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부산을 사랑한 벽안의 神父 하안토니오(몬시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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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 꿈꾸던 평범한 독일 청년 타국서 가난한 이들의 聖者가 되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이 처음 배운 한국말은 '아이고, 죽겠다'다. 그는 "한국인들은 마음이 살아있는 백성이라 정이 많고 작은 일에도 마음이 자주 아픈 것 같다"고 했다. 김경현 기자 view@

독일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종전 뒤엔 3년 동안 전쟁 포로로 억류됐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36세라는 적잖은 나이에 사제 서품을 받고 아무 연고도 없는 한국에 왔다. 부산의 어느 판자촌 성당의 제1대 신부. 50여 년 뒤 '푸른 눈의 신부'는 부산 명예시민이 됐다. 이렇게 극적인 또 삶이 있을까. '달동네의 성자'로 불리는 하 안토니오(90) 몬시뇰(가톨릭 고위 성직자). 혹시 극작가 아서 밀러의 작품 '모두가 나의 아들'을 아는가? 그의 삶이 이 제목(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대로다. 가난한 모든 이들의 아버지로 살아온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을, 한 편의 희곡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등장인물> 
하 안토니오 몬시뇰-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한국본부장. 부산 동항성당 제1대 신부. 배경준 국장-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사무국장. 부모를 여의고 난 뒤 하 몬시뇰이 거두어 키움. 안톤 트라우네르-어린 시절의 하 몬시뇰. 달리기, 수영을 좋아해 운동선수가 꿈인 소년. 카로리나 여사-몬시뇰의 어머니. 살던 집 등 전 재산을 기부하고 홀로 양로원에서 살다 1971년 별세. 지베르트 신부-한국에서 선교활동할 당시 '지 신부'로 불림. 안톤에게 한국행을 권함. 기자, 신학교 학장, 주교, 신자 

<장소> 
1막-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 내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사무실 안팎. 때는 2012년 6월 15일. 2막-독일 베르팅겐. 1930~1950년대. 3막-부산항 및 적기마을(현재 우암동·감만동) 일대. 때는 1958년~2011년. 4막-동항성당 내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사무실. 2012년 6월 15일.

처음 한국 땅 밟은 지도 반세기
사랑은 나누고 전해야 하는 것
영적인 아버지가 되는 길 택했죠
어렸던 시절 '신앙심' 별로 없어서
사제 되길 바라는 어머니와 다퉜지요

<1막>

2012년 6월, 기자가 부산 남구 동항성당으로 하 안토니오 몬시뇰을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한다. 그는 지난해 제1회 협성봉사상 대상을 수상했고, 부산 명예시민증도 받았다.

기자:비가 오려고 하는데 사진 먼저 찍을까요? 성모 마리아상 앞으로 가실까요?

하 안토니오 몬시뇰:(낮은 언덕을 따라 잠시 걷는 데도 숨찬 모습. 그래도 웃으며 서툰 한국말로) 아, 저기 예쁜 새를 보세요.

기자:네. 동네가 참 조용하고 아름답습니다. 올해 아흔인데, 건강은 어떠세요?

배경준 국장:(몬시뇰을 부축하며) 기관지가 좀 안 좋으세요. 오래전 한국에 온 뒤 큰 교통사고를 당해서 요즘은 관절도 불편하시고.

기자:아, 네. (화제를 돌리며) 그런데 두 분 웃는 모습이 어쩐지 닮으셨는데요.

배 국장:몬시뇰이 남의 집 머슴살이 하던 절 사제관에 데려다 키우셨어요. 학교도 보내주시고. 아버지나 다름없죠. 혼자 지내시기엔 사제관이 넓다면서 데리고 산 아이들만 7명입니다. 다 부모가 없거나 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지요.

기자:지난해 부산 명예시민이 되셨는데요. 귀화는 안 하셨나 봅니다.

몬시뇰:네. 이런 저런 불편함이 있어서요.

기자:36세 때 처음 한국에 오셨죠? 부산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몬시뇰:'와, 사람이 정말 많구나'였어요. 아이들도 많았어요. 성당 앞이 아이들 놀이터였죠. 유리창이 깨지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을 야단치지 말라고 했죠. 아이들이 유리창보다 더 소중하니까요. 아이들은 신이 천국에서 보내신 가장 귀한 선물이지요.

기자:어떤 사람들은 말썽 피우는 아이들을 '악마' 같다고 하는데요(웃음).

몬시뇰:자기 입장에서 보니까 그런 거예요. 말썽 피우면 내가 귀찮고 힘들어지니까. 이기적인 거죠. 그렇게 보면 모든 것이 지옥이고, 모든 이가 악마 같겠죠. 세상 모든 것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니까요.

기자:그런가요? 아이들을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결혼해서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은 생각은 없으셨나요?

몬시뇰:성직자의 길, 보람 있어요.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될 수 있죠. 영적인 아버지.

기자:오기 전에 하 몬시뇰에 관한 책을 읽었어요. 신부가 되기 전에 좋아하는 여자 친구가 있어서 방황하는 모습이 나오던데요. 신부가 된 것에 후회는 없나요?

몬시뇰:후회하지 않습니다. 신부가 되고 난 뒤 그 여자를 만나 들어보니, 그 친구는 그 당시 절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멋쩍게 웃으며) 그때 자기는 직장에서 승진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대요.

기자:하나뿐인 아들을 타국에 보내는 게 어머니께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텐데요.

몬시뇰:사랑은 나누는 것이에요. 품안에만 안고 있으면 사랑은 죽어버려요. 나누고 전하는 것이 사랑이죠.

기자:(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짓궂은 표정으로) 그런데 몬시뇰도 어릴 땐 신앙심이 별로 없었다고요?


<2막>

1930년대 독일의 베르팅겐. 도나우 강이 흐르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고등학생 안톤 트라우네르가 자신의 방에서 어머니 카로리나 여사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다.

안톤 트라우네르:(화를 내며) 제가 걸어둔 운동선수 사진 어디 갔어요? 어머니 마음대로 예수 성화 걸어놓지 말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이게 벌써 몇 번째예요?

카로리나 여사:아들아, 난 네가 사제가 되기를 바란다.

안톤:저는 운동선수가 되고 싶어요.

카로리나:(엄한 표정으로) 만약 이번에 또 성화를 치우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매를 맞게 하겠어.

안톤:(등을 돌리며) 마음대로 하세요. 성화가 걸려있어도 저는 쳐다보지 않을 거니까요.

안톤은 신앙심이 깊은 크라우스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종교적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베르팅겐 성당의 보좌 신부와 함께 종종 알프스 산에 오르기도 한다. 어느덧 고교 졸업반이 된 안톤. 진로 상담에 참여하지 않아 교장 선생님께 불려간다.

친구를 만나 종교적 영향 받았고
2차대전 참전했다가 신학대학 입학
전후 부산으로 와 봉사활동 했지요
한독여실 전신인 학원도 세웠답니다
기도의 힘으로 남북 통일 됐으면

안톤:저는 신부가 되기로 했어요. 진로 상담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된 안톤. 초췌한 얼굴로 고향에 돌아온다. 1949년 신학대학에 입학하지만, 몸과 마음은 지친 상태다.

신학교 학장:(안타까운 얼굴로) 넌 신부가 되면 더 없이 좋을 사람이지만, 몸이 약해서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서기는 힘들겠구나. 다른 길을 선택하도록 해라.

베르팅겐 직업학교 교리교사가 된 안톤. 1956년,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귀국한 지베르츠 신부가 그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말한다.

지베르츠 신부:이게 한국이라는 나라란다. 전쟁 뒤라 신부도 부족하고 아주 어려운 상황이야. 안톤, 한국에 갈 생각이 없니?

안톤:건강 때문에 용기가 나지 않네요. (한숨을 쉬며) 건강했다면 아프리카에라도 갔을 텐데.

1957년, 한국에서 지베르츠 신부로부터 편지가 왔다. 부산교구장인 최재선 주교에게서 신부를 보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안톤:(굳은 결심을 한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한국에 가자. 그곳에서 영혼이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자!

<3막>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안톤 신부는 한국에 가기 위해 비료를 운반하는 일본 국적의 화물선에 오른다.

안톤:(다짐하듯 혼잣말로) 나도 한국을 위해서 비료가 될 거야.

(7주간의 긴 항해 후 부산항 도착)

최재선 주교:(안톤을 반갑게 맞으며) '트라우네르'라는 신부님의 성은 무슨 뜻인가요?

안톤:오스트리아에 있는 '트라운'이라는 강 이름에서 유래한 성입니다.

최 주교:그러면 한자로 강과 물을 뜻하는 '하(河)'를 써서 '하 신부'라고 부르면 어떨까요?

사람들은 하 신부의 이름 '안톤'을 이탈리아 발음에 따라 '안토니오'라고 불렀다. 1959년, '하 안토니오' 신부는 당시 '적기'라고 불리던 우암동 동항성당 제1대 신부로 부임한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은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을 통해 성모 마리아가 전한 평화의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다.김경현 기자 view@
하 신부:(강론 중 들뜬 목소리로) 여러분, 우리 본당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편지 봉투를 들어 보이며) 이것 보십시오. '부산시 기적동 동항천주교회 앞'이라고 주소를 잘못 썼는데도 기적처럼 적기마을에 도착했습니다. 적기를 거꾸로 하면 기적! 우리는 이곳에 기적이 일어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신자:(감동 받은 얼굴로) 신부님은 어째서 이렇게 적기를 사랑하십니까?

하 신부:어린이가 많고 가난한 사람이 많은 곳이기에 더 애착이 갑니다.

하 신부가 원조물자인 밀가루를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포로생활 체험으로 배고픈 이들의 절박함을 아는 그는,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식량 사정을 살폈다.

신자:마을 사람들이 신부님을 '가난한 사람들의 아버지'라고 불러요. 그런데 혹시 중풍환자 한 명이 돼지우리에서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하 신부:(깜짝 놀라며) 아니, 돼지우리에 사람이 살다니요. 당장 갑시다.

(하 신부는 직접 그 환자를 목욕 시키고 새 옷을 입혀준다. 청소하고 다다미도 깔아준다.)

1965년, 하 신부는 후원받은 재봉틀 10대를 밑천으로 가난한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칠 학원을 세운다. 이 학원이 '한국'과 '독일'의 첫 글자를 따서 이름 지은 '한독여자실업학교'의 전신이다. 이 학교는 2009년, 부산문화여자고등학교로 개명됐다.

하 신부:(옛날을 회상하며 감격한 듯 혼잣말로) 60명에서 출발한 기술학원이 이렇게 번듯한 학교가 되다니.

<4막>

다시 2012년. 하 몬시뇰은 인터뷰 중이다.

 

부산 남구 동항성당 안 성모상 앞에 앉은 모습. 김경현 기자 view@
기자:(몬시뇰의 이야기를 한참 듣고 난 뒤) 지난 50여 년 동안 부산에서 빈민 구제운동부터 학교, 교회 조산원 설립까지 많은 일을 하셨네요.

몬시뇰:(온화한 미소로) 부산에서 살게 된 것은 나에게 큰 행복이었습니다. 부산은 좋은 사람들이 많고, 희망적인 도시입니다.

기자:1998년엔 남구 명예구민, 2011년엔 부산 명예시민이 되셨죠? 1974년부터는 임진각에서 매년 5월 평화통일 기원 미사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몬시뇰:옛 '푸른 군대', 지금의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에서 하는 일이에요.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에게는 기도가 무기예요. 기도의 힘으로 피 흘리지 않고 통일을 이뤄낼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북한에 가는 것이 제 마지막 소원이에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가 슬쩍 배 국장에게 묻는다.)

기자:배 국장께서 지난 40여 년간 옆에서 지켜본 하 몬시뇰은 어떤 사람입니까?

배 국장:(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살아있는 성자'죠. 무소유를 실천하는 분이시고요. 한번은 신자들이 겨울 코트를 선물로 드렸는데, 어느 날 보니 길거리에 거지가 그 옷을 입고 있지 뭡니까? 사랑은 나누는 것이고, 돌고 도는 것이라는 걸 몬시뇰에게서 배웠습니다.

 이자영 기자 2young@busan.com


약력

1922년 10월 독일 베르팅겐 출생 

1941년 8월 군 입대 

1945년 5월~1948년 12월 유고슬라비아에서 포로 생활 

1949년 3월 독일 딜링겐 신학대학 입학 

1958년 4월 사제 서품 

1958년 7월 한국 입국 

1959년 10월 부산 동항성당 주임 신부로 부임 

1964년 8월 푸른군대(현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한국본부 설립 

1964년 12월 사랑의 집 건립 

1965년 3월 한독여자실업학교 설립 

1974년 5월 임진각에서 제1회 평화통일 기원 미사 

1977년 2월 교회 조산원 설립 

1998년 12월 부산 남구 제1호 명예구민 

2005년 4월 몬시뇰로 추대 

2011년 3월 제1회 협성봉사상 대상 

2011년 6월 부산 명예시민증 취득

헌신과 사랑의 기록 50년 세월 그의 발자취

신부로 재직할 당시 마을 방문 모습.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제공
마을 사람의 사정을 듣고 있는 하 신부.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제공
한복 입은 신자들과 찍은 단체 사진.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제공
'적기'라 불렸던 부산 남구 우암동.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제공
1974년 임진각에서 열린 평화통일 기원 미사. 파티마의 세계 사도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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