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Chef] 해수부 장관 열전 <7> 참여정부 후반부 세 장관(오거돈-김성진-강무현)과 '해양부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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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명(短命) 장관'이 이어지며 흔들리던 해양수산부는 장승우 장관 재임기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다.

조직 안정에 장 장관은 더할 나위 없는 적임자였다. 김영삼(YS) 정권에서 15개월여 해양부 차관을 지낸 경험, 김대중(DJ) 정부에서 장관(기획예산처)를 지낸 관록 등이 빛을 발한 결과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3년차(2005년)가 가까워지면서 개각 논의가 무르익기 시작했다. 앞선 2004년에는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3월 12일)와 17대 국회의원 총선(4월 15일) 등 메가톤급(級) 정치 이슈들이 많았다. 대통령 탄핵에 속수무책일 만큼 '소수당'의 비애(悲哀)를 톡톡히 겪은 열린우리당은 총선에서 원내 과반을 넘는 152석을 얻었다. '여대야소(與大野小)'로 정치지형이 확 바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참여정부의 진정한 원년(元年)은 2005년이란 분석도 나왔다. '수(數)의 힘'을 앞세운 거대 야당의 횡포로 국정운영에 사사건건 브레이크가 걸리는 일이 더 이상 없을 것이란 점에서다. '신년(新年) 개각'의 필요성이 대두된 배경 중 하나다.

게다가 장 장관은 기본적으로 '구원투수', '해결사'의 성격이 강했다. 전임 장관(최낙정)의 갑작스러운 낙마(落馬)로 인해 위기를 맞은 해양부 조직을 추스리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는 이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재임기간도 1년 2개월이 넘으면서 2004년 연말부터 서서히 교체설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오거돈 전 해양수산부 장관 재임 시절. 부산일보DB

부산 시정(市政) 책임지다 해양부 수장(首長) 변신 오거돈 장관
'대표 선수론'으로 '투 포트' 정책 변화를 꾀하다

노 대통령은 2005년 1월 4일 새 해양부 장관(13대)에 오거돈 전 부산시장 권한대행을 임명하는 등 6개 부처에 대한 개각을 단행했다. 오 장관은 1948년 부산 출생으로 경남고, 서울대 철학과와 동 대학 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행정고시 14회에 합격한 후 부산시 사무관으로 공직을 시작해 청와대 정책보좌관실 행정관, 내무부 편성운영·국민운동지원과장을 지냈다.

중앙부처에서 근무하던 오 장관은 1992년 1월 부산시 재무국장에 임명됐다. 이후 부산시에서 교통관광국장, 내무국장, 상수도사업본부장 등을 거쳐 2000년엔 정무부시장, 2001년엔 행정부시장에 임명됐다.

오 장관은 2003년 10월~2004년 5월 부산시장 권한대행으로 일했다. 안상영 시장이 건설업체로부터 1억 원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로 2003년 10월 23일 구속 기소됐기 때문. "지방단체장이 공소 제기된 후 구금상태에 있는 경우 부단체장이 권한을 대행한다"는 지방자치법 규정에 따른 것이다. 안 시장은 2004년 2월 3일 수감중이던 부산구치소에 목을 메 자살해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오 장관의 행로(行路)는 2004년 6월 5일 치러진 부산시장 보궐선거를 계기로 크게 바뀐다. 여당인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면서다. 보수성향의 오 장관이, 그것도 한나라당의 '텃밭'인 부산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지역에선 여권 핵심부와 오 장관 간에 'APEC 딜(Deal)'이 정설(定說)처럼 나돌았다. 그해 11월 열리는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담을 부산에서 개최하는 대신 오 장관이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열린우리당 시장 후보로 출마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APEC 정상회담 개최지는 부산과 제주가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객관적인 여건 등 모든 면에서 제주가 앞선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해 4월 26일 APEC 정상회의 개최도시 선정위원회(위원장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부산을 개최지로 확정했다. 위원 16명이 표결을 두 차례나 벌여 부산은 12표, 제주는 4표를 얻었다.

APEC 정상회담 부산 개최가 결정되고 20여일 뒤인 5월 17일 오 장관은 열린우리당 부산시장 후보로 선출됐다. 당시 그는 "쉬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역사에 남는 길을 가고 싶었다"면서 "부산발전을 위해 어느 길을 가는 것이 옳은지 깊이 고민한 끝에 선택을 내린만큼 후회없는 선거를 치르겠다"고 심경을 밝혔다.

보궐선거 결과는 좋지 않았다. 오 장관은 34만3천110표(37.7%)을 얻어 56만6천700표(62.3%)를 받은 한나라당 허남식 후보에게 완패했다.

선거 후 5개월여 은인자중하던 오 장관은 해가 바뀌자 곧바로 해양부 수장(首長) 자리에 올랐다. 노 대통령으로선 여권의 불모지(不毛地)인 부산에서 총대를 메고 부산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오 장관에게 '정치적 빚'이 있었다. "척박한 부산에서 기득권을 버리고 열린우리당을 택한 사람이 그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차기, 차차기 선거에서 우리당을 택하겠느냐"는 부산 지역 여권의 기류도 영향을 미쳤다.

당초 여권 내에선 오 장관의 새 자리로 '행정자치부 차관'가 거론됐다. 그러나 '격(格)이 안 맞다'는 비판이 나왔다. 오 장관도 "차관을 할 바에야 지역에 남아 봉사하겠다"고 버텼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업무의 전문성, 부산시와의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해양부를 오 장관이 맡기로 결정됐다.

오 장관은 2005년 1월 5일 취임식을 가졌다. 그는 취임사에서 "해양부 출범 때부터 깊은 관련을 맺어왔으며 부(部)가 존폐위기에 섰을 때도 적극 도와서 활성화에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사랑과 애정을 갖고 여러분과 함께 호흡해 왔다"며 자신의 임명을 둘러싼 '낙하산' 논란에 반박했다.

오 장관은 재임 기간 중 항만정책의 기본 틀인 '투 포트(Two-port)' 시스템의 변화를 꾀했다. 투 포트 시스템이란 부산항과 광양항을 동시-병행해서 개발한다는 것이 핵심 내용. 물동량 처리 등에서 부산항이 광양항을 월등히 앞섬에도 불구하고 '호남권 배려'란 정치적 동기에서 만들어진 정책이었다.

오 장관은 취임 후 첫 기자 간담회에선 "국가정책은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며 "광양항의 물량이 따라주지 않는 문제점 때문에 현재 전국 항만 물동량을 조사하고 있다. 이 분석결과가 나오면 더욱 심도 있는 대책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형상 당분간 투 포트 정책을 유지하겠다는 뜻이었지만 수정 가능성을 열어 둔 발언이다.

투 포트 정책 수정 움직임은 2005년 9월 14일 오 장관의 '싱가포르 발언'을 통해 가시화됐다. 오 장관은 APEC 해양수산 장관 회담 참석차 싱가포르를 방문해 국내 선사 대표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동북아 물류중심 국가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도 대표적인 선수(항만)를 하나만 키워야 국제적인 경쟁력이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싱가포르 물류기업 대표들과 국내 해운기업의 싱가포르 주재원들이 투 포트 정책에 대해 비판적 발언을 쏟아내자 오 장관이 이에 화답(和答)하면서 나온 것. 오 장관은 기자들이 발언의 진의를 묻자 "대표선수가 꼭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둘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며 한발 물러섰다. 자신의 발언이 '투 포트 정책 포기'로 비춰질 경우 파장이 클 것이란 우려에서 진화에 나선 것이었다.

투 포트 정책에 대한 오 장관의 부정적 평가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부산시에 몸담고 있던 때부터 기회가 될 때마다 투 포트 정책을 비판했다. 해양부 장관 취임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내놓고 비판의 날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부산항과 광양항은 위상이 다르다. 부산항은 국제경쟁력을 갖춘 국내 유일의 항만이다. 앞으로도 부산항은 최우선적으로 건설해 나갈 것이다"(부산일보 2005년 5월 27일자 인터뷰)고 강조했다.

'대표 선수론' 발언으로 오 장관은 호남 지역 의원들에게 '뭇매'를 맞아야 했다. 2005년 9월 23일 국회 농림해양수산위의 해양부 국정감사가 무대였다. 민주당 이정일 의원(전남 해남·완도·진도)은 "장관이 지칭한 대표 선수는 부산항을 의미하는 것이냐"고 물은 뒤 "투 포트 정책이 우리나라 항만정책의 근간인데, 이를 관철해야 할 주무장관이 정책을 뿌리채 뒤흔드는 발언을 앞장서서 해서야 되겠느냐"고 따졌다. 무소속 신중식 의원(전남 고흥·보성)도 "한국의 상황을 를 도시국가인 싱가포르에 비교해서는 안 된다. 장관은 언동을 지혜롭게 해야 한다"고 질타했다.

오 장관은 물러서지 않았다. 투 포트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진 않겠지만 '수정'은 불가피하다고 맞섰다. 그는 "이르면 내년(2006년) 6월부터 물동량 처리실적과 연계해 항만 개발을 추진하는 트리거(Trigger) 시스템을 도입할 계획"이라며 "현재 10년 단위로 수립하도록 돼 있는 항만개발기본계획도 앞으로는 항만의 처리능력과 물동량 수요를 적기에 반영, 2~3년 단위로 수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터무니없는 장기 물동량 전망을 내세워 광양항에 불필요한 예산을 쏟아붓는 관행을 없애겠다는 얘기다. 대신 실제 물동량 처리 실적을 따져 부산항에 투자를 집중할 근거를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오 장관이 '트리거 시스템' 도입 방침을 결정한 과정엔 숨은 '조력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공개한다. 주인공은 당시 해양부를 출입하던 부산일보 이동현 기자-현 평택대학교 교수 겸 국제물류해양연구소장-다. 오 장관 등 해양부 관계자들의 얘기를 종합해 내막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오 장관의 싱가포르 발언-'대표 선수(항만)론-의 파장은 예상 보다 컸다. 호남 정치권을 중심으로 반발 분위기가 고조됐다. 국정감사가 코앞이라 오 장관의 고민은 더욱 컸다. 보다 못한 이 기자가 오 장관에게 "중요한 것은 '투 포트'냐 '원 포트'냐가 아니라 수요에 맞게 항만을 만드는 것이다. 항만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던 시대는 지났다. 수요에 맞게 항만을 개발하는 '트리거 시스템'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트리거 시스템이 어떤 것인가를 정리한 A4 용지 3장 짜리 보고서도 오 장관에게 건네졌다고 한다. 보고서는 'XX년까지 XX선석을 건설한다'는 식의 기존 항만개발계획 대신 '상시적으로 물동량 추이를 조사해 해당 항만의 수요가 처리능력의 70~80%쯤 될 무렵 추가 선석 개발에 착수하는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국정감사(9월 23일) 당일 오전 감사가 끝나고 휴식시간. 오 장관이 이 기자를 장관실로 호출했다. 그는 트리거 시스템 도입 방침을 오후 감사 답변을 통해 공론화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이에 이 기자도 "경제적 논리에도 어긋나는 주먹구구식 항만정책은 이제는 폐기해야 한다. 패러다임 변화가 필요하다"며 적극 찬성했다. 트리거 시스템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항만정책의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됐다.

오 장관은 임기 중 그동안 항운노조가 독점하던 항만 노무공급을 하역업체가 노동자를 직접 고용·운영하는 상용제(常用制)로 전환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2005년 5월 6일 해양부와 전국항운노련, 한국항만물류협회 간에 항만노동자의 상용화 도입을 빼대로 한 '항만노무공급체제 개편 노사정 협약서'가 체결됐다.

병술년(2006년)이 밝자 오장관의 거취가 다시 관심사로 떠올랐다. 그해 5월 31일엔 제 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 장관이 2004년 보궐선거에 이어 다시 부산시장에 도전할 지 여부에 이목이 쏠렸다.

오 장관은 일찌감치 출마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노 대통령 등 여권 핵심부는 5·31 지방선거에 대비해 내각에서 오 장관을 비롯해 이재용 환경부 장관(대구시장),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경기지사), 오영교 행정자치부 장관(충남지사)을 '징발'하기로 결정했다.

노 대통령은 2006년 3월 2일 지방선거에 출마할 이들 4개 부처 장관을 교체하는 내용의 개각을 단행했다. 오 장관의 이임식은 후임 장관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등 일정 때문에 3월 21일에 열렸다. 1년 2개월 16일간 재임해 전임자인 장승수 장관에 이어 두번째 '장수(長壽) 장관'으로 기록됐다.

5·31 부산시장 선거에서도 오 장관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섰지만 한나라당 간판으로 나온 허남식 시장에게 참패(慘敗)했다. 득표수는 32만9천470표(득표율 24.12%)에 그쳐 89만5천214표(〃 65.54%)를 얻은 허 시장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한동안 뉴스의 전면에서 사라졌던 오 장관은 2008년 3월 제 15대 한국해양대학교 총장에 선출되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는 2012년 3월까지 4년간 재임하면서 세계해사대학총장협의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퇴임 후인 2012년 3월엔 사단법인 대한민국 해양연맹 제 6대 총재로 취임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는 이명박(MB) 정부 출범과 함께 해양부가 폐지되자 부활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해양수산부부활국민운동본부(해국본) 자문위원장을 맡아 전방위적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성진 전 해양부 장관 재임 시절. 부산일보DB

'예산(豫算) 마피아' 출신 김성진 장관
노무현 대통령 등과 인연으로 참여정부 들어 '출세 가도(出世街道) 달려

노 대통령은 2006년 3월 2일 해양수산부 장관에 김성진 중소기업청장을 내정하는 등 4개 부처를 대상으로 이른바 '지방선거 차출용' 개각을 단행했다. 김성진 장관은 1949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고,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74년 행정고시 15회에 합격해 경제기획원(EPB)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EPB에서 1994년 교통체신예산담당관에 임명된 후 재정경제원-EPB와 재무부가 1994년 통합해 발족한 부처-에서 간접자본예산1과장(1994년)-예산정책과장(1996년)-예산총괄과장(1997년) 등을 지냈다. DJ 정부 출범 후 정부 예산 업무가 예산청으로 분리·독립된 후엔 예산청 사회예산국장(1998년)을 지냈다. 이후 국무총리실로 자리를 옮겨 재경금융심의관(1998년), 산업심의관(2000년)을 역임했다.

승승장구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DJ 정부 출범 이후 과거 예산실에서 '한솥밥'을 먹던 호남 출신 행시 후배인 임상규 씨-행시 17회. 광주 출신으로 기획예산처 예산실장, 과학기술부 차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순천대 총장으로 있던 2011년 6월 '함바 비리'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은 후 자살했다-와 장병완 씨-전남 나주 출신으로 역시 행시 17회. 기획예산처에서 예산실장, 차관, 장관을 지냈다. 현재는 민주통합당 소속 재선(再選) 의원(광주 남구)이다-등에 밀려 외곽을 돌았다.

2000년엔 주(駐)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사무국-미국 뉴욕 소재-재정부장으로 발령났다. 예산관료로 '잘 나가던' 김 장관으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관가(官街)에선 그의 관운(官運)이 다했다는 얘기가 나돌았다. 미국 생활은 2년 넘게 이어졌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4월에야 그는 '친정'격인 기획예산처 사회예산심의관으로 복귀했다.

2003년 7월 중순 김 장관은 청와대 정책실 정책관리비서관(1급)에 임명됐다. 기획예산처로 복귀한 지 불과 3개월여만에 사실상 '승진'한 것이다. 배경을 놓고 갖가지 분석이 나왔다. 노 대통령과 주변 친노(親盧) 그룹과의 친분설이 나돈 것은 이 무렵부터다.

이때부터 김 장관의 앞날은 탄탄대로였다. 5개월 후인 2003년 12월 하순엔 청와대 직제개편에 따라 산업정책비서관으로 자리가 바뀌었다. 이어 8개월이 채 안된 2004년 7월 중순엔 차관급인 중소기업청장에 임명됐다. 좀처럼 보기 힘든 '고속 승진'이었다.

김 장관이 참여정부에서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릴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단정지을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추론이 제기됐다.

김 장관은 공직 경력에서 알 수 있듯 경제관료 중에서도 실세그룹인 '예산(豫算) 마피아' 출신이다. EPB 예산실은 선·후배끼리 서로 밀어 주고 끌어주는 등 관계가 돈독하기로 소문난 곳. 금융권을 장악하고 있던'모피아(Mofia)'-옛 재무부(MOF:Ministry Of Finance)와 마피아(Mafia)의 합성어-와 견줄 정도였다.

김 장관과 비슷한 연배의 '예산 마피아'론 고교 동기이자 행시 한 기수 선배(14회)인 변양균 전 대통령정책실장-기획예산처 장관도 지냈다. 이른바 '신정아 게이트'에 연루돼 2007년 10월 구속됐다-이 있다. 경남 밀양 산(産)으로 경남고, 서울대 상학과 출신으로 역시 기획예산처 장관, 대통령 정책실장을 지낸 박봉흠 전 금융통화위원(행시 13회)-도 유명한 '예산 관료'다. 두 사람은 김진표 의원-2003년 경제부총리, 2005년 교육부총리 역임. 현재 민주통합당 3선(選) 의원-과 함께 노 대통령의 각별한 신임 하에 참여정부에서 승승장구한 대표적인 관료들이다.

특히 변 전 실장은 부산고 동기(21회)인 김 장관이 KEDO에서 국내로 복귀할 당시 기획예산처 차관이었다. 2004년 2월~2005년 1월까지 정부 고위급 인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청와대 민정수석 자리에 역시 김 장관의 고교 동기인 박정규 씨-노 대통령과는 동향(경남 김해) 후배에 사법고시 공부를 함께 했다. '박연차 게이트'에 연루돼 2009년 4월 구속 기소됐다-가 자리잡고 있었던 것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김 장관은 노 대통령과 측근들, 특히 부산 친노 그룹들과 꽤나 친분이 깊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 대통령과는 부산에서 한 고시원에서 함께 공부한 인연이 있었다. 실제 두 사람이 어느 정도 가까웠는지를 두고는 여러 설(說)이 있지만 김 장관에게 적잖은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의원-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실장을 지냈다. 18대 대통령 선거(2012년)에선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출마했다-과는 고교 동기인 박정규 씨를 '고리'로 안면을 텄다. 박 씨는 문 의원과 사법시험 동기(22기)로 절친한 사이였다. 1982년 당시 문 의원은 사법연수원을 차석(次席)으로 수료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좌절돼 실의에 빠져 있었다. 이 무렵 박 씨는 친한 고향 선배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노 대통령에게 문 의원을 소개했다. 문 의원은 이때부터 30년 가까이 노 대통령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이었다.

김 장관은 또 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 정윤재 전 청와대 의전비서관, 최인호 전 청와대 부대변인, 송인배 전 청와대 사회조정 2비서관 등 다른 부산 친노 그룹 핵심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장관은 본디 직선적인 성격에 거침없는 언변(言辯)으로 정평이 났었다. 기자는 1996년 재정경제원을 출입하게 되면서 당시 예산정책과장이던 김 장관을 처음 만났다. 당시 재경원 예산실은 PK 출신들의 독무대였다. 부산 출신으로 부산중학교를 졸업한 김정국 예산실장-행시 9회. 현재 기술보증기금 이사장-을 정점으로 박봉흠 경제개발예산심의관, 박병원 예산총괄과장-역시 부산 출신으로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다. 재경원 차관, 우리금융지주 회장, 청와대 경제수석을 거쳐 현재 은행연합회장으로 있다-과 김성진 예산정책과장 등이 핵심 포스트에 자리잡고 있었다.

김 장관은 미국 캔자스 주립대에 두 차례 유학해 석·박사 학위를 따느라 승진이 늦었다. 행시 후배(17회)인 박병원 씨가 그 보다 먼저 예산총괄과장을 지냈고 국장 진급도 빨랐다. 승진에 목을 메는 관료사회 분위기에서 기가 죽을 법도 했건만 김 장관은 아랑곳 없이 씩씩했다. 출입기자들과도 서스럼없이 지냈다. 특히 기자에겐 당시 부산일보 모 임원이 고교 동기란 점을 강조하며 취재 등 여러 면에서 나름 신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런 성정(性精)을 가진 김 장관이 약 2년만에 이사관(2급)에서 장관으로 '폭풍 성장'해 해양부에 들어섰다. 타고난 기질에 '차오르는' 의욕까지 겹쳐 취임 초부터 부(部)가 들썩들썩했다. 김 장관은 내정 발표 후 25일이 지나 열린 취임식(3월 27일)에서 "10년 안에 우리나라를 세계 5대 해양강국으로 만들겠다"며 "해양강국 실천전략 수립을 위해 세계적인 석학들의 자문과 국내와 전문가, 업계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해양수산부를 성과중심의 강력한 조직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 "가난하더라도 화목한 집안은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다. 중복업무를 과감히 조정해야 한다", "올바른 원칙과 공정한 정책입안 및 집행에 위배되면 단호히 조치하겠다"며 강조했다. 원대한 목표를 제시하면서 조직에 큰 변화를 꾀할 것임을 천명한 것이다.

김 장관은 취임 이전 공·사석에서 '해양부 개조론'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무엇 때문에 해양부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됐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다만. 해양부 관계자들의 전언을 종합해보면 김 장관이 1994~1996년 EPB 교통체신예산담당관, 재경원 간접자본예산1과장으로 당시 해운항만청 예산을 다룬 경험이 영향을 미쳤으리란 짐작이 나오는 정도다. 실제 그는 심심찮게 "항만건설이 일부 건설업자의 이해관계와 논리에 따라 이뤄지는 측면이 있었다"는 자신의 경험담을 얘기하곤 했다.

급기야 김 장관은 취임 후 처음 가진 간부회의에서 "이런 식으로 일할 것 같으면 전부 사표를 쓰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해양부분 일이다, 수산부분 일이다 하며 이분법적·방관자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하고는 같이 일할 수 없다. 공직자의 길에 네 일이 어디 있고, 내 일이 어디 있느냐"며 일갈한 다음에 나온 얘기다.

김 장관은 1996년 발족한 해양부가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옛 해운항만청과 수산청 출신 간의 알력에다 직렬 간 갈등으로 틈만 나면 불화(不和)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취임 전 지인들에게 "해양부에 대한 바깥의 (나쁜) 인식을 싹 바꿔놓겠다"고 강조했던 김 장관이다.

참여정부의 트레이드 마크'인 '혁신(革新)'을 해양부 직원들에 '주입'하는데도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취임 보름여 뒤인 4월 중순부터 5월 중순까지 국장급에서 시작해 과장급, 사무관 및 6급 주무관을 대상으로 혁신 워크숍을 순차적으로 가졌다.

참여정부 초기엔 중앙부처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혁신을 주제로 한 토론회가 대거 열렸다. 그러나 집권 4년차에 접어들어 특정 부처가 고위직은 물론 중·하위직까지 망라해 '혁신 드라이브'를 건 것은 드문 일이었다.

뒷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줄곧 들어온 내용을 다시 반복해서 뭐 하자는 거냐", "행사에 참석하느라 돈은 돈대로 들고, 직원들의 업무에 방해가 되는 것이 혁신이냐"는 등의 불평이 쏟아졌다. 취임 초부터 김 장관의 과도한 '군기(軍紀) 잡기'로 인한 피로감이 반감(反感)으로까지 표출된 것이다.

김 장관의 '함부로' 언어습관도 문제가 됐다. 엘리트 의식이 강했던 김 장관은 직원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얘기를 종종 했다. 특히 토목·건설업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는 항만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에게서 말로 '수모'를 당한 항만국 직원들이 꽤 있었다는 것이 당시 해양부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김 장관도 이러한 부내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그는 2007년 1월 5일 부산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직원들에게 인기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 직원들이 매우 잘하고 있지만, 잘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장관으로서 끝까지 질책하고 잔소리하는 어머니같은 자세를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장관 재임기간엔 북항재개발 사업이 주요 이슈 중 하나였다. 노 대통령은 이 사업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2004년 9월 노 대통령의 지시로 사업이 본격 추진되기 시작했다. 그는 부산에서 열린 종합계획 보고회(2006년 12월 27일)에 직접 참석해 "웅대한 비전보다는 부산시민들이 슬리퍼를 신고 와서 배 타고 즐길 수 있는 가장 즐거운 곳이 돼야 한다"며 방향을 직접 제시하기도 했다.

노 대통령의 이날 발언을 계기로 북항재개발의 모범답안처럼 여겨지던 '두바이(Dubai) 모델'이 친수(親水)공간 위주의 '시드니(Sydney) 모델'과 경합하게 됐다. 두바이 모델에 잔뜩 '필(Feel)'이 꽂혀 있던 허남식 시장 등 부산시 관계자들은 반발했고 시민단체들은 반색하고 나서는 등 논란도 가열됐다.

김 장관은 북항 개발 방향을 놓고 갑론을박이 벌어지자 "시민친수공간이냐, 상업기능이냐 논란이 많지만 어느 한쪽에 치우친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정리했다. "우선 친수공간에 역점을 두고, 상업시설은 수요와 재원을 봐가면서 연차별로 적절하게 개발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순서와 시간이 달라질 뿐이지, 북항재개발이 끝나는 2030년에 가면 똑같은 모습이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투 포트) 정책'을 둘러싼 논란도 재연됐다. 전임자(오거돈 장관)가 '트리거 시스템' 적용을 통해 변화를 꾀했던데 반해 김 장관은 '유지'쪽에 무게를 둬 적잖은 비판을 받았다.

김 장관은 2006년 5월 8일 전남 광양에서 가진 기자간담회를 통해 "부산항과 광양항의 양항체제는 의심할 여지 없는 정부의 확고한 항만 운영-개발-활성화 원칙"이라면서 "항만건설 및 배후물류 기지 등 광양항에 대한 투자는 계획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달여 뒤인 6월 16일 부산에서 가진 한 특강에서도 "동북아 중심 허브(Hub)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양항체제가 중요하며 그 중심은 부산항"이라고 투 포트 정책 고수 입장을 분명히 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정부가 투 포트 정책을 고수하는 한 허브는 불가능하다"면서 "축(Hub)이 두 개인데 바퀴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광양항과 부산항은 지리적으로 봤을 때 부산 북항과 신항의 연장이라고 보면 된다. 두 항을 묶어 기능을 특화시킨 개념으로 허브항을 봐 달라"는 다소 억지스러운 답변을 내놓기도 했다.

김 장관은 2007년 5월 10일 퇴임했다. 노 대통령은 그에 앞서 4월 19일 후임 해양부 장관에 강무현 전 차관을 내정했다. 인선 배경과 관련해 당시 박남춘 청와대 인사수석은 "청와대 산업정책비서관, 중기청장, 해양수산부 장관 등을 역임한 김 장관이 자신은 할 만큼 했다며 수시로 (사의)얘기를 했다"고 밝혔다.

청와대 측의 이러한 발표 내용에 대해 "실제와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김 장관이 사의를 표명한 것이 아니라 산업자원부나 행정자치부 등 보다 '힘센' 부처의 장관으로 옮기기를 희망했지만 결과는 '영전(榮轉)'이 아니라 '경질(更迭)'로 끝났다는 것이다.

김 장관은 1년 1개월 보름 가까이 재임했다. 15명의 역대 해양부 장관 중 장승우(12대), 오거돈(13대) 장관에 이어 세번째로 '장수(長壽)'했다.

김 장관은 퇴임 3개월여 후인 2007년 8월 13일 부산대 국제전문대학원 석좌교수에 임명됐다. 그해 9월에 신설된 국무총리실 산하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다 2009년 3월에는 경기도 안성시에 소재한 국립 한경대학교의 제5대 총장으로 선출돼 이름을 알리기도 했다.


강무현 전 해양부 장관 재임 시절. 부산일보DB

부(部) 폐지 비운(悲運) 겪은 '마지막 장관' 강무현
퇴임 5개월여만에 뇌물수수죄로 구속되기도

2007년 4월 19일 4개 부처를 대상으로 한 '소폭 개각'이 단행됐다. 해양수산·문화관광부 장관과 장관급인 법제처장, 국가보훈처장이 대상이었다. 해양부 장관엔 강무현 전 차관이 임명됐다.

강무현 장관(15대)은 1951년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원주 대성고,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해 1978년 행정고시 22회에 합격했다. 앞서 해양부엔 행시 22회 출신 장관이 이미 있었다. DJ정부 시절 정우택 장관(8대)이다. 박근혜 정부 조각(組閣)에 포함된 유진룡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서남수 교육부 장관도 행시 22회다.

강 장관은 1980년 문화관광부에서 공직을 시작해 4년간 근무하다가 옛 해운항만청으로 옮겨와 법무담당관·부산지방해운항만청 항무과장·항만유통과장을 지냈다. 해양부 출범(1996년) 후엔 기획예산담당관,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파견)을 거쳐 1999년 1월 공보관에 임명됐다.

첫 국장 보직인 공보관 시절은 강 장관에겐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1999년 2월 5일 한일어업협정 협상이 타결됐다. 상대국 EEZ(배타적 경제수역)의 입어(入漁) 조건에 대해 합의가 이뤄진 것이었다. 그런데 실무협상에서 우리 협상팀이 자료 미비, 전략 부재 등의 이유로 쌍끌이 어업과 복어 채낚기 등을 누락시켜 쿼터를 확보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해당 어민들이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정부의 무능력에 대한 비난 여론도 들끓었다. 야당은 물론 여당 내에서 '책임자 문책' 요구가 터져 나왔다. 이른바 '쌍끌이 파동'이었다. 해양부는 '십자(十字) 포화'를 맞아 휘청거렸다. 공보관을 맡은 지 한달여 만에 터진 메가톤급 악재에 강 장관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허둥댔다.

협상이 타결된 지 한달도 채 지나지 않은 3월 2일. 김선길 해양부 장관이 해양부 출입기자들과 간담회에서 사의를 표명했다.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것이다. 나흘 뒤인 3월 6일 강 장관은 돌연 공보관에서 수산정책국장으로 전보(轉補)됐다. 공보관에 임명된 지 두달 만이다. 후임엔 김창남 울산지방해양수산청장이 긴급 투입됐다. 사실상 '문책성' 인사였다.

수산정책국장으로 재임한 10개월도 강 장관에겐 힘든 시간이었다. 한일어업협정 파동으로 부내(部內) 수산라인이 초토화된 상태에서 사람이 없어 해운항만청 출신인 강 장관이 옮겨갔다. 이전까지 수산 업무를 한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터라 더욱 그랬다.

힘든 한해(1999년)를 보내고 2000년 1월 1일자로 강 장관은 국외훈련 발령을 받아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1991~1993년 영국 웨일즈대학교 해운경영학 석사과정을 수료한 바 있다. 2000년 1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강 장관에게 주어진 보직은 '또' 수산정책국장이었다.

당시 인사권자였던 노무현 장관은 현안이었던 '수협중앙회 개혁'을 풀어낼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수산 라인에선 난마처럼 이해관계가 얽힌 수협 문제를 공정하고, 객관적인 위치에서 풀어내기 어렵다는 것이 노 장관의 생각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국장급에서 수산정책국장을 맡길 사람이 없었다.

이런 와중에 수산정책국장을 해봤고 해운항만청 출신이란 점, 기획예산담당관과 청와대 근무 경험(경제수석실 행정관)을 가진 강 장관이 유력한 카드로 부각됐다. 강 장관은 수협법 개정 작업을 맡아 결국 1조1천581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 결정을 이끌어냈다.

강 장관은 2002년 1월 해운물류국장에 임명됐다. 수산분야에서 '친정'격인 해운·항만 파트로 복귀한 것이다. 1년 2개월여 재임하면서 선박투자회사법을 제정해 선박펀드를 출범시키는 등 업적을 남겼다.

참여정부 출범과 함께 강 장관은 '날개'를 달았다. 2003년 4월 29일 국립수산과학원장(1급)으로 승진한 것은 '신호탄'이었다. 강 장관 보다 행시 기수에서 5기나 빠른 서정호 기획관리실장(행시 17회)이 불과 한달여 전 1급으로 승진한 것과 비교하면 분명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그 보다 행시 기수에서 1~5기 앞서는 선배들도 국장급이 수두룩했던 터라 더욱 그랬다.

2004년 10월 15일 강 장관은 더한 '파격(破格)'의 주인공이 됐다. 김영남 차관이 사의를 표명하자 그 후임으로 임명된 것이다. 차관 승진 '0 순위'로 꼽히던 서정호 기획관리실장을 제쳤다. 서정호 실장은 언론에 "노무현 대통령이 해양부 장관 시절 가장 총애하던 공무원"으로 소개됐을 만큼 기대를 모으던 인물이다.

파장은 컸다. 강 장관 보다 행시 선배인 서 실장, 기술고시 15회로 먼저 1급으로 승진한 박덕배 차관보가 1주일 뒤 사표를 냈다. 두 사람이 물러난 자리는 이용우 장관 정책보좌관(행시 17회), 최장현 어업자원국장(〃 21회)이 임명됐다. 이들 역시 강 장관 보다 행시 선배들. 차관 인사의 충격파가 얼마나 컸던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파격적인 발탁 인사의 배경을 놓고 갖가지 설(說)과 분석이 제기됐다. 가장 설득력있게 나온 얘기는 강 장관과 지연(地緣), 학연(學緣)으로 얽혀 있던 노 대통령의 한 386 핵심측근 L 씨가 작용했다는 것이다. L 씨와 해양부 출신으로 청와대 핵심 포스트에 있던 P 씨가 합작(合作)해 자신들과 가까운 강 장관을 차관으로 밀었다는 내용. 각자 해양부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꾀하던 두 사람이 가장 유력한 차관 후보였던 서정호 실장을 '쇄신', '조직활성화'란 명분을 내세워 내쳤다는 설명도 더해졌다.

강 장관은 2006년 8월 초까지 1년 9개월여 재임하며 3명의 장관-장승우(12대)·오거돈(13대)·김성진(14대) 장관-을 보좌했다. 김성진 장관과는 2006년 '3·2 개각' 당시 장관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장·차관으로 '껄끄럽게' 지냈다. 김 장관은 취임 후 마치 '점령군'인 마냥 해양부 직원들을 무시하는 언행(言行)으로 불만을 샀다. 자연 직원들은 부(部) 출신인 강 차관을 중심으로 뭉쳤고 이런 얘기는 청와대 핵심 관계자들의 귀에 까지 들어가게 됐다. 김 장관이 취임 4개월여 후 강 장관은 '자의 반(半), 타의 반'으로 물러났다.

해양부 내에선 강 장관이 차관에서 물러났지만 참여정부가 끝나기 전에 장관으로 '롤백'하리란 전망이 많았다. 먼저 김 장관에 대한 부 안팎의 평가가 신통치 않았다. 다음으로 대다수 해양부 직원들은 경험을 통해 강 장관과 정권 핵심부간 '연결고리'가 존재함을 알고 있었다.

박남춘 청와대 인사수석-노 대통령이 해양부 장관이던 시절 총무과장을 지냈다. 현재는 민주통합당 국회의원(인천 남동 갑)이다-의 존재도 이러한 분석에 힘을 더했다. 박 수석은 강 장관의 행시 후배(24회)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는 참여정부 출범과 동시에 청와대에 들어가 국정상황실 상황1팀장, 국정상황실장, 인사제도비서관, 인사관리비서관을 거쳐 2006년 5월 초 인사수석으로 승진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차관에서 물러난 지 9개월여 후인 2007년 4월 19일 노 대통령은 강 장관을 제15대 해양부 장관으로 내정했다. 참여정부의 마지막 해양부 장관-당시만 해도 그가 해양부의 문을 닫는 장관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으로 낙점된 강 장관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5월 11일 취임했다.

강 장관은 다음(17대) 대통령 취임(2008년 2월 25일) 전까지 10개월여로 임기가 정해진 신세였다. 그를 둘러싼 환경은 한마디로 열악했다. 우선 대통령 선거까지 7개월여 남았지만 이미 결과는 뻔해 보였다. 노 대통령의 낮은 국정지지율과 여권의 난맥상으로 인해 야당(한나라당)에 정권이 넘어가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오죽하면 노 대통령은 2007년 2월 말 열린우리당을 탈당했다. 여권의 유력한 대선주자였던 정동영 씨가 열린우리당 해체에 나설 움직임을 보이자 반발하며 내린 결정이었다.

강 장관은 재임 기간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일이 잦았다. 2007년 11월 27일(한국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 142차 국제박람회기구(BIE) 총회에서 2012년 세계박람회 개최지로 여수가 확정됐다. 여수는 모로코의 탕헤르, 폴란드 브로츠와프시와 경합을 벌였다.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여수는 총 140개 회원국 중 77개국의 지지를 얻어 63표를 얻은 탕헤르를 제치고 유치에 성공했다.

강 장관은 주무부처인 해양부를 대표해 무려 55일 동안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 19개 국가를 방문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5년전인 2002년 12월 '2010년 세계박람회' 유치를 두고 중국 상하이와 4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석패한 여수가 권토중래 끝에 이뤄냈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결과였다.

이 시기 대선 승리가 확실시되던 한나라당 이명박(MB) 후보 측에선 '대부처주의(大部處主義)', '기능별 부처 재편론' 등을 내세워 공공연히 "차기 정부에선 해양부는 없다"고 공언했다. 여수 엑스포 유치가 확정되자 해양부 내에선 "이제 살았다"며 환호했다.

그러나 열흘만에 분위기는 일거에 180도로 바뀌었다. 12월 7일 충청남도 태안군 앞바다에서 홍콩 선적의 유조선 '허베이 스피릿 호'와 삼성물산 소속의 '삼성 1호'가 충돌했다. 이 사고로 유조선 탱크에 있던 총 1만2천547 킬로리터(7만8천918 배럴)의 원유가 태안 인근 해역으로 유출됐다.

사상 최악의 기름 유출 사고의 충격은 엄청났다. 책임론을 놓고 비난여론이 높아졌다. '해양부 해체론'까지 제기될 정도였다. 강 장관은 사고 발생 직후부터 태안과 서울을 오가며 방제(防除)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간부회의에서 "안면도가 뚫리면 해양부는 죽는다"(12월 13일)며 총력대응을 강조했다. 대선 투표일(12월 19일)엔 새벽 일찍 투표를 마치고 아예 해양부 본부와 인천·평택해양수산청 소속 직원 500여 명을 직접 이끌고 태안으로 내려갔다.

강 장관은 해양부를 향한 비판 여론에 "정유업계등 업계의 반대도 많았지만 그동안 해양안전에 대해 강력한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것은 우리가 반성해야 부분"이라고 자세를 낮췄다. 반면 '무용론(無用論)'에 대해선 "해양행정을 총괄하고 있는 해양부가 만약 없었다면 이번 사태에 대한 대응이 지금처럼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해양부 폐지'는 대선이 끝나자 점차 현실로 나타났다. 강 장관 임기 중 최대의 참사(慘事)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MB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2008년 1월 10일 △해양부를 폐지하고 △해운·항만물류·해양정책 부문은 건설교통부와 합쳐져 국토해양부로 △수산 부문은 농림부와 합쳐져 농림수산식품부로 개편하는 내용의 정부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강 장관은 부 존속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야당인 대통합민주신당 손학규 대표를 만나 지원을 요청해 뒷말을 낳기도 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MB 인수위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야당 대표를 찾아가는 것이 진정성 있는 행동이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정계(政界) 진출설이 심심찮게 나돌던 강 장관을 정조준해 "향후 개인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왔다.

2008년 2월 20일 손학규 통합민주당-대통합민주신당이 2008년 2월 11일 민주당과 통합해 만들어졌다-대표가 인수위 측의 '해양부 폐지' 방침에 반대하던 기존 입장을 바꿔 폐지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강 장관으로선 믿었던 '마지막 보루(堡壘)'마저 무너진 것이다.

이틀 뒤(2월 22일) 국회는 오후에 본회의를 열어 해양부 폐지 등을 내용으로 '18부(部) 4처(處)'인 중앙행정조직을 '15부 2처'로 줄이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해양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됐다.

'마지막 해양부 장관'이 된 강 장관은 2월 28일 온라인 정책고객 10만 명에게 고별 편지를 보냈다. 다음날(2월 29일)이면 정부조직법 시행령이 관보(官報)에 게재되고 해양부는 1996년 출범이래 12년만에 공식적으로 폐지될 처지였다.

해양부 '최후의 날'에 보낸 편지에서 강 장관은 "새 정부 출범으로 그동안 미래 해양강국을 목표로 발전시켜온 해양부를 지켜내지 못한 상황에서 여러분과 헤어지게 되니 마음이 무겁고 만감이 교차한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는 "바다가 우리를 하나로 이어준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면서 몸은 여러분 곁을 떠나지만 마음은 늘 함께할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퇴임 후 강 장관은 더 큰 시련을 겪었다. 2008년 7월 21일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윤갑근 부장검사)는 해운사 등으로부터 9천만 원의 금품을 받은 혐의(뇌물수수)로 강 장관을 구속했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지 5개월도 채 안된 시점에서다. MB 정부 출범 이후 전 정권의 장관급 인사가 구속된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검찰은 강 장관을 구속 기소하면서 그가 차관 재임 시절인 2005년부터 중견 해운사인 D사 등 해운업체와 지역 수협과 항운노조 등 자신의 업무와 연관성이 있는 회사 또는 단체들로부터 수시로 돈을 받았다고 밝혔다. 모두 8곳으로부터 적게는 50만 원에서 많게는 1천500만 원까지 돈을 받았다고 했다. 여객선 운항 및 항만 준설 공사 수주 편의, 부두 사용권 제공, 노무 문제 해결 등 수뢰(收賂) 명목도 다양했다.

검찰은 강 장관이 '대담하게도' 차관 집무실에서 두 차례, 장관실에서도 한 차례 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공개됐다. 또 강 장관이 간호사인 부인이 근무하는 병원의 다른 직원 등의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수뢰한 돈을 관리했으며 생활비 등으로 사용했다고 밝혔다.

강 장관은 2008년 8월 21일 서울중앙지법 제24형사부(이경춘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첫 공판에서 "금품수수 사실은 검찰에서 진술한 것처럼 대부분 인정하지만 대가를 바라고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심(2008년 10월 10일)에서 징역 2년의 실형과 추징금 7천650만 원을, 2009년 2월 11일 항소심에선 징역 1년에 역시 추징금 7천650만 원이 선고됐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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