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금 오페라와 고령 도시 부산 [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막장 드라마를 욕하면서도 끝까지 보게 되는 이유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개연성 때문이다. 극 전개가 어처구니없고 결국은 뻔한 결말로 치닫지만, 눈길을 떼기가 어렵다.
중독과 더 센 자극이 반복되는 막장 드라마에는 계보가 있다. 원조는 16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발명’된 오페라다. 신과 왕을 칭송하는 대신 인간의 희로애락을 정면으로 응시하자는 취지로 음악과 문학, 극, 춤 장르가 통합되어 탄생했다. 흥미를 끌려다 보니 비현실적이고 과장된 멜로드라마로 흐를 수밖에 없었고 소재도 가정 불화, 배신, 비극적 죽음 일색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은 열광했고 그 덕분에 상업 극장 시대가 열려 ‘밤마다 객석을 가득 채우는 대중오락’으로 발전했다. TV 드라마가 영어로 소프 오페라(soap opera)로 불리게 된 것도 막장계의 후예라서다.
202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피가로의 결혼식’의 한 장면. 마피아로 설정된 알마비바 백작은 여성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홈페이지
부산 오페라하우스는 2026년 말 준공과 2027년 개관을 목표로 하고 있다. 부산과 오페라의 조합은 여전히 낯설고 거리감이 느껴진다는 여론이 있다. 오페라는 점잖고 교훈적이며, 우아하고 품격이 있다는 선입견 탓이다. 어렵고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하면 일반 시민에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 될 수밖에 없다. 오페라하우스의 문턱을 낮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오페라를 격조 있게 꾸민 성인 드라마쯤으로 여기고 가볍게 즐기는 문화가 형성돼야 저변 확대가 가능할 것이다. 요컨대 관객과의 이질감 해소가 관건이다.
2010년 미국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에서 공연된 ‘라 트라비아타’의 한 장면. 텅 빈 무대의 거대한 시계는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삶이 유한한 시간에 갇혀 있음을 상징한다.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 홈페이지
■ 고급으로 포장된 막장
‘이 작품은 가정 폭력, 성폭력, 살인, 누드, 약물, 음주, 거친 언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잉글리시내셔널오페라 극장이 2024/2025 시즌에 무대에 올린 ‘카르멘’에는 미성년자 입장 제한이 붙어 있다. 다른 극장에서도 작품에 따라 관람 연령을 지정하거나 부모 동반 조건을 붙인다. 원작 자체가 사회의 부조리를 극단적 방식으로 표현하는 성인물 장르인 데다,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프로덕션이 한술 더 뜨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가 남긴 오페라 부파(희극)의 걸작이다. 한국에서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팬층이 두텁고 친숙한데, 아마 2023년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버전을 만나면 입이 쩍 벌어질 것이다. 연출가 마르틴 쿠세이가 알마비바 백작과 하인 피가로를 폭력과 마약에 물든 마피아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성 착취와 총격전, 선혈, 알몸이 무대를 뒤덮는다. 원작의 귀족-평민 계급 갈등 구조를 현대의 위계적 권력관계로 대체한 것이다. 경쾌한 희극 요소는 희미해지고, 누아르의 질감이 두터워진 새로운 서사 구조를 읽어내는 묘미가 있다.
역시 잘츠부르크에서 2005년 초연된 빌리 데커 연출의 ‘라 트라비아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텅 빈 무대에 거대한 시계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장면이 각인되면서 ‘시계 트라비아타’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무대 설정은 폐결핵으로 죽음을 앞둔 여주인공 비올레타의 삶이 유한한 시간에 갇혀 있음을 상징한다. 원작의 순애보를 뛰어넘은 인간 존재론의 질문이다. 연출 의도를 이해하고 나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한층 애틋해질 뿐만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주는 극적 효과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신산의 고비고비를 거치고 난 인생의 후반기에 이 연출을 접했다면 공감 영역이 훨씬 넓어질 테다.
부산 북항재개발구역 내 건립 중인 부산오페라하우스 전경. 정종회 기자 jjh@
■ 오페라, 덧없는 인생을 노래하다
‘카르멘’은 멀쩡한 남자를 파멸로 이끄는 치정극이다. 한국 관객에게 인기가 많은 ‘라 트라비아타’·‘리골레토’·‘토스카’에서와 마찬가지로 여주인공의 비극적 죽음과 절규로 끝을 맺는다. 한데, 뻔할 것 같은 팜므 파탈 소재도 연출에 따라 전혀 다른 주제 의식으로 재탄생한다.
영국의 로열오페라하우스와 미국 뉴욕메트로폴리탄오페라가 2023/2024 시즌에 ‘카르멘’을 동시에 선보였다. 두 곳 모두 신예인 메조소프라노 아이굴 아흐메트쉬나가 카르멘 역을 맡고 시공간을 현대로 옮긴 건 같지만 메시지가 달랐다.
뉴욕의 카르멘은 멕시코 국경을 무대로 한 무기 밀매단 소속으로, 미국 사회의 폭력·총기 문제를 드러냈고, 이민 여성 노동자로 그려진 영국의 카르멘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폭력 구조를 시사했다. 두 작품 모두 메가박스에서 상영된 터라 국내 오페라 팬들은 동시에 두 프로덕션을 비교 음미할 수 있었다.
클래식부산의 정명훈 예술감독은 지난 19~20일 부산콘서트홀 무대에 콘서트 오페라 형식의 ‘카르멘’을 올렸다. 정 감독은 언론 인터뷰에서 내년에 전막 공연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혔다. 명실상부 세계 최정상급인 정 감독이 선보일 ‘카르멘’이 어떤 메시지를 담아낼지 기대가 크다. 또한 이 작품에 부산이라는 도시의 색깔이 어떻게 투영될지도 궁금하다.
또 정 감독은 자신이 음악감독을 맡고 있는 이탈리아 라스칼라 극장의 ‘오텔로’ 프로덕션을 부산에 초청할 계획이다. 오페라 발상지의 본격 무대를 부산에 소개하겠다는 취지다. 부산 오페라의 르네상스를 불러일으키겠다는 사전 포석이 착착 진행되는 모양새다.
■ 인생 황금기에 즐기는 예술 장르로
이탈리아에서 상업 극장이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의 풍경을 비유적으로 기록한 것을 보면 대단한 센세이션이 느껴진다. 농사를 팽개친 남편들이 도시의 극장을 전전해 부인들이 한탄하고, 싼 가격에 좋은 자리를 구하려는 극장 앞 노숙자까지 생겨났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있어서 안 보고는 배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부산 오페라하우스 개관 이후라면 어떨까. 대박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부산의 공연 문화계에 분명한 입지를 구축하고 안착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 유수의 극장과 어깨를 겨루는 원작 그대로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연출로 재창작되는 ‘부산 프로덕션’ 병행을 모색하는 유연한 운영이 바람직하다.
부산이 초고속 고령화가 진행되는 도시라는 점에 착안한 시니어 맞춤 전략은 어떨까. 부산은 2050년에 가면 65세 이상이 전체 인구의 44%로 늘어난다. 오페라하우스가 곁에 있어서 인생의 쓴맛, 단맛을 곱씹게 만드는 작품을 즐기며 노년을 보낼 수 있는 도시. 부산의 매력을 배가시키는 요인이 될 테다. 원래 오페라가 통속 성인물로 출발했으니,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쉽다. 여기에 부산의 색깔이 입혀지면 금상첨화다. 낡은 장르라도 새 숨결을 불어넣으면 경쟁력 있는 콘텐츠로 재탄생된다. 부산 오페라하우스가 그 산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김승일 논설위원
김승일 논설위원 dojune@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