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하지의 의미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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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1일은 24절기 중 하나인 하지다. 하지는 1년 중 태양이 가장 높이 뜨고 낮의 길이가 가장 길기 때문에 북반구의 지표면은 태양으로부터 가장 많은 열을 받게 되고, 이 열이 쌓여서 기온이 상승하여 여름이 시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부산에 지난해보다 2주 빨리 폭염특보가 발효되면서 비상이 걸렸다. 라틴어에서 하지와 동지는 ‘해(sol)가 멈추어 있다(sistere)’라는 의미를 가진다. 마치 해가 멈춘 것 같다고 붙인 이름이다. 동양에서도 하지 이후 양의 기운은 음으로 바뀌면서 계절도 여름에서 가을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농경 사회인 한반도에서 24절기는 농사일의 기준이 되는 ‘농사 달력’이었다. 모내기가 끝나면 비가 와 논에 물이 가득 차야 벼가 잘 자랄 수 있다. 논에 물 대기가 그해 농사를 좌우하고, 가뭄이라도 들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는 ‘농부들의 제 논 물 대기 다툼이 큰 싸움으로 변했다는 사건 기사’가 신문에 종종 실릴 정도였다. 얼마나 바쁘고 힘든 시기였으면 “하지가 지나면 발을 물꼬에 담그고 산다” “유월 저승을 지나면 팔월 신선이 돌아온다”는 속담까지 있을 정도다.

과거에는 하지까지 비가 충분히 오지 않으면 조정과 민간을 막론하고 기우제를 지냈다. 산이나 냇가에 제단을 만들고, 마을의 큰어른이나 지방관청의 장이 제를 맡아 고기와 술, 과일, 떡, 밥, 포 등을 제물로 바쳤다. 하지 무렵에는 기우제가 가장 큰 행사였다. 가뭄과 기아라는 국가적 재앙을 극복하려는 온 백성과 국가의 마음을 모으는 상징적 제례였다.

하지를 맞으면 올해도 절반이나 지나가는 셈이다. 계절은 바뀌지만, 고물가와 경기 침체, 저출생, 의사 파업, 실업난, 지방소멸 등 국민이 어려움을 겪는 사안은 변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개원 3주째를 맞은 여의도 국회는 강 대 강 대치로 여전히 어수선하다. 상임위조차 제대로 구성하지 못하는 등 파국으로 치닫고 있다. 농사일 하라고 새경에 새참까지 준 머슴들이 본인들 밥그릇 싸움만 하는 꼬락서니가 가관이다. 나라의 기본을 만드는 정치가 본업을 내팽개치니, 농부가 모내기 한 논에 물꼬조차 트지 않는 모양새다. 국민은 폭염주의보 발효에 눈앞이 캄캄한데, 정작 정치가 우리를 더 지치게 한다. 하지가 지나면 언젠가는 동지가 온다. 정치도 계절의 변화처럼 새로운 국면으로 바뀌어야 한다. 여야 누구도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면 폭망한다는 역사의 순리를 명심하길 바란다.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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