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주의 맛있는 인터뷰] 일본군 위안부 대모 김문숙‘민족과 여성 역사관’ 관장
“위안부 문제 근본 해결책은 일본의 진정한 사과지 돈이 아냐”
김문숙 ‘민족과 역사 박물관’ 관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근본 해결책은 돈이 아니라, 아베 총리가 피해 할머니들 앞에 고개 숙이고 사과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강원태 선임기자 wkang@
김문숙(92) ‘민족과 여성 역사관’ 관장은 지난해 개봉한 영화 ‘허스토리’의 실존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허스토리’는 1992~1998년 대한해협을 오가며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과 일본 정부의 사죄를 요구하며 가열찬 법정 싸움을 벌인 ‘관부재판’에 관한 얘기이다. 이 재판을 진두지휘한 이가 바로 김 관장이다. 그는 ㈔ 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부산 정대협) 이사장이기도 하다.
광복절은 어김없이 다가오지만, 김 관장에게 진정한 광복은 여전히 요원하다. 평생 받아내기 위해 힘써 온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가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올해는 일본의 경제 도발로 한·일 관계가 냉각되면서 위안부 문제 해결이 더욱 멀어진 듯해 마음이 무겁다.
광복절 전날인 14일은 정부가 정한 ‘위안부 기림의 날’.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매일 출근해 자리를 지키고 있는 김 관장을 부산 수영구 연수로 397 역사관에서 만났다.
"월~금요일 매일 역사관에 출근
찾아오는 학생 있는 한 자리 못 비워
100% 사비 출연해 건립… 운영 어려움
위안부 역사관 중 자료 가장 많아
영화 ‘허스토리’ 문회장 실제모델
6년 투쟁으로 ‘관부재판’ 1심 승소
최근 경제도발, 아베가 한국 얕보는 것
다신 지배 받아선 안돼… 역사 배우길"
-건강은 어떤가?
“이 나이에 건강이라고 할 게 있나. 정신력으로 견디는 거지.”
함께 일하는 직원의 표현에 따르면 김 관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날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올 들어 신장이 나빠지면서 병원 치료를 받고 있고 기력도 떨어졌다고. 하지만 악수하면서 잡은 손아귀는 여전히 야무졌다.
‘민족과 여성 역사관’ 내부 모습
-역사관에 매일 나오나?
“그렇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8시 30분~9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 30분~6시에 퇴근해. 찾아오는 학생들이 있으니까, 하루라도 빠질 수가 없어. 토·일요일에도 누군가가 온다고 하면 나와 있어.”
김 관장은 기장군 정관에 살고 있다. 정관에서 수영까지 버스를 타면 1시간 이상이 걸린다. 더욱이 그 나이에 서서 오는 건 어려운 일. “정관 쪽 아이들은 자리를 절대 양보하지 않아. 잠자는 척하고. 걔들도 몸이 힘든 탓이겠지.” 그래서 김 관장은 요즘 콜택시를 타고 출퇴근을 한다고 했다.
-주로 어떤 사람들이 방문하나?
“거의 매일 누군가가 오긴 오지. 일반인들은 여성단체 회원들이 많고, 그 외엔 학생들이 많이 찾는다. 양심적인 일본인들도 종종 오고, ‘허스토리’ 개봉 후에는 유럽 사람들도 왔어.”
국내의 위안부 관련 역사관은 ‘민족과 여성’을 비롯해 경기도 광주, 서울 마포, 대구 중구 등 너덧 군데가 있는데 ‘민족과 여성’처럼 순수하게 개인이 출연해 건립한 경우는 없다. 이 때문에 ‘민족과 여성 역사관’을 운영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김 관장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애국심을 기르기 위해 내 개인 돈으로 설립했지만, 운영상의 어려움은 적지 않다”고 말했다. 역시 제일 큰 애로는 돈이다. 올해 처음으로 부산시에서 4300만 원의 보조금이 나왔지만 용도가 한정돼 있어 한계가 있다. 결국 김 관장의 사비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위안부 역사관 중에서 가장 자료가 풍부하고 내실이 있다는 게 김 관장의 자부심이다.
‘관부재판’을 다룬 영화 ‘허스토리’ 포스터.
-영화 ‘허스토리’ 얘기를 좀 해 보자. 영화가 현실을 충분히 반영했다고 생각하나?
“대부분 사실이다. 감독이 찾아와 관련 자료를 다 파악하고 가서 만들었으니까….”
‘허스토리’는 소위 ‘관부재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위안부의 존재를 알게 된 김 관장(당시 정대협 회장)은 10명의 원고단(위안부·근로정신대 피해자들)을 꾸려 1992년 12월 25일 시모노세키 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소송 정식 명칭은 ‘부산 종군위안부, 근로정신대 공식 사죄 등 청구 사건’. 일본의 양심 있는 변호사와 재일동포 변호사 등이 무료 변론을 해 줬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로 여겨졌던 소송은 대한해협을 23번이나 건너는 6년간의 투쟁 끝에 기적 같은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부분 승소일 뿐이었다. 위안부 피해자 3명에게 각 30만 엔(약 300만 원) 지급이 고작이었다.
-영화에 보면 박두리 할머니가 판사에게 욕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그랬나?
“내가 판사와 할머니들 사이에서 통역을 했으니까, 실제로 그랬어. 박 할머니는 이렇게 외쳤어. ‘다 필요없다. 너희들 다 처먹어라. 사람새끼라야 사람 말을 알아듣지.’ 강단이 대단한 할매였어.”
1차 소송이 끝나자 일본 정부는 발칵 뒤집혔다. 1심 재판부는 경질됐고, 일본 정부는 항소했다. 결국 2심에선 위안부 할머니들이 패소했다. 대법원 판결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상영 후 위안부에 대한 시민의 인식이 달라지지 않았나?
“그렇지. 그 전까지는 우리가 소송을 하든 말든 정부나 시민들이 별 관심을 안 가졌어. 왜놈들이 말하듯이 어린 소녀들이 자진해 몸 팔러 갔다는 정도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영화 한 편이 많은 변화를 가져왔어.”
부산 학생교육문화회관 광장의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서 꽃목걸이를 걸어주는 김 관장.
-영화 속 문정숙 회장의 실제 모델인데, 어떻게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나?
“오래전부터 여성운동을 쭉 해 왔어. 그런데도 위안부가 있는지조차 몰랐지. 1991년 8월 14일 고 김학순 할머니의 용감한 증언 이후 내가 몸담고 있던 부산여성경제인연합회가 ’정신대 신고 전화‘를 개설했어. 그 뒤로 위안부 신고가 폭주한 거야. 신고한 할머니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 간난신고의 얘기를 들어 보니 너무도 억울하고 가슴 아픈 거야. 가슴에 진 엉어리를 풀어드리고 싶어 소송을 하기로 결심한 거지.”
20여 년 동안 여행사를 운영하며 제법 큰돈을 모은 김 관장은 그 뒤로 생업을 접고 위안부의 대모로 변신했다. 현재 3000회가 넘은 ‘수요집회’도 김 관장과 그의 선배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가 주동이 돼 시작한 이벤트였다.
-며칠 전 또 한 명의 위안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등록한 250명 중 이제 20명만 남았어. 부음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져. 불쌍하고 억울해서. 아베 정부는 할머니들이 빨리 다 돌아가시기만 기다리고 있어.”
-박근혜정부 당시 한·일 정부의 위안부 합의안이 문재인정부 들어 파기됐는데, 해결책은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는 처음부터 일본의 돈을 받지 말라고 했어. 돈 몇 푼 던져주고 서울 일본 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을 철거하라고 했잖아. 우리가 바라는 것는 돈이 아니라, 진정한 사과야. 이제 몇 명 남지 않은 할머니들 앞에서 머리를 숙이고 사과하라는 거지. 형식적인 사과라도 하란 말이다.”
-최근 일본의 경제 도발로 촉발된 한·일 갈등이 증폭 일로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아베가 문제야. 그 자는 극우 중의 극우야. 군국주의를 꿈꾸는 정치인이다. 역대 우리 정부가 일본에게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바람에 아베가 우리 정부를 깔보고 그러는 거잖아. 일본이 우리에게 배상해야 할 게 한두 가지인가. 그걸 통째로 깔아뭉개겠다는 속셈이 아니겠나. 결국 우리가 힘을 키워야지 뭐. 그런데 현명한 지도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 것 같아 걱정이야.”
그러면서 김 관장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즉, 아베가 나쁜 사람이지 일본인 전체가 그런 건 아니라는 것이다. 일본인 중에서도 아베를 욕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 그래서 그는 아베 정부에 대한 대처와 일본 국민에 대한 대응이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향후 바람은 뭔가?
“내 돈으로 역사관을 운영한 지도 15년이 됐는데, 가끔 생각해 보면 서글플 때가 있어. 그냥 그 돈으로 즐기면서 살았으면 삶이 좀 달라졌겠지. 그래도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해. 누군가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역사를 알아야 애국자가 되고, 애국자가 많아져야 나라가 강해져. 다시는 식민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잖아.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너무 몰라.”
김 관장은 마지막으로 쓴소리를 한마디 해야겠다고 했다. “부산 여성들 좀 달라져야 해. 내가 이런 소리 하면 ‘저 늙은이 바보야. 돈 있으면 편하게 살면 되지, 왜 저렇게 사서 고생하나’라고 멸시할지도 몰라.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부산 여성들은 노는 것을 너무 좋아해. 내 아이들만 너무 끼고돌지 말고, 제발 애국하고 아이들에게도 애국을 좀 가르쳐 줬으면 해.”
윤현주 선임기자 hohoy@busan.com
부산 주식회사 여사장 1호… “여성 깨어나야 나라가 산다”
김문숙 관장은 경북 영천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2남 3녀 중 장녀인 김 관장은 지리 교사로 재직 중 결혼하면서 전업 주부가 됐다.
그러나 그는 타고난 활동가였다. 5남매를 키우는 중에 국가에서 실시한 일본어 시험에 응시, 200여 명 중 1등을 하면서 여행업에 뛰어들었다.
38살에 ㈜아리랑관광여행사를 차린 그는 뛰어난 사업수완을 발휘해 제법 큰돈을 모았다. 그는 부산에서 주식회사로는 제1호 여사장이었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부산여성경영자협회를 창립하는 등 여성 경영자 지위 향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1990년대 초 알게 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는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그 이후 그는 위안부 문제에 천착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와 동시에 성폭력상담소를 설치하고 부산여성연대회의 회장을 맡는 등 여성운동에도 깊이 간여해 왔다. 여성이 깨어나야 나라가 산다는 게 그의 평생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