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독재정권도 대화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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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공모 칼럼니스트
한일 청구권 합의 국내 반대 여론 확산
박정희·김종필 직접 반대 학생과 토론
대화와 타협 정치 유지하는 핵심 원리

야당 대표와 대화 않고 법안 거부권 일관
윤 대통령 고집·불통 총선 패배 큰 대가
대화 시작으로 여소야대 정국 돌파해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미래를 위한 글로벌 파트너’를 선언하기 70년도 전인 1950년대 초에 일본은 이미 미국의 파트너였다. 사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추축국인 일본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다. 그러던 차에 소련이 핵 개발에 성공하고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었다. 냉전이 심화하자 동아시아 반공 보루로서 일본의 중요성이 커졌다. 비록 적국이었지만 당시 이 지역에서 공산권에 맞설 수준의 산업화를 이룩한 곳은 일본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일본의 경제를 부흥시킨 뒤 지역 거점으로 삼는다는 이른바 ‘역코스(Reverse Course)’ 정책을 추진했다. 걸림돌이 있었다면 한국과 일본의 껄끄러운 관계였다. 이에 미국은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강하게 압박했다.

1952년 2월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1950년대에만 네 차례의 한일회담이 열렸다. 모두 결렬됐다. 기본조약, 청구권 문제, 어업 문제 등에서 이견이 워낙 컸다. 상황은 1960년대에 접어들며 바뀌었다. 우리 정부는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대규모 투자 재원이 필요했고, 10년 안에 국민 소득을 두 배로 올린다는 ‘소득 배증 계획’을 내건 이케다 하야토의 일본은 자국 기업의 해외 투자처가 필요했다.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은 1962년 10월과 11월 두 차례 회담을 열었다.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 차관 1억 달러’의 청구권에 합의하는 메모를 작성했다.

한일회담이 진전될수록 국내에서의 반발은 커져만 갔다. 그도 그럴 것이 해방 후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1963년 가을에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가 설립돼 한일회담 반대 운동을 이끌어 가려는 움직임이 일었다. 그해 11월, 민비연은 토론회를 열고 한 정부 관계자를 불렀다. 학생들 앞에 선 이는 “나이 구십이 되어 되돌아보니 여든아홉 해를 헛되게 살았다고 한탄하는데, 그래도 ‘뭔가 하지 않았느냐’는 많은 물음에는 미소 지을 뿐 대답하지 않는 자”. 바로 김종필이었다. 한일회담의 당사자이자 그 시절 중앙정보부장·집권당 의장을 지낸 인물이 반정부 시위를 주도하는 대학생들과 토론을 벌이다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민비연 초대 집행부를 지냈고 이후 동교동계 일원이 된 김경재 전 의원도 훗날 “김종필은 참 멋있는 사람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라고 회고했다. 이듬해 3월에는 박정희 대통령도 서울 지역 11개 대학 학생 대표들을 만나 이 문제를 놓고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그는 이후 한일 협정을 강행하고 이를 반대하는 대학생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정권의 일·이인자들이 정부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청년들과 얼굴을 맞대고 토론했던 사실만큼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대화와 타협은 정치를 유지하게 하는 핵심 원리다. 법에 구구절절 쓰여있진 않았지만, 과거 정치인들 사이에선 첨예한 갈등이 빚어지면 대화와 타협을 통해 풀어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공유됐었다. 반대가 심한 정책은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만나 설득하고, 내각을 꾸릴 땐 되도록 인사청문회 결과를 존중하며, 법률안거부권은 어지간하면 행사해선 안 된다는 관행들이 대표적이다. 이런 정치적 컨센서스가 유지됐었기에 지금까지 그 많은 여소야대 국면에서도 대한민국이 순항할 수 있었던 건지 모른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에게서는 이런 정치적 컨센서스를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일례로 그는 2년이 안 되는 임기 동안 아홉 번의 거부권을 행사했다. 문민정부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행사한 거부권을 모두 합한 것과 같은 수다. 압도적 여소야대 상황에서 임기를 시작했다는 점을 고려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비판을 피할 수 없는 건 양곡법, 간호법같이 대화로 풀 수 있는 사안마저 거부권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이번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치러야만 했던 큰 비용은 대통령의 고집과 불통 값이었다.

그동안 윤석열 대통령은 “만나서 대화하자”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요청에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절해 왔다. 임기 2년이 다 되도록 야당 대표와 제대로 된 회담 한 번 하지 않은 대통령은 그가 유일하다. 국민의힘이 참패하면서 공은 야당으로 넘어갔다. 과거 50만 들어줘도 됐을 야당의 요구를 이제는 100, 200을 들어줘도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5일 부산 강서구 명지근린공원에서 열린 제79회 식목일 기념행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이 우리 산을 푸르게 만들었다”고 했다. 나무를 많이 심는 것도 좋지만 이왕 본받는 김에 한때나마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면하고 이야기를 나눴던 모습도 참고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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