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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 없는 사회>는 지위를 얻기 위해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사라진 현실을 분석한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존중 없는 사회>는 지위를 얻기 위해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사라진 현실을 분석한다. 클립아트코리아 제공
드라마 '더 글로리'는 존중은 없고 무시와 괴롭힘만 있는 인간 관계를 보여줬다. 넷플릭스 코리아 제공
존중 없는 사회/한병철
현대인은 SNS와 핸드폰으로 끊임없이 소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갈수록 쓸쓸하고 외톨이가 되고 있다. 삶의 방향도 상실하며 지위 불안과 자책에 시달리고 있다. ‘자기실현’이라는 착각 아래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하며 지위를 얻기 위해 타인에게 혐오의 말을 내뱉는다. ‘인간에 대한 예의’조차 사라진 시대, 정상으로 돌아갈 희망은 있을까.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교수를 지냈고, 한국인으로 드물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저자 한병철. 그는 오늘의 사회와 대중의 삶과 함께 호흡하며 관찰하고, 거기에 숨어 있는 이면을 탐사하고 폭로하는 것이 철학자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펴낸 <피로사회>가 독일을 비롯해 유럽과 한국에서 화제가 됐고, 이번에는 우리는 왜 갈수록 외톨이가 되는지, 사회는 왜 더 극단으로 치닫는지 분석했다.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에서 인간의 존엄은 인간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개인이 이룬 성과와 돈, 지위 등 소유의 대가로 평가받는다. 내가 존중받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내 능력과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존중과 지위를 얻기 위해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공동체 유대와 타인에 대한 배려는 없다.
오늘날 우리는 더 냉랭하게, 더 배려심 없이, 더 방자하게 서로를 대한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최대한의 상처 주기와 모욕이 행해진다. 소셜미디어는 방자한 행동을 포상하고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많은 이목을 끈다. 투박하고 거친 감정이 의사소통을 지배한다. 디지털로 인해 더 빨라진 의사소통은 서로를 이해할 시간도, 거리 두기도 허용하지 않는다.
효율과 기능에만 몰두하는 현대사회는 존중의 바탕이 되는 ‘사려 깊음’을 상실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은 즉시 ‘적’으로 간주하며 민주적인 대화, 타협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하이데거, 한나 이렌트 등 학자들은 ‘참된 우정’은 친구를 나의 분신이 아닌 독립된 다른 사람으로 인정하고 거리를 두며 경청하는 관계라고 강조했다. 존중을 하려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말살하려는 극단적인 대립을 멈추어야 한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배려가 회복되어야 한다.
저자는 서로 소통하던 공론장의 퇴락이 존중이 사라진 원인으로 지적한다. 18세기 공론장은 개인의 사적 감정이나 내면을 드러내지 않고, 정형화된 역할, 가면을 통해 자기를 연출하던 극장이라고 표현한다. 연극과 극장은 상대를 속이기 위한 위선이 아니라 서로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안전장치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규칙, 가면, 거리를 위선으로 여기고, 사적 감정과 내밀함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진정성으로 보기 시작했다. 물론 솔직함은 미덕이 될 수 있지만, 2026년 우리 사회는 잘못된 진정성을 숭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내면의 사적인 감정과 분노를 그대로 표출하며 혐오와 몰염치가 난무한다. 디지털 공간은 상대를 나와 똑같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닌 화면 속 유령 혹은 데이터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니 타인에 대한 최소의 배려가 사라지고, 익명성 뒤에 숨어 좌표를 찍어 욕설을 퍼붓게 됐다.
지식과 통찰의 아우라를 지닌 스승이 사라진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토로한다. 스승의 지위는 인공지능이 차지하지 않겠느냐라는 전망도 내놓는다. 인공지능은 통찰력의 아우라가 전혀 없는 거대한 계산 기계에 불과하며, 아무런 존중의 감정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이다. 인공지능이 우리를 과거의 스승처럼 강한 힘으로 인도하고 보호하고 가르칠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제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존중 없는 시대의 모습과 원인을 탐사한다. 그렇다고 구체적인 결론이나 대안을 독자에게 제시하려 하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며 독자의 사유를 끌어낸다. 많은 인문, 철학 서적이 문제를 제시하고 원인을 분석한 후 꼭 결론과 대안까지 넣어야 한다는 ‘집착’이 있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관점, 태도는 자유롭다.
물론 저자는 독자가 해답을 찾아갈 수 있도록 실마리는 제공한다. 전작 <피로사회>와 신작 <존중 없는 사회>의 연결고리이자 책에서 많이 언급한 ‘존중’에서 출발하라고 말한다. 한병철 지음/정창호 옮김/간디서원/192쪽/1만 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