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원의 영화와 삶] 평범하고 숭고한 '그림자들'의 얼굴
고된 노동의 흔적이 그대로 묻어나는 안전화 뒤로 배 옆에 털썩 누워 곯아떨어진 노동자들이 보인다. 다큐멘터리 '그림자들의 섬' 한 장면.지난 몇년간 부산의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늘에서 일제히 재능세례라도 내린 것인지 부산의 다큐멘터리들이 비상하고 있다. 아직 대중의 시선에는 가닿지 않았지만 빛나는 것들은 오래 숨기기 어려운 법.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의 수상 소식과 극장 개봉으로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몇몇 이름이 있다. 김영조·김지곤·박배일·오민욱·김정근 감독이 그들이다.
그들의 최근작만 일별하자면, 김영조는 영도다리 아래 주민들의 일상을 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2015)로 여러 곳에서 수상소식을 알려왔고, 김지곤은 산복도로에서 평생을 살아온 할머니와 우정을 쌓으며 '할매' 시리즈(2011~2016)를 이어가는 중이다. 그리고 박배일은 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밀양 주민들의 투쟁과 생탁 노동자들의 투쟁을 각각 담은 '밀양 아리랑'(2014)과 '깨어난 침묵'(2016)을 차례로 극장에 올렸으며, 오민욱은 미군부대가 철거된 후 범전동의 재개발 풍경을 담은 '범전'(2015)으로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되었다.
부산지역 다큐멘터리 감독들
소외에 대한 따뜻한 시선 바탕
장족의 성취로 전국적 주목
오늘 개봉 '그림자들의 섬'
익숙한 선동적 노동영화 탈피
미시적 개인사로 노동사 엮어
지역을 넘어 한국독립영화계에 적지 않은 긴장을 안긴 그들의 영화는 범주화되지 않는 제각각의 개성으로 이채를 띤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그것을 카메라에 담는 스타일도 어느 하나 겹침이 없는 그들에게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중심에서 밀려난 공간과 소외된 사람들에 시선을 두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의외의 일은 아니다. 전통적으로 한국다큐멘터리의 계보에는 비주류의 피가 흐르고 있다.
그 점에서는 김정근도 다르지 않다. 그의 관심은 줄곧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에게 가 있다. 희망버스를 담은 '버스를 타라'(2012)가 다소 성긴 르포르타주였다면, 5년의 시간을 들인 '그림자들의 섬'(2014)에 이르러 그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로 기록될 만한 것을 내놓은 것이다. 2014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후에도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그 영화가 오늘, 25일 개봉한다. 감독의 기대 관객 수는 '부산행'의 1000분의 1(1만 명)이라지만, 그보다 열 배는 더 들어야 마땅한 영화라고 믿는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라고? 그렇다! 노동영화다. 노동영화라 하면 1980~90년대 운동권 영화, 혹은 불온한 세력들의 과격한 파업 시위 장면만을 떠올리는 이들에게 '그림자들의 섬'은 어쩌면 덜 흥미로울지도 모른다. 목숨 걸고 투쟁하던 시대는 지났다고 말할 이들도 있을 듯하다.
불행히도 그런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그 옛날 프로파간다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노동의 가치를 일깨우며 그들간 따뜻한 연대의식이 되살아나길 희망한다. 김정근은 선동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감상적인 태도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카메라 앞에 앉은 다섯 노동자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하여 30여 년에 걸친 그들의 개인사가 한국의 노동운동사가 되고 곧 한국현대사가 되는 순간이 온다. 산업화 과정의 빛나는 주역이면서도 실제로는 그림자 속에 남겨진 그들. 그들의 쓰라린 삶의 순간들이 모여 역사가 되었다. 노동자들의 위대한 역사가.
영화는 1987년 이전 '노예의 역사'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김진숙 지도위원의 말로 끝을 맺는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문제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조선소 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예고되는 지금, 이 영화의 시의성을 감독인들 행운이라 여길까. 적어도 내게 이 영화는 우리처럼 평범하고 우리보다 숭고한, 그 노동자들의 얼굴로 오래 기억될 듯하다.
강소원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