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Name)
e-메일(E-mail)
이름(Name)
e-메일(E-mail)
이름(Name)
e-메일(E-mail)
막내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친한 학부모들과 아이들을 데리고 충남 부여로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백제 유적지를 둘러본 뒤 자연스럽게 발길은 백제금동대향로가 있는 국립부여박물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하필 우리가 찾은 날, 금동대향로는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에 가 있었다. 전시장에는 정교한 복제품이 놓여 있었지만 진품의 울림까지 대신할 순 없었다. 기대에 부풀었던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표정에 실망감이 묻어났다. 우리는 복제품으로 아쉬움을 달랜 채 전시장을 나왔지만, 그날의 허전함은 오래도록 미련처럼 남았다.
당시 백제금동대향로의 관리권과 소유권은 국립부여박물관에 있었고, 국립중앙박물관에는 특별전을 위해 잠시 대여된 상태였다. 지금도 그 관리권과 소유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부여 주민들은 외부에서 빌려 가지 않는 한 언제든 금동대향로를 직접 볼 수 있다. 그러나 부산 연고 주요 유물들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부산은 조선 침략의 첫 관문이었다. 왜군이 부산 앞바다를 뒤덮자 부산진의 정발 장군, 다대포의 윤흥신 첨사, 동래성의 송상현 부사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압도적인 병력 차이 속에서도 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그들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부산 시민의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그 역사를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유산이 1760년 동래부 화원 변박이 그린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다.
그림에는 무너지는 성곽 아래서 왜군과 결전을 벌이는 조선군의 처절한 항전이 담겨 있다. 특히 동래성 전투에서는 백성들마저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왓장을 던지며 왜적에 맞섰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민관군이 한 몸처럼 싸운 사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부산이라는 도시가 어떤 정신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 같은 그림이다. 그러나 정작 부산의 정체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이 그림들은 지금 부산에 없다. 이들 순절도는 1963년까지 부산 안락서원에 봉안돼 지역민들에게 선열들의 충절을 일깨워 왔다. 하지만 이후 육군박물관으로 이관된 뒤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안락서원 등에서 수차례 반환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도시의 기억이 외부에 맡겨진 셈이다.
문제는 이런 현실이 두 점의 그림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복천동 출토 금동관과 철제 갑옷, 말머리 장식 뿔잔, 동삼동패총의 얼굴 모양 조개 등 부산의 대표 유물 상당수가 현재 국립김해박물관이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과거 중앙집중적 문화재 관리 체계의 결과다. 2005년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 개정으로 지방자치단체에 관리 권한이 일부 위임됐음에도 주요 유물들은 여전히 국립박물관에 장기 대여된 상태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부산 가덕도 장항유적 출토 유물처럼 말이다. 물론 과거에는 국가 차원의 보존과 관리라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역 박물관들도 충분한 시설과 전문 인력, 보존 역량을 갖췄다. 그럼에도 부산 연고 유물들은 여전히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지역의 한 문화 관계자는 “복제품 전시에 의존하게 되면, 지역 박물관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결국 시민의 문화 향유권까지 약화시킨다”고 지적했다.
문화유산은 제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살아 숨 쉰다. 서울의 전시실에서 동래부순절도와 부산진순절도는 수많은 전쟁사 유물 가운데 하나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부산 충렬사나 부산박물관에 놓이는 순간, 그것은 시민의 삶과 기억 속에서 살아 있는 역사로 되살아난다. 이것이 바로 문화유산이 지닌 ‘장소성의 힘’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지방시대’를 국가적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 중앙 부처도 지방으로 오는 시대다. 진정한 지방시대는 단순히 예산과 권한을 나누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각 지역이 스스로의 역사와 정체성을 되찾고, 시민들이 자기 고장의 문화와 역사에 자부심을 가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을 강조하면서도 정작 지역의 정신과 정체성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 중앙에 머무는 현실은 모순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접근 방식이라도 달라져야 한다. 적어도 지역 연고 유산을 일정 기간 해당 지역 박물관에서 상설 전시하도록 하는 ‘지역유산 전시 쿼터제’ 도입이라든지, 장기 대여를 활성화해 시민들이 자기 지역의 유산을 일상에서 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592년 음력 4월 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한 날이다. 이를 오늘의 양력으로 환산하면 5월 23일이다. 내일이 바로 그날이다. 430여 년 전 부산의 성곽 위에서 끝까지 싸웠던 이들의 정신을 기억한다면, 이제는 그 역사를 부산 시민 곁으로 오롯이 돌려놓아야 한다. 이는 부산이란 도시의 역사적 존엄을 회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