허구임을 폭로한다.
김희정의 '핑크 앤 화이트'(Pink & White) 연작은 여성에게 부가된 색의 이데올로기를 직방으로 겨눴다. 일반적으로 분홍색과 하얀색은 여성의 순수함과 부드러움, 소녀다움,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이런 고정관념은 사회구조에 의해 무의식적으로 습득한 것이라고 작가는 본다. '핑크 앤 화이트'에서 작가는 여성으로 상징되는 물체에 하얀색을 덧입힌다. 하얀색이라는 순결과 희생의 이미지를 덧입히는 작업은 역설적으로 강요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 시리즈는 기만적인 '색의 이데올로기'를 오브제를 통해 은유적으로 이야기한다.
배찬효는 서양 사회 속 동양 남자에 대한 편견에 대항한다. 부산 출신으로 경성대에서 사진학을 공부한 뒤 영국에 유학한 작가는 그곳에서 소외감과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바 있다고 고백한다. 이런 경험에서 백인 중심의 제국주의적 우월감을 꼬집는다.'복장 속의 실존'(Existing in Costume) 시리즈가 바로 그것. 서양 백인 중심의 편견이 가장 잘 드러난 서양 초상화 중에서 '대영제국'의 권력을 보여주는 여성 귀족의 복장을 작가가 재현함으로써 작가 스스로 서양문화에 참견한다. 이런 끼어들기를 통해 동양인 남자로서 영국에서 겪은 소외감과 편견, 그리고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또 백설공주, 개구리 왕자,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백조의 호수 등 서양 동화에 대한 패러디 작업을 통해 서양문화의 차별성을 꼬집는다.
이상적인 아름다움, 성에 대한 고정관념, 오리엔탈리즘 등 견고하게 자리 잡은 문화 이데올로기에 질문을 던지는 세 작가의 작업을 통해 현대를 바라보는 또 다른 사진의 시선을 엿본다. ▶사진, 시선의 현대성=6월 10일까지 부산 해운대구 중동 고은사진미술관 본관. 051-744-3933. 정달식 기자 dosol@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