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산업 위기를 기회로… 현실 직시하고 섬세한 전략 마련해야 [부산문화 도약에서 비상으로]
영화제·학교 등 인프라 충분
창작자 육성 전략 집중할 때
제작 지원 펀드는 좋은 기회
소프트웨어 보강책 찾아야
지역 영화계 불신 회복 필요
협의체 내실화·기술 변화 주목
부산과 영화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최 성공으로 부산은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는 영화 도시가 됐다. 1999년, 영화촬영지원기관인 영상위원회가 전국 최초로 부산에 설립됐고, 영화진흥위원회 등 관련 공공기관이 이전하면서 명실상부한 영화·영상도시로 자리매김했다. 부산은 2014년 아시아 최초로 ‘유네스코 영화 창의도시’에 선정된 후 10년 만에 의장도시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영화 분야에서 부산이 가진 경쟁력을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영화 도시 부산은 최근 영화업계의 침체와 급격한 환경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부산독립영화협회 오민욱 대표, 부산국제단편영화제 차민철 집행위원장, 제작사 로케트필름 김영진 대표와 만나 지역 영화·영상산업의 현실을 짚고 부산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물었다.
-지역 영화·영상산업의 제작환경, 지원 정책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오민욱 대표(이하 오 대표)=먼저 어떤 제작인지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크게 상업 영화와 독립영화를 만드는 두 부류의 창작자로 구분한다면, 부산시와 부산영상위원회의 정책은 주로 상업 영화 제작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부산에서 10억~20억 원대 규모의 상업 영화를 기획하고 찍는다고 했을 때 그 정도 규모의 영화를 제작할 수 있는 창작자가 부산에 많겠냐는 생각이 든다. 부산시가 기대하는 규모의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창작자들이 부산에 많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부산시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지역 창작자에게 어울리는 정책을 펼치고 있는지 짚어봐야 할 것 같다.
△김영진 대표(이하 김 대표)=부산에는 영화의전당도 있고 부산국제영화제도 있고 여러 영화 학교도 있어 영화 도시로서 인프라를 갖췄다고 생각한다. 인프라를 갖춘 만큼 영화 제작을 위한 생태계가 잘 돌아가야 하는데 이 부분이 잘 안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상업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함께 어울리지 못하고, 영화학과를 포함한 대학과의 산학협력도 잘 이뤄지지 않다 보니 지역 인재들은 서울로 가고, 제작사에서는 인재를 찾지 못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차민철 집행위원장(이하 차 위원장)=오 대표가 이야기한 점에 대해 공감한다. 상업 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이 계속 작품활동을 하려면 그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베이스(지원)는 있어야 되는데 10여 년 전과 큰 차이 없는 것 같다. 기초체력이 약한데 사용하는 장비만 좋아진 상황이라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규모 영화 제작이 많지 않다 보니 관련 학과를 전공한 학생들도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수도권으로 떠나는 악순환이 생긴다.
-지역 영화·영상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어떤 전략을 펼쳐야 할지
△오 대표=육성하고 싶은 대상을 확실히 해야 한다고 본다. 부산에는 후반작업시설, 스튜디오를 포함한 여러 물리적인 시설이 갖춰져 있지만 비용 문제 등으로 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영화 감독들은 이 시설을 이용하지 못한다. 저예산 상업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들 정도가 이 시설을 이용하는데, 과연 몇 편의 영화가 이 시설에서 완성되는지 냉정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건설 중인 부산기장촬영소를 포함해 관련 시설은 늘어나지만 독립영화인들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는다. 더 이상 시설을 유치하는 것만으로는 지역 영화의 경쟁력을 높이기 어렵다. 지금이라도 냉정하게 부산 영화업계 현실을 진단해야 하고, 상업 영화를 육성한다면 제작진들을 어떻게 부산으로 끌어올 것인지 등 타깃층에 맞는 세밀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김 대표=부산을 거점으로 한 지역 제작사가 아직 체급이 약하고 기초체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상업 영화를 제작하는 지역 제작사를 키우는 한편 양질의 독립영화가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투 트랙 전략을 사용해야한다고 본다. 독립영화 제작이 많아지면 이 중 일부는 상업 영화를 제작하게 되고 지역에서 영화를 전공한 학생들이나 배우들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와 업계를 잇는 산학협력도 강화하고 생태계가 잘 돌아가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부산에서 제작되는 영화들이 규모가 크진 않지만 단단하고 고유한 색깔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서울에 있는 메이저 제작사나 투자자들도 절대 무시 못 할 것이다.
△차 위원장=독립영화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은 공감한다. 꼭 현금 지원이 아니더라도 후반작업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해주는 등의 실질적인 지원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산업과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영화를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화 예술에 대한 세심한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근 정부의 영화 관련 예산 삭감으로 창작자들이 힘들어하고 있는 만큼 고군분투하는 창작자들에게 공격적인 지원을 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최근 인공지능(AI) 영화의 등장, 업계 불황 등으로 변화에 민감한 시기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은?
△오 대표=냉정한 현실 인식이 가장 필요해 보인다. 후반작업시설을 포함한 관련 시설의 운영 현황을 파악해서 설립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잘못된 것이 있다면 과감하게 정책 방향을 수정해야 한다.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영화영상정책위원회 등의 회의체를 제대로 운영해 지역 영화인에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듣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김 대표=부산시와 부산영상위원회가 다른 지역 기관에 비해 열심히 하는 건 사실이다. 잘하는 것은 잘한다고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다. 부산은 최근 지역 영화인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솔트룩스 펀드 같은 것도 운영해 다른 지역에서 부산을 부러워할 때도 있다. 수도권에서만 작업하던 창작자들도 최근에는 좋은 지원책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부산은 각종 영화 학교, 영화진흥위원회라는 공공기관이 있어 여건이 다른 지역에 비해 좋은 편이다. 이런 타이밍에 부산이 완성도 높은 정책을 선보인다면 영상산업의 헤게모니 변화를 불러올 수 있다고 본다.
△차 위원장=지역 영화인들 사이에서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필요도 있는 것 같다. 최근 업계가 어려워지고 정부 예산도 삭감되면서 영화인들의 연대가 무너진 측면이 있다. 영화제 예산이 삭감되면서 영화제끼리도 생존경쟁을 벌이는 중이다. 누군가 중심이 돼 관계 회복을 이끌어야 한다고 본다. 그게 영상위원회가 될 수도 있고 영화제가 될 수도 있다. 묵은 불신을 거둬내는 일이 지금부터 진행되지 않으면 갈등 봉합이 더 어려워질 것이라고 본다. 유연한 생각을 지닐 필요도 있다. 요즘은 독립영화, 상업 영화를 제외하고도 웹드라마, SNS용 숏폼 영상 등 다양한 영상 장르가 등장하는 소위 ‘포스트 시네마’의 시대다. 과학 기술과 영화·영상업계가 빠르게 접목하고 있지만 아직 인식은 이러한 변화를 잘 못 따라가는 것 같다. 혁신의 시대, 융합의 시대에서 과학기술과 영화가 연결되는 만큼 협업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부산시의 경우 영상콘텐츠산업과와 인공지능소프트웨어과가 있지만 두 부서 간 협업이 쉽지 않다. 이러한 부분을 개선한다면 앞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탁경륜 기자 takk@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