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신춘문예-단편소설] 맹순이 바당/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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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지코촌은 뒤로는 산, 앞으로는 바다밖에 없다. 왜정 때 파놓은 방공호를 어부들이 창고(じょうこ:지요우코)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전쟁 통에 온갖 종류의 부랑자들이 모여들어 판잣집을 짓고 살게 되어 촌이 되었다. 항구에서 코끼리 언덕을 향해 집들이 늘어서 있다. 왜정 시절부터 덧 지어진 적산가옥들은 모두가 다닥다닥 붙어있어서 어느 하나가 무너지면 다 같이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언젠가 불이 나서 동네 반이 불탔고, 태풍에 파도가 넘어와 또 동네 반이 사라지기도 했다. 하지만 집은 다시 지어지고 잃을 것 없는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마을 입구에는 작부들이 장사를 하고 2층에서 살림을 살았다. 손님은 뜨내기 선원이거나 어부, 피난살이가 서러운 취객들이다. 자주 싸움이 일어나고 가끔 사람이 죽었다. 작부거리를 지나면 두부 가게와 식재를 파는 집이 몇 있고, 그 뒤에는 모두가 고만고만한 가난뱅이들이 판잣집을 짓고 산다. 그중에서도 코끼리 절벽에 가까운 집일수록 더 가난하다. 절벽 끝에 이르면 왜놈들이 포를 숨겨놓았던 굴이 있는데, 그 굴에는 맹순이와 선녀가 산다.



*



선녀는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에 눈을 떴다. 바람이 터졌나? 끝자락이긴 하지만 아직 가을인데 굴 안으로 찬 기운이 파고들었다. 어멍은 벌써부터 아침 물질을 갔다. 이불 밖을 나서고 싶지 않았지만 배에서 천둥소리가 났다. 아침에 먹을 고구마는 어제 저녁에 먹어치워서 진작 보리방귀처럼 사라졌다. 일어나서 밖을 내다보니 하늘이 잿빛으로 내려앉아 있었다. 어젯밤 미역바위 근처서 굿을 했으니 뭔가 먹을 게 남아 있을 수도 있다. 마침 어멍도 물질 끝나면 그쪽으로 나올 테니 없어도 그만이다. 선녀는 물을 한 바가지 꿀꺽꿀꺽 마시고 굴을 나섰다. 바닷가로 내려오니 코끼리 언덕 덕분에 바람이 잠잠했다. 선녀는 미역바위 근처를 샅샅이 뒤졌지만 남은 거라고는 타다 남은 초와 검게 거슬린 몽돌무지 밖에 없었다. 마른 입맛을 다시다가 선녀는 불턱으로 향했다. 물질 전에 어멍이 피워놓은 불이 불씨만 남아있었다. 잔가지를 꺾어 넣고 불을 살렸다. 멀리서 휘이~ 하고 어멍의 숨비소리가 들렸다. 해안가를 따라 눈으로 살피니 멀리 코끼리 바위 아래쪽에 태왁이 떠 있었다. 어멍이 나오려면 한참은 더 있어야 될 것이다. 선녀도 내년이면 열셋이니 어멍 따라 물질을 시작해야 한다. 막막하기는 하지만 닥치고 나서 고민할 일이다. 지금은 배가 고프다. 자자. 자면 배도 덜 고프다. 선녀는 눈을 감았다. 좌르륵 좌르륵 파도에 휩쓸리는 몽돌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고 있는데 돌 밟히는 발소리가 났다. 선녀는 눈을 뜨고 발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기울였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고개를 들어 빠끔히 불턱 밖을 내다보자 덕수가 미역바위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점퍼 앞을 잔뜩 여미고 오는 꼴로 봐서 미제할매 장롱에서 뭔가 훔쳐온 게 분명했다. 선녀는 마른 침을 삼켰다.

덕수는 선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미역바위 아래 있는 작은 그늘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할매가 빨래 너는 틈을 노려 꺼내 온 양키소시지를 하나 까서 베어 물었다. 가지만 한 고깃덩어리를 씹자 짭조름한 기름기가 입안 가득 퍼지며 웃음이 나왔다. 누가 어깨를 툭 쳐서 놀란 눈으로 돌아보니 선녀가 서 있었다. 보나 마나 물질 나간 맹순이를 마중 나왔을 것이었다. 선녀는 덕수보다 두 살 위였지만 학교를 가지 않았다. 부산 말과 제주도 말을 섞어 쓰고, 약아빠지기로 아이들 사이에 소문이 나 있었다.

"머꼬!"

덕수는 품속에 남은 소시지를 의식하며 선녀를 쏘아보았다.

"니, 이 씨가 빨갱이 장교인 거 아나?"

선녀는 툭 하니 말을 뱉어놓고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덕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씨는 일 년 열두 달 낡은 군 야상에 워커를 신고 다리를 절며 다녔다. 언제나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누구 집 똥을 푸거나 잔칫집 돼지를 잡거나 누구 집 지붕을 고쳤다. 동네의 허드렛일은 이 씨가 도맡아 했다. 일이 없을 땐 낡은 리어카를 끌고 고물을 주우러 다녔다. 게다가 이 씨는 벙어리였다. 동네 각다귀들이 따라다니며 벙어리라 노래를 불러도 짜증 한 번 낸 적 없다. 그런 이 씨가 빨갱이 장교라니. 이 얍삽한 가시나가 양키소시지를 노리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빨갱이라는 말이 주는 두려움과 혹시 이 씨가 위장간첩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덕수는 얼어붙고 말았다. 끌고 다니는 고물 리어카에서 무전기 같은 걸 본 것 같기도 했다.

"이거는 비밀인데…."

선녀는 이야기를 끊고 덕수 손에 들려진 소시지를 쳐다보았다. 덕수는 반을 잘라 내밀었다.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선녀가 손가락을 빨며 말했다.

"니, 이거 아무한테도 말하믄 안 된다. 알안?(알겠어?)"

덕수가 고개를 끄덕이자 선녀가 말을 이었다.

"이 씨 벙어리 아니다. 내 접때 이 씨가 술 마이 묵고 울 어멍한테 이야기하는 거 다 들었다. 전쟁 때 폭격 맞앙 다리 빙신 돼서 도망도 못 가고 산에 숨어 살았댄(살았다고) 하더라. 전쟁 끝나고 우리 동네로 슬그머니 들왔다 하데. 그때부터 벙어리 행세 했다 안헴나(했다고 하더라). 입 열믄 빨갱이 냄새 새 나간다꼬."

이야기를 멈춘 선녀가 덕수를 노려보았다.

"니, 양키 더 이서(있어)?"

덕수가 눈치를 보다가 품에서 남은 하나를 꺼냈다. 또 반을 잘라 건넸다. 선녀는 이번에는 천천히 아껴 씹으면서 말했다.

"빨갱이 장교들은 넘한테 피해 주면 안 된다고, 그리 교육받는다 카데. 전쟁 때도 빨갱이들은 양반이었다 카더라. 양석도 소도 값 딱 치렁(치르고) 가주 가고."

선녀가 손가락에 묻은 기름까지 핥으며 뒷맛을 다시고 있을 때, 멀리 맹순이가 망사리를 둘러메고 물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자갈 밟히는 소리에 고개를 획 돌려 본 선녀가 덕수 쪽으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니, 이거 절대 말하믄 안 된다. 알안? 니, 말하면 양키 훔친 거 다 일라 줄끼다! 그라고, 말해도 사람들이 믿지도 않을 끼다. 니만 혼나고."

맞는 말이었다. 동네사람들은 이도 없이 맨날 헤헤 웃고 다니는 이 씨를 빨갱이라고 믿을 것 같지 않았다. 선녀는 덕수를 향해 한 번씩 웃고는 휭하니 제 어멍에게로 달려갔다.

맹순은 기진한 몸을 끌고 뭍으로 올랐다. 사리물 때라 물살이 너무 빠르고 물속도 어두웠다. 망사리를 반도 못 채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뭍으로 나오자마자 지긋지긋한 두통이 찾아왔다. 날카로운 신경 너머로 돌 밟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선녀가 미역바위 쪽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배가 고파 못 참고 제수 음식이라도 주워 먹으러 나왔을 것이 분명했다. 전쟁 통에 죽은 아귀가 붙었는지 먹성이 유별났다. 맹순은 두붓집하고 대폿집에 들러 잡은 걸 보리쌀로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벌써 다가온 선녀가 망사리를 뺏어 들었다.

"어멍, 오늘 별거 어싱게?(없어?)"

"거 시끄럽게, 어영 불턱 강 불이나 살리라게.(어서 불턱가서 불이나 피워.)"

맹순은 빗창을 망사리에 담으며 자잘하게 역정을 냈다. 선녀는 입을 비죽 내밀고 앞장서서 걸었다. 하늘이 더 낮게 내려온다 싶더니 희뜩 하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흩날리는 눈을 타고 지긋지긋하게 맹순을 따라다니는 두통과 함께 그 날이 머리 위로 내려왔다.



*



낮부터 눈이 내리더니 밤에는 얼추 한 뼘이나 쌓였다. 닳아빠진 대빗자루로 마당을 쓸던 몽돌은 다랑쉬골 끄실이 집 사랑을 떠올렸다. 올 봄 만세절 기념식 날 읍내에서 난리가 나서 사람이 여럿 죽었다. 그 후로 흉한 소문이 하루걸러 들려왔다. 몽돌은 그때부터 밤마실을 끊었다. 벌써 몇 달이나 지났지만 오늘도 끄실이네 사랑에서는 투전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끄실이 놈이 빌려 간 오십 원도 되받아야 하고, 마누라밖에 모르는 꽁생원이라 입방아를 찧어 댈 놈들을 생각하면 한 번은 가야 하는데, '되웁소, 것핏하면(걸핏하면) 사람 죽는 소문이 뒤숭한데 어디 밤마실을 납수꽈(갑니까).' 밤마실을 간다하면 마누라 끝분이 그 큰 눈망울을 데굴데굴 굴리며 이리 말할 것이 틀림없었다. 제풀에 뭣해진 몽돌은 대빗자루를 던져 버리고 궐련을 말아 물었다. 엄동을 재촉하는 눈은 하염없이 내려 쌓이고 있었다. 마당 끝 두엄 위로 둥그마니 쌓인 눈을 보니 끝분의 실팍한 젖가슴 같다. 아랫도리가 근질근질하였다. 몽돌은 부엌에서 저녁을 짓고 있는 끝분을 향해 큼큼하고 소리를 내었다.

끝분은 그 소리에 얼굴이 달아올랐다. 서둘러 저녁상을 차렸다. 시집온 지 한 해가 넘었는데 태기가 없었다. 이름 따라 둥글둥글한 몽돌은 별 표를 내지 않았지만 끝분은 죄스러운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생각 끝에 사흘 전부터 감나무 밑에 정화수를 떠놓고 물할망께 아침저녁으로 치성을 드리고 있었다. 요즈음은 투전판에도 발길을 끊어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계집 마음도 알아주니 끝분은 더 흐뭇하였다. 아침 물질 때 잡은 전복도 한 마리 구수하게 굽고, 낮에 받아 놓은 막걸리도 한 사발 밥상에 올렸다. 상을 물린 끝분은 몽돌이 궐련을 말아 피우는 동안 이부자리를 펴고 호롱불을 껐다. 호롱을 껐는데도 달빛 먹은 눈이 문종이를 뚫고 들어 방안이 환했다. 끝분의 저고리를 풀자 두엄 위에 쌓인 눈처럼 보름달이 둥그렇게 떴다.

"허, 각시 젖은 언제 봐도 허영한 둠비(하얀 두부) 같앙."

끝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시집오기 전에 어멍이 한 말이 떠올랐다. '넌 나 달망 젖도 많이 나고 해서 서방도 조앙 할꺼라.' 몽돌의 숨소리가 커지며 끝분의 두둑한 가슴팍을 움켜쥐었을 때, 문 밖에서 인기척이 나는 듯싶다가 난데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엉겁결에 몽돌을 밀쳐내고 앞섶을 여미던 끝분은 자신의 맨살을 훑고 지나가는 그림자에 소름이 돋았다. 문 앞에는 시커먼 그림자가 둘 서 있었다. 몽돌도 얼결에 바지를 추스르며 말했다.

"뭐, 뭡수까."

"이 빨갱이 새끼. 초저녁부터 오입질이야!"

신도 벗지 않고 내처 들어온 그림자가 몽돌을 내리쳤다. 몽돌은 '억' 소리를 내며 엎어졌다. 몇 번 더 발길질이 오갔다. 끝분이 고함을 지르며 말리려 들자 끝분의 배에도 발길질이 들어왔다.

"입 닥쳐 이 빨갱이 여편네야."

끝분은 그대로 꼬꾸라져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새벽에 샘에서 상할망이 한 말을 떠올렸다.

"요새 다랑쉬골 젊은 놈 몇이 육지사람 몇하고 청년단인가 먼가 한단다. 군인들 등에 업고 빨갱이 소탕작전인가 한댕 하멍 밤이영 낮이영 가리지도 않고, 맘 안드는 집들 몬딱(모조리) 들쑤시고. 쯧쯧, 왜정 때부터 노름질에 한량 짓이나 하던 놈들이, 그런 놈들이 뭘 소탕한뎅 말고. 똥 묻은 놈이 겨 묻은 놈 나무란뎅 하더니, 그 꼴 아님시냐?(아니냐?)"

"아이고, 할망 말조심합서. 이러다 난리 나쿠다.(납니다.) 며칠 전에 다랑쉬굴서 수도 없이 사람 죽었덴 안 합니까게."

옆에 있던 점례가 목소리를 한껏 낮춰 할망을 말렸다.

끝분은 한참 만에 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몽돌은 손발이 묶여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있었다. 깨진 정수리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몽돌의 눈에서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고 있었다.

"저기, 뭘 잘못알앙 와수다.(잘못알고 왔습니다.) 저흰 빨갱이 아니마심.(아닙니다.) 무슨 오해가 이성 이렇게 된 거 같수다게,"(같습니다.)

미처 말을 다 잇기 전에 끝분의 눈앞이 번쩍했다. 정신이 희미하게 돌아오자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냥 울음이 아니라 입을 닫고 울부짖는 것처럼 들렸다. 몽돌이었다. 정신이 돌아올수록 그 소리는 몽돌이 내는 소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서 몽돌에게 가야겠다고 눈을 뜨자 눈앞에 웬 낮선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들썩이며 번들거리는 눈빛을 올려다보며 끝분은 이건 꿈이라고 생각했다. 꿈이라도 이런 지독한 꿈은 빨리 벗어나고 싶어 고함을 치고 거부하려해도 소용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지도 팔 다리가 움직여지지도 않았다. 꿈은 한참동안 계속되었다. 끝났다 싶다가 다른 눈빛이 다시 번들거렸다. 몽돌한테 빨리 가야 하는데, 이 지독한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다시 눈을 뜨자 가슴께가 묵직했다. 풀어헤쳐진 옷자락 위로 이불과 시렁이 떨어져 얹혀있었다. 일어나 앉으려 힘을 주니 온 몸에서 바늘 같은 통증이 일었다. 어디가 성한지 구분을 할 수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앉으니 활짝 열린 방문 밖으로 하얗게 달을 품은 눈이 마당 가득 보였다. 그 위로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들이 정낭(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끝분은 무거운 손을 들어 아랫도리를 만져 보았다. 손끝으로 쓰라린 통증과 엉긴 피가 느껴졌다. 악몽은 악몽이 아니었다. '이럴 때는 바당에 들어가야 하는데.' 끝분은 이런 순간에도 바다를 떠올렸다. 물질을 시작한 열셋 이후로 끝분에게 바다는 어망의 약손 같은 것이었다. 상할망이 가르쳐 준대로 물할망께 정성스레 빌고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하면, 날카롭게 머리를 쑤셔대던 두통도, 웬만한 몸살도 저절로 나았다.

끝분은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터진 입술에 닿자 쓰라린 통증과 함께 정신이 들었다. 입술을 앙다물었다. 어떻게든 몽돌을 살려야했다. 옷매무새를 여몄다. 일어서니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뜨락을 내려서서 눈을 한 움큼 쥐어 얼굴에 비볐다. 푹신하고 차가운 온도가 마음을 어느 정도 진정시켰다. 끝분은 다시 눈을 한 움큼 쥐어 입 속으로 우겨 넣었다. 입을 앙 다물고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삼켰다. 다행히 삼키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달이 감나무 가지 끝에 걸린 걸 보니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 남았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끝분은 정낭 밖으로 난 발자국들을 따라 걸었다. 다리를 옮길 때마다 사타구니에 바늘 같은 통증이 일었지만 이를 악물고 걸었다. 발자국은 동네를 빠져나와 굼부리(화산 분화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굼부리로 오르는 초입부터는 여기저기서 내달아 온 발자국들이 여럿 엉켜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올랐을 때 어딘가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끝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둘러 발자국을 따라 오르다가 우거진 산죽림을 헤치고 나서자마자 끝분은 주저앉고 말았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먹은 눈밭에 지슬(감자) 자루 마냥 주검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앞에 한 여인이 숨죽여 울고 있었다. 끝분은 엉금엉금 눈밭을 기어 다니며 주검들을 뒤집어 보았다. 몽돌을 찾아야 하는데 몽돌이 여기 있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녁은 여기 어실거여. 암, 그렇고말고.' 하지만 네 번째 주검을 뒤집자, 검은빛으로 퉁퉁 부은 얼굴의 귀밑 사마귀 점이 눈에 들어왔다. 끝분은 숨이 막혔다.

"어, 어, 아, 어…"

정신이 없어 말을 더듬는 사이 누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상할망이었다. 할망이 끝분의 손을 잡자 그제야 눈물이 왈칵 나왔다.

"할망, 어 허 어어…"

"내 이럴 줄 알아서. 밤중 내내 삽작 밖이 소란스라방(소란스러워) 내다 봐신디(봤는데), 굼부리로 올라가는 뒷꼭지가 딱 분이 너랑 닮아서라. 아이고, 이게 무신 일이냐. 정신 채리라게(차려라). 지금 정신 안챙기면 너도 죽어, 알아 들엄서!"

상할망이 끝분의 뺨을 철썩 갈겼다. 끝분은 울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할망을 쳐다보았다.

"빨갱이 마누라로 몰리믄 너도 죽은 거(거야). 저 잡놈들이 살인귀가 씌엉 탐라 사람 모조리 빨갱이로 몰앙 죽일려는 건디, 정신 차령 내 말대로 해라. 그래야 산다, 내말 알아들어 지커냐!(알아 듣겠냐!)"

끝분은 온몸이 떨려왔다.

"너 혼저(빨리) 집에 강 중한 것만 챙겨 오라게, 용바위 알멘?(알지?) 그 밑에 굴에 꼼짝 말앙 숨어 이서. 해지고 우리 아방이 발동선 끌고 갈꺼니까. 그거 탕(타고) 육지로 가라."

부들부들 떨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끝분의 눈이 다시 몽돌에게로 옮겨갔다.

"저엉(저리) 두고 어떵 가랜…(어떻게 가라고…)"

"몽돌이는 내가 묻어 줄테니 걱정 말앙 가라게, 일단 산 사람이라도 살아야 안되커냐.(안되겠냐.) 어영 가!, 어영!"

끝분은 상할망의 채근에 정신이 차릴 틈도 없이 집으로 내달았다. 휘적휘적 집으로 들자 달이 감나무 가지에서 한참 갔다. 곧 날이 밝을 것이었다. 상할망의 말이 맞다. 일단은 살아야 한다. 그러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끝분은 서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솥에 남은 숭늉을 모두 들이켰다. 살아야 하고, 살려면 먹어야 했다. 어제 잡아 놓은 전복 두 마리도 생으로 씹어 삼키면서 망사리(태왁에 달린 그물망)에 빗창(해녀들이 사용하는 갈고리 모양의 채집도구)과 물적삼(해녀들이 물질을 할 때 입던 옷)을 말아 넣었다. '어딜 가든 바당만 있으면 살아진다.' 끝분은 왜정 때도 상할망을 따라 육지바다로 물질을 다녀본 경험이 있었다. 나이는 어려도 상군(해녀들 중에 잠수실력과 채집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 '상군, 중군, 하군, 똥군'으로 구분)이어서 상할망이 육지바다로 물질 갈 때면 끝분을 살뜰히 챙겨서 데리고 갔다. 방으로 들어가 먼저 장속에 숨겨놓은 지전을 찾아 버선 속에 찔러 넣었다. 보자기를 펴고 망시리와 옷가지들, 지슬(감자)과 쌀을 담아 꼭꼭 여며 묶었다. 밖을 보니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끝분은 보자기를 이고 발자국이 어지러운 정낭을 나섰다. 몽돌의 시커멓게 부어오른 얼굴이 떠올랐지만 입을 앙다물고 용바위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이어서 상할망이 육지바다로 물질 갈 때면 끝분을 살뜰히 챙겨서 데리고 갔다. 방으로 들어가 먼저 장속에 숨겨놓은 지전을 찾아 버선 속에 찔러 넣었다. 보자기를 펴고 망시리와 옷가지들, 지슬(감자)과 쌀을 담아 꼭꼭 여며 묶었다. 밖을 보니 날이 희끄무레하게 밝아 오고 있었다. 끝분은 보자기를 이고 발자국이 어지러운 정낭을 나섰다. 몽돌의 시커멓게 부어오른 얼굴이 떠올랐지만 입을 앙다물고 용바위를 향해 뛰다시피 걸었다.

삽화=노인호 기자 nogari@busan.com
해가 막 바다 위로 올라올 때 끝분은 용바위에 도착했다. 바위 아래 굴에서 쪼그리고 앉아 꼼짝 않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불안에 온몸이 떨리면서도 자꾸 눈이 감겼다. 눈을 감으면 몽돌의 검게 부푼 얼굴이 떠올라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떴다. 반복되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수도 없이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사이에 해가 수평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나서 푸르륵 거리는 발동선 엔진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점점 다가오다가 이내 멈췄다. 끝분이 굴 밖으로 얼굴을 내밀자 달빛이 바다에 길을 내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달빛 속에 배가 조용히 떠있었다. 배위에 구부정한 그림자하나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르방(할아버지)이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끝분은 보자기에서 물적삼과 물소중이를 꺼내 서둘러 갈아입었다. 다시 보자기를 여며 목에 둘러 묶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겨울바다의 차가운 온도에 몸이 움츠러들었지만 마음은 푸근해지고 떨리던 몸이 가라앉았다. 손발을 뻗어 헤엄쳐나가자 굳었던 몸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눈부시게 잔잔한 바닷길이 너무 고와서 끝분은 이 길 따라 물할망 곁으로 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달과 바다와 물할망이 끝분을 품어서 배로 인도했다. 하루방의 손에 끌려 배에 오르자 다시 온몸이 떨려왔다.

"이 뭔 일이고, 나도 멜락 앉앙(힘이 빠져서 주저앉아) 배도 못 몰 커라게.(것 같다)"

하르방의 한탄에 대꾸할 기력이 없었다.

"절로 드러강 이시라게.(저리로 들어가 있어라.) 어영,(어서,) 적삼도 벗고."

하르방이 가리킨 곳은 엔진 실이었다. 끝분은 엉금엉금 기어서 엔진 실 쪽문을 열고 들어갔다. 엔진 옆 누에고치 같은 공간에 솜이불이 깔려있었다. 타다 남은 기름 냄새와 함께 훈기가 가득했다. 끝분은 쪼그리고 앉아 물적삼과 물소중이를 벗었다. 젖은 옷을 열기가 나는 쪽을 향해 널어두고 솜이불을 몸에 감고 누웠다. 푸르륵 거리며 엔진이 돌기 시작하고 배가 움직였다. 시끄러운 기계음이 캄캄한 고치 속에 가득 찼다. 떨림은 점점 수그러들었다. 큰 바다에 나왔는지 배가 더 요동치기 시작했다. 파도의 울렁거림과 꽉 찬 기계음이 몸속으로 스며들어와 물처럼 출렁대었다. 끝분은 울렁거리는 잠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눈을 뜨니 시끄러운 엔진 음이 멈춰 있었다. 엔진 실 쪽문 틈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날이 밝았다. 끝분은 보자기를 끌러 옷을 걸치고 널어놓은 물적삼을 말아 넣었다. 문을 열고 나서자 낯선 바다 냄새와 함께 찬바람이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일어나시믄 요기부터 햄서."(일어났으면 요기부터 해.)

하르방이 삶은 지슬(감자) 두 개와 조롱박을 내밀었다. 끝분은 잠자코 물을 마시고 지슬을 씹어 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작은 항구에 닿아 있었다. 항구를 따라 왜정 때 지은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아직 인적이 없는 갯가를 따라 눈을 옮기자 멀리로 낯익은 언덕이 보였다.

"지코촌이다. 몇 해 전 장에 잠깐 들렀던 기억 남시냐?"

지코촌이라면 예전에 동해로 출가를 떠날 때 쌀하고 소금을 사러 들린 적이 있다. 하르방 말로는 왜정 때 파놓은 방공호를 어부들이 창고(じょうこ:지요우코)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해방 후에 온갖 종류의 부랑자들이 모여들어 촌이 되었다고 했다.

"여기가 떠돌이가 많앙 숨어 지내기 좋을 꺼라, 어떵하든 살아야 되메,(된다.) 살당 보믄 세상이 달라질 꺼난.(꺼다.) 그 때 집에 다시 갈 생각도 하고 이."

끝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보자기를 품에 안았다. 떨리는 다리를 추스르며 배에서 내려서자 하르방이 솜이불을 가져와서 보자기에 같이 묶었다.

"일단 잠 잘 댈 먼저 차장 댕겨.(찾아 다녀.) 넌 상군이라 어디 바당만 이시믄 살아진다게.(바다만 있으면 살아진다.) 잡은 거는 장 서믄 여기 왕 팔면 되고, 그러믄 끼니 걱정 안해도 되메. 정신 차령 잘 버이서, 알아 지커냐?"(알겠냐?)

끝분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르방이 돌아 서다 말고 지전 몇 장을 손에 쥐어주었다. 발동선에 시동이 걸렸다. 하르방의 구부정한 뒷모습과 요란한 발동선 소리가 바다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발동선이 점처럼 사라지자 끝분은 보자기를 머리에 이고 코끼리 언덕을 바라보며 무작정 걸었다. 다닥다닥 지어진 일본식 이층집들을 지나,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올라오는 두부 집을 지나고, 웃으며 물지게를 지고 가는 여인들을 지나, 판자촌 끝 모퉁이를 돌아서 한참을 걸었다.

바다 건너에서는 사람이 죽어 가는데 육지에서는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끝분은 사람이 없는 곳까지 걸었다. 길은 코끼리 언덕 아래에서 끝났다. 끝나는 곳에 휑하니 뚫린 굴이 있었다. 끝분은 굴로 들어갔다. 굴은 오래 전에 버려진 것으로 보였다. 여기저기 생선 박스와 낡은 그물, 녹슨 드럼통들이 널려 있었다. 그래도 넓고 시멘트로 다져진 바닥이 평평했다. 끝분은 굴에서 살기로 마음을 정했다. 빨갱이 여편네 딱지가 붙은 마당에 동네에 붙어 살아서 좋을 게 없었다. 자칫 빨갱이 냄새라도 날라치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바다가 훤하게 잘 보였다. 비탈을 바로 내려가면 바다도 가깝다. 끝분은 생선 상자를 주워 모아서 누울 자리를 만들고 그 위에 솜이불을 깔았다. 드럼통들을 굴려서 굴 입구에 세우고 그 위로 그물이며 나무판자며 다른 잡동사니들을 쌓아 올렸다. 엉성했지만 어느 정도 바람막이는 되었다.

끝분은 이불 위에 던져놓은 보자기를 베고 누웠다. 생선 상자에 옅게 남아있는 비린내가 처음 물질을 배우던 할망바다 늙은 해녀를 배려하기 위해 젊은 해녀가 물질을 하지 않는 얕은 바다처럼 몸을 감쌌다. 긴 하루였다. 몽돌을 잃고 집을 잃었다. 하루 만에 모든 걸 잃고 낯선 땅, 낯선 굴속으로 도망 와 누워있다. 빨갱이는 참말로 무서운 것이다. 그게 뭔지도 모르지만 마마처럼 들러붙어 몽돌을 죽였다. 몽돌의 죽음에 뭐라 하소연 할 새도 없이 끝분에게도 들러붙었다. 혹 빨갱이 냄새라도 새어 나가면 이번에는 자기가 죽을지도 몰랐다. 끝분은 이름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들러붙은 빨갱이 여편네 냄새가 가려져야 했다. 누가 들어도 우스운 이름이어야 한다. 끝분은 점례 동생 순이를 떠올렸다. 이름은 순이였지만 맹한 구석이 있어 동네사람들이 맹순이로 불렀다. 끝분은 맹순이가 되기로 했다. '그래, 이제부터 고향으로 돌아 갈 때까지 나는 맹순이다. 일단 버텨보자. 상할망 말대로 정신 바짝 차리고 맹순이로 살아보자.' 끝분은 다짐을 하고 눈을 감았다. 어둑한 굴속에는 빈 드럼통 속에 갇힌 바람이 웅웅거리며 울었다.

맹순은 다음 날부터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가만히 있으면 그 밤의 번들거리는 눈빛들이 떠오르고 몽돌의 신음 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을 지우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였다. 먼저 바닷가로 내려가 물질하기 적당한 곳을 고르고 돌을 쌓아 불턱을 만들었다. 죽은 몽돌처럼 둥글둥글한 돌들을 쌓고 있으면 다시 그 밤이 떠올랐지만, 그럴수록 더 열심히 몸을 놀렸다. 불을 피우고, 물 때 맞춰 하루 두 번 물질을 하고, 잡은 걸 손질해서 말렸다. 굴과 바다를 오갈 때마다 돌을 주워와 굴 입구에 바람벽을 쌓았다. 그래도 시간이 남으면 코끼리 산에 올라 갈비며 나뭇가지를 주워 다가 불턱에 쌓아두었다. 장이 서는 날에는 말린 물건들을 망사리에 가득 담아 팔러 나갔다. 장이 열린 포구 모퉁이에 가만히 않아 말린 미역이며 전복, 해삼을 늘어놓았다. 간간히 사람들이 값을 물었지만 맹순은 그저 맹하니 앉아 있었다. 주는 대로 돈을 받거나 보리쌀, 콩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필요한 것을 샀다. 흥정은 하지 않았다. 맹한 표정으로 달라는 대로 값을 치렀다. 될 수 있으면 동네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우물에 물을 뜨러 갈 때도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갔다. 할 수 없이 사람들과 마주칠 때는 맹순이로 행동했다. 다행히 겨울이 지나도 맹순이를 빨갱이로 의심하거나 사연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봄이 막 시작될 무렵 맹순은 몸이 이상해지는 걸 느꼈다. 유난히 몸이 무겁고 물질이 힘들었다. 정신없이 몸을 놀리느라 그러려니 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달거리를 두 번 쉬었다. 맹순은 덜컥 겁이 났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올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누구의 씨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번들거리는 눈빛들이 떠오르고 몽돌의 충혈된 눈빛이 맹순을 노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귀신의 씨인지도 모를 아이를 낳을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몽돌의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아이를 낳으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온 동네가 수군댈 것이다. 맹순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생각을 없애려 더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그날도 아침부터 바지런히 물질을 하고 불턱에 와서 잠깐 몸을 녹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맹순은 따뜻한 고향 바당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느긋하게 바당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물길을 따라 흘러갔다. 어디로 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이 물할망이 길을 가르쳐 줄 것이다. 흔들리는 미역들 사이를 헤치고 그저 앞으로 헤엄치면 그만이다. 맹순은 아래로 더 아래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별처럼 떠가는 빛을 따라 계속 헤엄쳤다. 아득하고 아늑하여서 그대로 가라앉고 싶을 때, 물할망이 빗창을 들고 나타났다. 너울거리는 도포에 왕방울만한 눈을 부라리고 노기를 띤 얼굴로 맹순을 노려보고 있었다. 맹순은 무섭기도 하고 그립기도 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물할망이 자기를 데리로 온 건지 벌하러 온 건지 알 수 없어 그저 두 손을 비비며 빌었다. 물할망님 용서 합서. 그저 용서만 합서. 맹순은 뭘 잘못했는지도 몰랐지만 끝도 없이 용서를 빌었다. 가만히 노려보던 물할망이 손에 든 빗창을 맹순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러자 맹순의 배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점점 부풀어 올라서 태왁보다 커지다가 몸 전체가 커다란 공기방울이 되어 떠오르기 시작했다. 위로 올라갈수록 주위가 밝아지고 공기방울도 그에 따라 점점 커졌다. 맹순은 수면에 다다르면 터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자맥질을 해보았지만, 공기방울이 된 몸뚱이는 버둥거리며 떠오를 뿐이었다. 그저 다가오는 수면을 지켜보며 마지막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눈부신 수면위로 떠오르자 끝분은 눈을 질끈 감으며 버릇처럼 숨을 내 뱉었다.

맹순은 깜빡 잠에서 깨어났다. 손에 빗창이 들려있었다. 예사 꿈이 아니었다. 맹순은 아랫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더 이상 고민 할 필요는 없었다. 물할망이 길을 가르쳐 주었다. 그 길로 열심히 헤엄치면 그만이다. 맹순은 고향을 떠나온 후 처음으로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맹순은 배가 더 부르기 전에 부지런히 물질을 해서 몇 달 치 양식을 모았다. 점점 더 배가 불러오고 뜨거운 여름이 시작되었을 때 전쟁이 터졌다는 소문이 들렸다. 빨갱이들이 밀려 내려온다고도 하고, 양키들이 밀고 올라간다고도 했다. 지코촌에도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판자촌이 점점 불어났다. 다행히 맹순의 굴 근처까지 오지는 않았다. 더위가 한풀 꺾였을 때 맹순은 혼자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자기처럼 빨갱이 냄새를 없애줄 이름이 필요했다. 물할망이 점지해주시고 누가 들어도 피식 웃음이 나는 이름, 맹순은 딸 이름을 선녀로 지었다.



*



불턱에 먼저 도착한 선녀는 남은 불씨에 갈비와 잔가지를 더 넣었다. 연기가 오르다가 불이 붙었다. 눈발이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선녀는 나무를 더 넣고 불을 크게 키웠다. 불땀이 활활 오를 때 쯤 맹순이 이마를 부여잡고 불턱에 들어섰다.

"어멍, 또 머리 아프멘?(아파?)"

맹순은 대꾸 없이 불 앞에 앉아 물적삼을 벗었다. 광목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고 불을 쬐었다. 곱은 손과 몸이 녹아도 좀처럼 두통이 가라앉지 않았다.

"어멍, 날도 추운데, 쉬었다 봄 되믄 나랑 같이 합서.(해.)"

"그럼 어떵(어떻게) 살아질 거냐! 두렁청한(뜬금없는) 소리 하고는."

선녀는 입이 비죽 나왔다. 맹순은 돌 밑에 숨겨둔 고구마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선녀에게 내밀었다.

"이리 왕, 이거나 머겅."

"되수다. 어멍 먹읍서.(엄마 먹어.) 난 뭐 먹어수다.(난 뭐 먹었어.)"

웬 일로 선녀가 먹을 걸 사양했다.

"머 먹어신디?.(뭐 먹었는데?)"

"어멍, 덕수 알아지쿠강?(알지?) 헬로할매 손자."

맹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가 양키소세지 쪼금 마심.(조금 줬어.)"

보나 마나 어리숙한 덕수에게 공갈을 쳤을 것이다. 맹순은 피식 웃으며 고구마를 베어 물었다.

"겅해도,(그래도) 하나 먹엄시라.(먹어라)"

선녀는 배시시 웃으며 고구마를 받아 들었다.

"어멍, 오늘은 고만 합서게.(그만 해요.)"

맹순은 묵묵히 바다로 눈길을 옮겼다. 눈꺼풀 속에서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눈발이 코끼리 언덕을 휘감고 넘어가는 걸로 봐서, 오후에는 동쪽에서 샛바람이 터질 모양이다.

"오후에 샛바람 터질 건디, 딱 반 망시리만 더 행 오켜."

맹순은 망사리에 담긴 성게며 소라를 물통에 부었다.

"넌 이거 들고 집에 강 이시라.(집에 가 있어라.)"

"눈도 오는데 오늘은 그만 합서, 응?"

선녀의 만류에도 맹순은 빗창을 망사리에 담아 어깨에 둘러맸다.

"아, 혼저 강 이시라게!(어서 가 있어!)"

선녀는 다시 입술을 비죽이며 물통을 들었다. 코끼리 바위가 눈 속을 뚫고 가는 모녀를 하릴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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