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죄졌나? 여성들 야만적 결혼관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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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김경일

1930년대 일부 지식인으로부터 어릿광대 놀음 같다며 비판을 받았던 1900년대 초 전통 결혼식의 모습. 푸른역사 제공

1924년 한 일간지에 당시로선 충격적 사건이 보도됐다. 전라남도 담양에 사는 19세 여성 정차숙이 부모의 뜻을 어기고 '임의결혼'을 한 사건이었다. 근대 학교 교육도 받지 않은 양반집 처녀가 박평길이란 남성과 부모 승낙 없이 자유의사에 따라 신식결혼을 한 것이다. 아버지 뜻에 따라 혼처가 정해질 기미가 보이자 그녀는 박평길을 찾아가 결혼을 먼저 요구했다. 지위가 낮은 집안 출신이었던 박평길은 머뭇거렸다. 그녀는 박평길의 손목을 끌고 일가친척들이 모인 자리로 데리고 갔다. "이후부터 이 사람이 남편이니 이 사람 이외에는 어떤 사람과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 일로 정차숙의 아버지는 양반 집안의 수치라며 죽기를 결심하기까지 했다.

신교육을 받지 않은 외진 시골 처녀가 신식결혼을 한 것은 단숨에 전국적 이슈가 됐다. 서울 지식인들의 논쟁이 신문 지상에서 뜨겁게 불붙었다. '사직동인'이란 기고자는 "관습이란 색안경을 벗고 볼 때 아무런 결함이 없으며 향촌까지 침입한 해방의 정신이 약동하는 신기운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사동인'이란 기고자는 "자녀가 부모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결혼하는 것은 불온한 일이며 자녀 자신을 위해서도 위험한 일"이라고 반박했다.


1920년대 서구 사조 유입
사랑·자유 중시한 결혼관
봉건적 가치와 정면 충돌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 '
정차숙 사건' 뜨거운 논쟁

신식결혼 올린 나혜석
독신·남자공창 등 주장도

전통과 근대 혼재된
당시 결혼과 가족관 조명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 /김경일

1920년대는 이처럼 전통적인 강제결혼과 근대적인 자유결혼의 충돌이 빈번했다. 그 시대적 맥락을 보자. 1919년 3·1 운동 전후 유럽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일본에서는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가 펼쳐지면서 서구 사조가 유행했다. 이를 배경으로 개조, 진보, 이상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가 지배했다.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1910년대부터 접한 이러한 사조는 1919년 3·1 운동 이후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밀려들었다. 이 물결이 사회 전반을 휩쓸면서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이상적 결혼과 자유결혼이란 말이 유행했다. 1920년대 이상적 결혼은 자유결혼으로 표현되는 근대적 사랑의 요소를 중시했다. 자유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근대적 사랑의 요소와 개인 인격의 자율성, 배우자 선택에서 당사자 자신의 결정권이었다. 신식 청춘 남녀들은 연애 없는 결혼은 죄악이란 믿음을 가졌다. 전통적 인습에 따라 부모가 결정권을 가지던 강제결혼과 전제결혼을 강하게 비판하고 저항했다. '정차숙 사건'은 1920년대 자유결혼을 둘러싸고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 전통과 근대적 가치가 격돌한 단면이었다.

'근대의 가족, 근대의 결혼'은 봉건적 전통과 근대적 요소가 혼재돼 혼란스러웠던 1920~30년대 근대 한국 풍경을 결혼과 가족이란 프리즘을 통해 조명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인 저자는 2004년 '여성의 근대, 근대의 여성'을 펴낸 바 있다. 8년 만에 후속작으로 펴낸 이번 책에서 저자는 1920~30년대 결혼, 조혼, 이혼, 가족의 대안 형태를 보여준다. 근대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증가하면서 당시 제기됐던 남녀평등의 문제나 여성의 역할에 대한 논쟁, 가부장제와 현모양처 주의, 여성의 만혼과 결혼 기피 현상, 성과 정조의 문제 등 다양한 이슈를 엿볼 수 있다.

식민지 시기의 가족과 결혼을 둘러싼 풍경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조혼에서 비롯된 빈번한 남편 살해가 대표적이다. 1930년대 여성의 배우자 살해 사건이 날마다 신문에 1~2건씩 실렸다. 강제적이고 불합리한 결혼을 했던 여성들이 가정생활에 질곡을 느끼고 남편 살해, 출가, 자살 연출을 하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지식인들은 "시대에 뒤처진 조혼은 하루빨리 폐지되어야 할 야만적인 관습"이라고 비판했다. 이들이 보기에 조혼은 국력의 위축과 인종의 타락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였다. 이처럼 조혼이 집중적인 비판 대상이 되었음에도 일제 강점기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면서 존속했다. 아이러니한 현실이었다.

반면 빛도 있었다. 사랑과 결혼의 일치, 자유이혼 강조, 가정 평화와 상호 이해에 기반을 둔 근대 가족의 추구, 이성 사이의 우애에 대한 실험이나 대안 결혼 추구 같은 노력도 존재했다. 1920년 신식결혼을 올렸던 나혜석은 전통과 근대가 충돌한 혼란스런 식민지의 과도기 상황에서 이상적인 사랑과 결혼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했다. 그녀는 독신 생활, 남자 공창, 시험결혼, 이성 간 우정과 같은 다양한 제안을 했다. 그녀는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취미"라며 "결코 마음의 구속을 당할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근대 한국의 가족과 결혼을 둘러싼 다양한 풍경은 낯설지 않다. 근대와 탈근대가 공존하는 오늘날에도 가족 해체 등 심각한 가치 혼란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만혼과 독신 증가로 가족이 소멸할 것이란 주장도 나온다. 하지만 국가의 의미가 점차 퇴색하고 사회 안전망이 붕괴하는 현실에서 가족은 개인이 의지할 수 있는 마지막 안식처다. 가족과 결혼으로 본 근대 풍경에서 오늘날 결혼과 가족생활이 직면한 갈등과 모순을 해결하는 해법을 찾아야 하는 이유다. 김경일 지음/푸른역사/480쪽/2만 8천 원.

김상훈 기자 neat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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