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민속 의식, 현대미술 작품이 되다
이배 작가, 12일 청도 퍼포먼스
‘달집 태우기’ 1년 전시 마무리
청도천 섬 하나, 대지미술 변신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도 성공
지난 12일 평소 조용한 청도천(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은 인파로 붐볐다. 서울과 부산을 비롯해 전국에서 이 곳을 찾았다. 한복에 코트를 입고 하천 옆 둑에 조용히 서 있는 남자에게도 눈길이 쏠렸다. 이날 행사의 주인공이자 지난해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를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배 작가이다.
그는 지난해 2월 이곳에서 ‘달집 태우기’라는 전시 여정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달집을 태운 뒤 그 영상과 타고 남은 숯을 가지고 4월부터 7개월 간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를 열었고, 다시 1년 만에 ‘달집 태우기’ 전시의 마침표를 찍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전시 제목을 ‘달집 태우기’로 정한 건 한국의 민속 의식을 현대미술로 재해석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고 싶어서다. 한국문화에 관한 관심이 세계적으로 뜨거운 시대에 한국 작가로서 우리의 전통이나 역사, 문화를 느끼게 해줄 수 있는 전시를 보여주고 싶었다”
이배 작가는 행사에 앞서 전시와 이날 행사 의미를 기자와 방문객들 앞에서 직접 설명했다. 작가는 이어 “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순환’이다. 지난해 달집을 태우고 그 영상과 타고 남은 숯을 비엔날레 전시에서 보여주고 다시 모두 청도로 보냈다. 이번에 그것들을 달집으로 태움으로써 ‘순환’을 완성한다”라고 말했다.
달집 태우기라고 언급했지만, 이날 행사는 기존 달집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청도천 중간 3000평 규모의 섬 전체에 너비 200m, 폭 35m의 장대한 붓질이 담긴 천이 덮였다. 이 작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붓질(스트로크)을 대형 천 위에 작가가 직접 그렸다. 천 아래에 베니스에서 온 전시 재료들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받은 소원을 적은 한지, 볏짚을 깔았다. 수직적인 달집이 아니라 거대한 수평의 달집을 만든 셈이다. 거대한 붓질은 베네치아와 한국을 잇는 길을 표현하는 동시에 뱀의 해를 맞아 뱀의 이미지를 뜻하기도 한다.
조현화랑이 주관한 이 행사는 미술관 관계자, 큐레이터, 기자, 미술 컬렉터 등이 참여했고 이배 작가가 청도천에 펼친 거대한 대지 작품에 다들 놀랐다. 행사에 대한 설명 후 이배 작가가 버튼을 누르자 수평의 달집 곳곳에서 동시에 불길이 솟구쳤고 이배 작가의 붓질 작품이 불길에 의해 서서히 타며 모양이 변하자 그 자체가 훌륭한 행위 예술로 다가왔다.
이배 작가는 ‘숯의 작가’로 불린다. 그는 절단한 숯 조각을 접합한 뒤 표면을 연마한 조각, 숯가루가 섞인 먹물로 다양한 형태의 붓질 그대로를 보여주는 ‘붓질’(Brushstroke) 등 숯을 이용한 작업을 주로 한다. 작가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작업의 영역을 확장시켰다. 마치 무예를 보여주는 듯, 춤을 추는 듯, 이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영상으로 찍었고 작가의 움직임에 따라 작가의 붓질 그림이 영상을 덮었다. 음악 감독과 함께 영상에 맞는 음악을 작곡했고 베니스를 비롯해 부산 조현화랑에서 영상 작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세계 최고의 대리석 산지로 유명한 이탈리아 카라라 장인들과 함께 5m 규모 화강석을 다듬어 먹을 만들었고 이 작품도 화제가 되었다.
“이전까지는 혼자서 작업했다면 베니스 전시를 통해 많은 사람과 일하면서 여러 사람과 함께 만들 수 있는 작업의 길이 열렸어요. 무엇보다 자라면서 눈에 익숙했던 고향의 전통 의식을 현대 미술 작가로서 베니스에서 전시했다는 게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앞으로 한국 작가 정체성이 분명한 현대미술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작가는 베니스 전시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 다른 분야의 전문가와 협업 제안이 많이 들어오고 있다며 앞으로 좀 더 새로운 작품들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소식도 전했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