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바람, 경계의 감각-앨리스 달튼 브라운 부산 회고전
‘The Light Within’ 전시 개막
9월 27일까지 빌라쥬 드 아난티
구상·추상 사이 약 140점 전시
‘감성적 리얼리즘’ 깊이 드러내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 전시장을 찾은 앨리스 달튼 브라운 작가. 김은영 기자 key66@
앨리스 달튼 브라운 'Quiet Window'(2008). 띠오 제공
앨리스 달튼 브라운 'High Breeze'(2013). 띠오 제공
바람이 흔든 커튼 사이로 바다가 보이고, 햇살은 수면 위에서 조용히 반짝인다.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현대미술 화가 앨리스 달튼 브라운(1939~ )의 회화는 이처럼 빛과 공기가 만들어내는 섬세한 순간을 포착한다. 그의 화면에는 극적인 사건이나 인물 중심의 서사가 없다. 대신 창가와 실내, 그 너머의 풍경이 빚어내는 조용한 감각이 놓여 있다.
지난해 서울 전시에서 약 11만 명을 모은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이 부산으로 이어졌다. 지난달 23일부터 부산 기장 빌라쥬 드 아난티의 컬쳐클럽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196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140여 점의 원화와 드로잉, 스터디 작업을 통해 작가의 반세기 삶과 예술적 여정을 조망한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My Dappled Pink'(1992). 띠오 제공
앨리스 달튼 브라운 'Linear Interplay'(1999). 띠오 제공
전시 개막에 맞춰 부산을 찾은 작가는 “이 아름다운 곳에 제 작품을 전시하게 되어 영광이고 기쁩니다. 저는 언어보다는 시각적인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작품으로 제 이야기를 전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했다. 설명보다 장면을 건네는 태도는 브라운 작업의 핵심을 압축한다. 나이에 비해서도 훨씬 정정한 모습이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갤러리 띠오(THEO)의 조인순 디렉터는 “작품을 처음 마주했을 때 느꼈던 떨림과 감정이 이번 부산에서도 많은 이들과 공유되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전시 유치에 힘을 보탠 갤러리 범향의 김희경 공동 대표는 “브라운의 그림 속 빛과 윤슬을 보며 개인의 추억과 아픔을 자연스럽게 떠올렸는데 매우 큰 위로와 안정감을 느꼈다”고 말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 김은영 기자 key66@
브라운의 그림은 분명 구상 회화다. 창문과 커튼, 실내와 바다, 빛과 그림자는 모두 실제 풍경에서 온 장면이다. 그러나 그 재현은 단순한 묘사에 머물지 않는다. 화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의 온도와 깊은 공간성이 함께 스며든다. 부산 전시 기획을 도운 김종원 아트 디렉터는 이를 ‘감성적 리얼리즘’으로 명명한다. “보이는 것은 구상이지만, 느껴지는 것은 추상”이라는 그의 설명처럼, 브라운의 회화는 사실적 형식 위에 정서적 울림을 중첩시킨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 '나무와 탁자의 그림자'(1977). 김은영 기자 key66@
전시는 ‘안식처’, ‘경계’, ‘확장’의 세 섹션으로 구성된다. 내부 공간에서 시작된 시선은 창과 커튼, 포치와 같은 경계적 장치를 지나 외부의 자연으로 확장된다. 이때 경계는 단절이 아니라 통과의 지점이다. 빛과 바람, 공기는 자유롭게 내부와 외부를 넘나들며 공간을 감정의 영역으로 전환한다.
도슨트는 관람의 핵심을 ‘틈’에서 찾는다. “그림 속 안과 밖 사이에는 무엇인가 스며드는 순간이 있다. 그것이 햇살이고, 바람이고, 공기다.” 이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야말로 브라운 회화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작업은 초기의 어두운 화면에서도 이미 빛에 대한 감각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1990년대 이후 ‘집’과 ‘경계’의 모티프를 통해 더욱 명확한 형식으로 발전한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 '밀발 옆 헛간"(1974). 김은영 기자 key66@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 김은영 기자 key66@
작가의 이력 또한 이러한 회화적 특성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 펜실베이니아에서 태어나 오벌린 칼리지를 졸업한 뒤, 1970년대 뉴욕에서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한 브라운은 추상표현주의 이후의 미술 환경에서 출발했다. 이후 구상 회화로 이동했지만, 그 안에는 여전히 추상적 감각과 명상성이 남아 있다. 1960년대 프랑스 유학 경험과 미국 산업 풍경에서 비롯된 기하학적 감각(프리시저니즘)의 영향 역시 그의 화면에 미묘하게 스며 있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 '주방에서'(1965). 김은영 기자 key66@
앨리스 달튼 브라운 'My Golden Corner'(1988). 띠오 제공
미술사적으로는 미국 사실주의의 계보 위에 놓이지만, 그 접근은 독자적이다. 에드워드 호퍼와 앤드루 와이어스가 고독한 인물의 존재감을 통해 내면의 정서를 드러냈다면, 브라운은 인물 대신 ‘공간의 경계’를 통해 감정을 환기한다. 창문과 커튼은 단순한 건축적 요소가 아니라, 주체와 세계가 마주하는 감각의 장치다.
흥미로운 점은 이 회화가 관람자에 의해 완성된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장면은 누군가에게는 안식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유 혹은 고립의 감정으로 다가온다. 같은 사람에게도 그날의 상태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으로 읽힌다. 브라운은 의미를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장면을 건넨다. 그리고 그 장면은 각자의 기억과 감정 속에서 다시 구성된다.
‘앨리스 달튼 브라운 회고전: The Light Within’에서 만날 수 있는 그의 작품. 김은영 기자 key66@
후기 작업으로 갈수록 두드러지는 ‘윤슬’의 표현 또한 주목할 지점이다. 세밀한 재현에서 점차 감각적인 빛의 분절로 이동하는 변화는, 시간과 함께 축적된 시선의 깊이를 보여준다. 물 위에 흩어지는 빛은 더 이상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시간과 감정이 응축된 흔적으로 읽힌다. 특히 바다 도시 부산에서 마주하는 브라운의 빛은, 어쩌면 서울에서보다 더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관람자에게 도달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 빛은,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속에 머문다.
유료로 마련되는 이번 전시는 9월 27일까지 열리고, 관람은 오전 11시~오후 7시(오후 6시 입장 마감, 매주 화요일 휴관)이다.
김은영 기자 key66@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