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신춘문예-단편소설] 맹순이 바당/임성용
지코촌은 뒤로는 산, 앞으로는 바다밖에 없다. 왜정 때 파놓은 방공호를 어부들이 창고(じょうこ:지요우코)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전쟁 통에 온갖 종류의 부랑자들이 모여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게 되어 촌이 되었다. 항구에서 코끼리 언덕을 향해 집들이 늘어서 있다. 왜정 시절부터 덧 지어진 적산가옥들은 모두가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 같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언젠가 불이 나서 동네 반이 불탔고, 태풍에 파도가 넘어와 또 동네 반이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집은 다시 지어지고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마을 입구에는 작부들이 장사를 하고 2층에서 살림을 살았다. 손님은 뜨내기 선원이거나 어부, 피난살이가 서러운 취객들이다. 자주 싸움이 일어나고 가끔 사람이 죽었다. 작부거리를 지나면 두부 가게와 식재를 파는 집이 몇 있고, 그 뒤에는 모두가 고만고만한 가난뱅이들이 판잣집을 짓고 산다. 그중에서도 코끼리 절벽에 가까운 집일수록 더 가난하다. 절벽 끝에 이르면 왜놈들이 포를 숨겨놓았던 굴이 있는데, 그 굴에는 맹순이와 선녀가 산다.
*
선녀는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바람이 터졌나? 끝자락이긴 하지만 아직 가을인데 굴 안으로 찬 기운이 파고들었다. 어멍은 벌써부터 아침 물질을 갔다. 이불 밖을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배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아침에 먹을 고구마는 어제 저녁에 먹어치워서 진작 보리방귀처럼 사라졌다. 일어나서 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잿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어젯밤 미역바위 근처서 굿을 했으니 뭔가 먹을 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마침 어멍도 물질 끝나면 그쪽으로 나올 테니 없어도 그만이다. 선녀는 물을 한 바가지 꿀꺽꿀꺽 마시고 굴을 나섰다. 바닷가로 내려오니 코끼리 언덕 덕분에 바람이 잠잠했다. 선녀는 미역바위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남은 거라고는 타다 남은 초와 검게 거슬린 몽돌무지 밖에 없었다. 마른 입맛을 다시다가 선녀는 불턱으로 향했다. 물질 전에 어멍이 피워놓은 불이 불씨만 남아있었다. 잔가지를 꺾어 넣고 불을 살렸다. 멀리서 휘이~ 하고 어멍의 숨비소리가 들렸다. 해안가를 따라 눈으로 살피니 멀리 코끼리 바위 아래쪽에 태왁이 떠 있었다. 어멍이 나오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될 것이다. 선녀도 내년이면 열셋이니 어멍 따라 물질을 시작해야 한다. 막막하기는 하지만 닥치고 나서 고민할 일이다. 지금은 배가 고프다. 자자. 자면 배도 덜 고프다. 선녀는 눈을 감았다. 좌르륵 좌르륵 파도에 휩쓸리는 몽돌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고 있는데 돌 밟히는 발소리가 났다. 선녀는 눈을 뜨고 발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고개를 들어 빠끔히 불턱 밖을 내다보자 덕수가 미역바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점퍼 앞을 잔뜩 여미고 오는 꼴로 봐서 미제할매 장롱에서 뭔가 훔쳐온 게 분명했다. 선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덕수는 선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미역바위 아래 있는 작은 그늘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할매가 빨래 너는 틈을 노려 꺼내 온 양키소시지를 하나 까서 베어 물었다. 가지만 한 고깃덩어리를 씹자 짭조름한 기름기가 입안 가득 퍼지며 웃음이 나왔다. 누가 어깨를 툭 쳐서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선녀가 서 있었다. 보나 마나 물질 나간 맹순이를 마중 나왔을 것이었다. 선녀는 덕수보다 두 살 위였지만 학교를 가지 않았다. 부산 말과 제주도 말을 섞어 쓰고, 약아빠지기로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었다.
"머꼬!"
덕수는 품속에 남은 소시지를 의식하며 선녀를 쏘아보았다.
"니, 이 씨가 빨갱이 장교인 거 아나?"
선녀는 툭 하니 말을 뱉어놓고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덕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씨는 일 년 열두 달 낡은 군 야상에 워커를 신고 다리를 절며 다녔다. 언제나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누구 집 똥을 푸거나 잔칫집 돼지를 잡거나 누구 집 지붕을 고쳤다. 동네의 허드렛일은 이 씨가 도맡아 했다. 일이 없을 땐 낡은 리어카를 끌고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게다가 이 씨는 벙어리였다. 동네 각다귀들이 따라다니며 벙어리라 노래를 불러도 짜증 한 번 낸 적 없다. 그런 이 씨가 빨갱이 장교라니. 이 얍삽한 가시나가 양키소시지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빨갱이라는 말이 주는 두려움과 혹시 이 씨가 위장간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덕수는 얼어붙고 말았다. 끌고 다니는 고물 리어카에서 무전기 같은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이거는 비밀인데…."
선녀는 이야기를 끊고 덕수 손에 들려진 소시지를 쳐다보았다. 덕수는 반을 잘라 내밀었다.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선녀가 손가락을 빨며 말했다.
"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믄 안 된다. 알안?(알겠어?)"
덕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녀가 말을 이었다.
"이 씨 벙어리 아니다. 내 접때 이 씨가 술 마이 묵고 울 어멍한테 이야기하는 거 다 들었다. 전쟁 때 폭격 맞앙 다리 빙신 돼서 도망도 못 가고 산에 숨어 살았댄(살았다고) 하더라. 전쟁 끝나고 우리 동네로 슬그머니 들왔다 하데. 그때부터 벙어리 행세 했다 안헴나(했다고 하더라). 입 열믄 빨갱이 냄새 새 나간다꼬."
이야기를 멈춘 선녀가 덕수를 노려보았다.
"니, 양키 더 이서(있어)?"
덕수가 눈치를 보다가 품에서 남은 하나를 꺼냈다. 또 반을 잘라 건넸다. 선녀는 이번에는 천천히 아껴 씹으면서 말했다.
"빨갱이 장교들은 넘한테 피해 주면 안 된다고, 그리 교육받는다 카데. 전쟁 때도 빨갱이들은 양반이었다 카더라. 양석도 소도 값 딱 치렁(치르고) 가주 가고."
선녀가 손가락에 묻은 기름까지 핥으며 뒷맛을 다시고 있을 때, 멀리 맹순이가 망사리를 둘러메고 물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갈 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획 돌려 본 선녀가 덕수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니, 이거 절대 말하믄 안 된다. 알안? 니, 말하면 양키 훔친 거 다 일라 줄끼다! 그라고,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끼다. 니만 혼나고."
맞는 말이었다. 동네사람들은 이도 없이 맨날 헤헤 웃고 다니는 이 씨를 빨갱이라고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선녀는 덕수를 향해 한 번씩 웃고는 휭하니 제 어멍에게로 달려갔다.
맹순은 기진한 몸을 끌고 뭍으로 올랐다. 사리물 때라 물살이 너무 빠르고 물속도 어두웠다. 망사리를 반도 못 채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뭍으로 나오자마자 지긋지긋한 두통이 찾아왔다. 날카로운 신경 너머로 돌 밟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선녀가 미역바위 쪽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배가 고파 못 참고 제수 음식이라도 주워 먹으러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전쟁 통에 죽은 아귀가 붙었는지 먹성이 유별났다. 맹순은 두붓집하고 대폿집에 들러 잡은 걸 보리쌀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다가온 선녀가 망사리를 뺏어 들었다.
"어멍, 오늘 별거 어싱게?(없어?)"
"거 시끄럽게, 어영 불턱 강 불이나 살리라게.(어서 불턱가서 불이나 피워.)"
맹순은 빗창을 망사리에 담으며 자잘하게 역정을 냈다. 선녀는 입을 비죽 내밀고 앞장서서 걸었다. 하늘이 더 낮게 내려온다 싶더니 희뜩 하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눈을 타고 지긋지긋하게 맹순을 따라다니는 두통과 함께 그 날이 머리 위로 내려왔다.
*
낮부터 눈이 내리더니 밤에는 얼추 한 뼘이나 쌓였다. 닳아빠진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던 몽돌은 다랑쉬골 끄실이 집 사랑을 떠올렸다. 올 봄 만세절 기념식 날 읍내에서 난리가 나서 사람이 여럿 죽었다. 그 후로 흉한 소문이 하루걸러 들려왔다. 몽돌은 그때부터 밤마실을 끊었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났지만 오늘도 끄실이네 사랑에서는 투전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끄실이 놈이 빌려 간 오십 원도 되받아야 하고, 마누라밖에 모르는 꽁생원이라 입방아를 찧어 댈 놈들을 생각하면 한 번은 가야 하는데, '되웁소, 것핏하면(걸핏하면) 사람 죽는 소문이 뒤숭한데 어디 밤마실을 납수꽈(갑니까).' 밤마실을 간다하면 마누라 끝분이 그 큰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리 말할 것이 틀림없었다. 제풀에 뭣해진 몽돌은 대빗자루를 던져 버리고 궐련을 말아 물었다. 엄동을 재촉하는 눈은 하염없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마당 끝 두엄 위로 둥그마니 쌓인 눈을 보니 끝분의 실팍한 젖가슴 같다.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하였다. 몽돌은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있는 끝분을 향해 큼큼하고 소리를 내었다.
끝분은 그 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둘러 저녁상을 차렸다. 시집온 지 한 해가 넘었는데 태기가 없었다. 이름 따라 둥글둥글한 몽돌은 별 표를 내지 않았지만 끝분은 죄스러운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생각 끝에 사흘 전부터 감나무 밑에 정화수를 떠놓고 물할망께 아침저녁으로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요즈음은 투전판에도 발길을 끊어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집 마음도 알아주니 끝분은 더 흐뭇하였다. 아침 물질 때 잡은 전복도 한 마리 구수하게 굽고, 낮에 받아 놓은 막걸리도 한 사발 밥상에 올렸다. 상을 물린 끝분은 몽돌이 궐련을 말아 피우는 동안 이부자리를 펴고 호롱불을 껐다. 호롱을 껐는데도 달빛 먹은 눈이 문종이를 뚫고 들어 방안이 환했다. 끝분의 저고리를 풀자 두엄 위에 쌓인 눈처럼 보름달이 둥그렇게 떴다.
"허, 각시 젖은 언제 봐도 허영한 둠비(하얀 두부) 같앙."
끝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집오기 전에 어멍이 한 말이 떠올랐다. '넌 나 달망 젖도 많이 나고 해서 서방도 조앙 할꺼라.' 몽돌의 숨소리가 커지며 끝분의 두둑한 가슴팍을 움켜쥐었을 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싶다가 난데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엉겁결에 몽돌을 밀쳐내고 앞섶을 여미던 끝분은 자신의 맨살을 훑고 지나가는 그림자에 소름이 돋았다. 문 앞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둘 서 있었다. 몽돌도 얼결에 바지를 추스르며 말했다.
"뭐, 뭡수까."
"이 빨갱이 새끼. 초저녁부터 오입질이야!"
신도 벗지 않고 내처 들어온 그림자가 몽돌을 내리쳤다. 몽돌은 '억'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몇 번 더 발길질이 오갔다. 끝분이 고함을 지르며 말리려 들자 끝분의 배에도 발길질이 들어왔다.
"입 닥쳐 이 빨갱이 여편네야."
끝분은 그대로 꼬꾸라져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새벽에 샘에서 상할망이 한 말을 떠올렸다.
"요새 다랑쉬골 젊은 놈 몇이 육지사람 몇하고 청년단인가 먼가 한단다. 군인들 등에 업고 빨갱이 소탕작전인가 한댕 하멍 밤이영 낮이영 가리지도 않고, 맘 안드는 집들 몬딱(모조리) 들쑤시고. 쯧쯧, 왜정 때부터 노름질에 한량 짓이나 하던 놈들이, 그런 놈들이 뭘 소탕한뎅 말고. 똥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란뎅 하더니, 그 꼴 아님시냐?(아니냐?)"
"아이고, 할망 말조심합서. 이러다 난리 나쿠다.(납니다.) 며칠 전에 다랑쉬굴서 수도 없이 사람 죽었덴 안 합니까게."
옆에 있던 점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할망을 말렸다.
끝분은 한참 만에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몽돌은 손발이 묶여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었다. 깨진 정수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몽돌의 눈에서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기, 뭘 잘못알앙 와수다.(잘못알고 왔습니다.) 저흰 빨갱이 아니마심.(아닙니다.) 무슨 오해가 이성 이렇게 된 거 같수다게,"(같습니다.)
미처 말을 다 잇기 전에 끝분의 눈앞이 번쩍했다.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오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냥 울음이 아니라 입을 닫고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몽돌이었다. 정신이 돌아올수록 그 소리는 몽돌이 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서 몽돌에게 가야겠다고 눈을 뜨자 눈앞에 웬 낮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들썩이며 번들거리는 눈빛을 올려다보며 끝분은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라도 이런 지독한 꿈은 빨리 벗어나고 싶어 고함을 치고 거부하려해도 소용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팔 다리가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꿈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끝났다 싶다가 다른 눈빛이 다시 번들거렸다. 몽돌한테 빨리 가야 하는데, 이 지독한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자 가슴께가 묵직했다. 풀어헤쳐진 옷자락 위로 이불과 시렁이 떨어져 얹혀있었다. 일어나 앉으려 힘을 주니 온 몸에서 바늘 같은 통증이 일었다. 어디가 성한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니 활짝 열린 방문 밖으로 하얗게 달을 품은 눈이 마당 가득 보였다. 그 위로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이 정낭(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끝분은 무거운 손을 들어 아랫도리를 만져 보았다. 손끝으로 쓰라린 통증과 엉긴 피가 느껴졌다. 악몽은 악몽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바당에 들어가야 하는데.' 끝분은 이런 순간에도 바다를 떠올렸다. 물질을 시작한 열셋 이후로 끝분에게 바다는 어망의 약손 같은 것이었다. 상할망이 가르쳐 준대로 물할망께 정성스레 빌고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하면, 날카롭게 머리를 쑤셔대던 두통도, 웬만한 몸살도 저절로 나았다.
끝분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터진 입술에 닿자 쓰라린 통증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떻게든 몽돌을 살려야했다. 옷매무새를 여몄다. 일어서니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뜨락을 내려서서 눈을 한 움큼 쥐어 얼굴에 비볐다. 푹신하고 차가운 온도가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끝분은 다시 눈을 한 움큼 쥐어 입 속으로 우겨 넣었다. 입을 앙 다물고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삼켰다. 다행히 삼키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달이 감나무 가지 끝에 걸린 걸 보니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끝분은 정낭 밖으로 난 발자국들을 따라 걸었다. 다리를 옮길 때마다 사타구니에 바늘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이를 악물고 걸었다. 발자국은 동네를 빠져나와 굼부리(화산 분화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굼부리로 오르는 초입부터는 여기저기서 내달아 온 발자국들이 여럿 엉켜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올랐을 때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끝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둘러 발자국을 따라 오르다가 우거진 산죽림을 헤치고 나서자마자 끝분은 주저앉고 말았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먹은 눈밭에 지슬(감자) 자루 마냥 주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앞에 한 여인이 숨죽여 울고 있었다. 끝분은 엉금엉금 눈밭을 기어 다니며 주검들을 뒤집어 보았다. 몽돌을 찾아야 하는데 몽돌이 여기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녁은 여기 어실거여.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네 번째 주검을 뒤집자, 검은빛으로 퉁퉁 부은 얼굴의 귀밑 사마귀 점이 눈에 들어왔다. 끝분은 숨이 막혔다.
"어, 어, 아, 어…"
정신이 없어 말을 더듬는 사이 누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상할망이었다. 할망이 끝분의 손을 잡자 그제야 눈물이 왈칵 나왔다.
"할망, 어 허 어어…"
"내 이럴 줄 알아서. 밤중 내내 삽작 밖이 소란스라방(소란스러워) 내다 봐신디(봤는데), 굼부리로 올라가는 뒷꼭지가 딱 분이 너랑 닮아서라. 아이고, 이게 무신 일이냐. 정신 채리라게(차려라). 지금 정신 안챙기면 너도 죽어, 알아 들엄서!"
상할망이 끝분의 뺨을 철썩 갈겼다. 끝분은 울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할망을 쳐다보았다.
"빨갱이 마누라로 몰리믄 너도 죽은 거(거야). 저 잡놈들이 살인귀가 씌엉 탐라 사람 모조리 빨갱이로 몰앙 죽일려는 건디, 정신 차령 내 말대로 해라. 그래야 산다, 내말 알아들어 지커냐!(알아 듣겠냐!)"
끝분은 온몸이 떨려왔다.
"너 혼저(빨리) 집에 강 중한 것만 챙겨 오라게, 용바위 알멘?(알지?) 그 밑에 굴에 꼼짝 말앙 숨어 이서. 해지고 우리 아방이 발동선 끌고 갈꺼니까. 그거 탕(타고) 육지로 가라."
부들부들 떨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끝분의 눈이 다시 몽돌에게로 옮겨갔다.
"저엉(저리) 두고 어떵 가랜…(어떻게 가라고…)"
"몽돌이는 내가 묻어 줄테니 걱정 말앙 가라게, 일단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안되커냐.(안되겠냐.) 어영 가!, 어영!"
끝분은 상할망의 채근에 정신이 차릴 틈도 없이 집으로 내달았다. 휘적휘적 집으로 들자 달이 감나무 가지에서 한참 갔다. 곧 날이 밝을 것이었다. 상할망의 말이 맞다. 일단은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끝분은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에 남은 숭늉을 모두 들이켰다. 살아야 하고, 살려면 먹어야 했다. 어제 잡아 놓은 전복 두 마리도 생으로 씹어 삼키면서 망사리(태왁에 달린 그물망)에 빗창(해녀들이 사용하는 갈고리 모양의 채집도구)과 물적삼(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입던 옷)을 말아 넣었다. '어딜 가든 바당만 있으면 살아진다.' 끝분은 왜정 때도 상할망을 따라 육지바다로 물질을 다녀본 경험이 있었다. 나이는 어려도 상군(해녀들 중에 잠수실력과 채집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 '상군, 중군, 하군, 똥군'으로 구분)이어서 상할망이 육지바다로 물질 갈 때면 끝분을 살뜰히 챙겨서 데리고 갔다. 방으로 들어가 먼저 장속에 숨겨놓은 지전을 찾아 버선 속에 찔러 넣었다. 보자기를 펴고 망시리와 옷가지들, 지슬(감자)과 쌀을 담아 꼭꼭 여며 묶었다. 밖을 보니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끝분은 보자기를 이고 발자국이 어지러운 정낭을 나섰다. 몽돌의 시커멓게 부어오른 얼굴이 떠올랐지만 입을 앙다물고 용바위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이어서 상할망이 육지바다로 물질 갈 때면 끝분을 살뜰히 챙겨서 데리고 갔다. 방으로 들어가 먼저 장속에 숨겨놓은 지전을 찾아 버선 속에 찔러 넣었다. 보자기를 펴고 망시리와 옷가지들, 지슬(감자)과 쌀을 담아 꼭꼭 여며 묶었다. 밖을 보니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끝분은 보자기를 이고 발자국이 어지러운 정낭을 나섰다. 몽돌의 시커멓게 부어오른 얼굴이 떠올랐지만 입을 앙다물고 용바위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