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뉴스 요리] 대한도기, 그 기억마저 사라질까 두렵다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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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균열 생겨… 사라질 운명 처해
과거 부산 경제 한 축 담당했던 곳
지자체, 대응 미숙… 남겨 두었으면
흔적은 도시 정체성 드러낼 원재료

부산 영도구 봉래동 미광마린타워아파트 인근 한 골목길 사이로 붉은 벽돌 담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 담장은 특정 건물의 담벼락이 아닌 상태로 덩그러니 홀로 서 있다. 과거 한국 최대 도자기 회사였던 대한도기의 흔적이다. 한데 남아 있는 담장 일부마저 조만간 사라질 운명이다. 관리를 받지 못해 담벼락이 비정상적으로 기울어진 데다가 균열마저 생겨 붕괴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토지 소유주인 (주)미광운수 측은 철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부산의 근현대에서 대한도기가 갖는 무게는 적지 않다. 과거엔 부산 경제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곳이기도 했다. 과연 철거만이 능사일까?


■부산 도자산업 부흥 이끌어

대한도기는 일제강점기였던 1917년 일본인 사업가가 세운 조선경질도자주식회사가 전신이다. 이 회사는 조선총독부의 지원과 수출 호황에 힘입어 조선 최대의 산업도자기 생산기업으로 성장한다. 해방 후 적산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개인에게 매각돼 1950년 대한도기로 이름이 바뀐다.

대한도기는 산업과 예술이 결합한 산업체였다. 한국전쟁 시기 부산으로 피란 온 화가들을 고용해 화려한 색채와 그림으로 구성된 장식용 핸드페인팅 도자 접시를 제작했다. 한국적인 풍속과 풍경을 소재로 한 기념품으로,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으며 피란 화가들의 생계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 소위 핸드페인팅 도자 접시는 부산의 산업과 예술이 결합해 만든 접시였다.

핸드페인팅 도자 접시 제작에는 변관식, 김은호, 김환기, 전혁림 등 당대의 쟁쟁한 화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피란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린 도자기는 대량 생산하는 일반 생활도자기가 아니라 장식품과 기념품, 수출품으로 제작되는 특별한 제품이었다. 대한도기는 한때 전국 도기의 80%가 이곳에서 만들어질 정도로 부산 근대 도자산업의 부흥을 이끌었다. 그래서 산업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 자리한 옛 대한도기 터에 남아있는 담장과 이를 알리는 동판. 담장 곳곳에 균열이 발생해 안전사고 우려가 높다는 지적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부산 영도구 봉래동에 자리한 옛 대한도기 터에 남아있는 담장과 이를 알리는 동판. 담장 곳곳에 균열이 발생해 안전사고 우려가 높다는 지적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옛 대한도기 터에 남아있는 담장 곳곳에 균열이 발생해 안전사고 우려가 높다는 지적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옛 대한도기 터에 남아있는 담장 곳곳에 균열이 발생해 안전사고 우려가 높다는 지적이다. 정달식 논설위원

■지자체는 뭐 했나?

대한도기 담장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영도구청은 2022년 도로 확장 공사를 한다고 대한도기 담벼락 일부를 허물었다. 그땐 지금보다 담장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당시 관련 전문가, 언론 등의 지적이 나오자, 영도구청은 뒤늦게 이곳에 대한도기 담장이라는 것을 알리는 동판을 설치하고, 일부를 보존했다. 이제는 그 남은 일부마저 없어질 상황에 처한 것이다. 구체적인 보존 대책 없이 여러 번 담벼락 원형이 훼손되면서 이젠 철거 위기까지 이르렀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역의 문화적 자산이 사라질 상황은 이미 예견됐던 일이다. 대한도기 역사에 관해 탐구해 온 이현주 부산시 문화재위원은 “지자체와 소유권을 가진 측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사전에 고민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영도구청이나 부산시가 지역 문화 자산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발 빠르게 대응했더라면 이런 상황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김기수(동아대 건축학과 교수) 문화재청 근대문화재분과위원장은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우리의 흔적과 기억을 깡그리 지우려 하지 말고, 우리 후세가 그걸 기억할 수 있게 넘겨주어야 한다”면서 “대한도기 담벼락을 당장 없앨 게 아니라 부산 최초의 근대식 물류창고였던 ‘남선창고’ 담장도 남겨 두었듯이 남길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1960년대 대한도기에서 도자기를 제작하는 노동자들. 부산일보DB 1960년대 대한도기에서 도자기를 제작하는 노동자들. 부산일보DB

■누구를 위한 보존인가?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와 변화를 추구하다 보니, 도시들도 서로 닮아가고 있다. 본래 간직한 모습이나 정체성은 온데간데없고 새 옷을 갈아입기에 바쁘다. 한 도시가 뭔가를 하면, 다른 도시가 곧바로 이를 따라 하는 시대가 됐다. 남는 것은 결국 정체성 없는 획일화된 도시다. 그렇다 보니 각 도시가 갖는 독특한 분위기와 기억들은 하나둘 사라져 버리고 없다. 부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한도기 담벼락을 애써 남기려는 것은 거창한 명분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람과 문화의 흔적, 지역 정체성이 담긴, 오래된 것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다. 누군가는 “그걸 왜 남겨”라고 반응할 수도 있다. 하찮아 보이는 것도 다시 보거나 뒤집어 생각하면 얼마든지 소중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작은 자산들이 모이면 새로운 자산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많은 사람이 일생의 상당 부분을 디지털 공간에서 보내고 있는 21세기에는 더욱더 열린 마음으로, 더 넓은 시선으로 보존의 명분을 바라볼 필요도 있다. 그런 점에서 담벼락을 배경으로 셀카를 찍으며 그 자체를 마음껏 즐기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리는 역사·문화적 자산을 보존하는 새로운 명분이 될 수도 있다.

대한도기의 도자 접시 중 빨래하는 여인들. 부산일보DB 대한도기의 도자 접시 중 빨래하는 여인들. 부산일보DB

<창조도시>의 저자 찰스 랜드리는 ‘도시의 기억은 역사적 경위를 남기는 데 도움을 주고, 창조의 원천으로 활용될 수 있으며,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또 사람들을 연계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억과 관련된 것을 계속해서 지우고 있다. 그것은 도시의 미를 파괴하는 것 가운데 가장 악질적인 것에 속한다’라고 했다. 부산이란 도시는 과연 여기에 어떤 대답을 줄 수 있을까?


■담벼락, 현재와 소통하는 과거

대한도기 담벼락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과거 모습, 도시가 걸어온 길을 더듬을 수 있는 상징적인 흔적이다. 도시의 숨은 자산이며, 부산이란 도시가 걸어온 역사이자 문화다. 이게 지워지면 기억마저 지워질 가능성이 높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대한도기와 그 담벼락은 부산이 기억해야 할 유산이고 자산이다. 더불어 도시의 숨결이고 흔적이다. 지우고 없애거나 내동댕이쳐선 안 된다. 담벼락은 과거의 흔적이지만, 그것이 남아 있어 ‘현재와 소통하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도시 속에 스민 과거의 역사와 삶은 고리타분한 죽은 역사가 아니라, 도시 정체성의 잠재력이 될 수 있는 문화의 원재료임을 우리 모두 인식해야 한다. 이게 도시를 빛나게 하는 윤슬이기도 하다.

어느 한적한 골목에서, 혹은 길거리에서 옛 기억과 흔적을 더듬을 수 있는 그런 도시, 부산이 그랬으면 한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前)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했다. 발 딛고 있는 도시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정달식 부산일보 논설위원. 정달식 부산일보 논설위원.





정달식 논설위원 doso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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