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의사가 의사사회를 비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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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인·부산대 의대 명예교수, 전 교수신문 논설위원

정영인·부산대 의대 명예교수 정영인·부산대 의대 명예교수

의대 증원으로 촉발된 의협과 정부 간의 갈등이 대통령의 뜬금없는 의대 2000명 증원 발표로 의대 교수들의 집단사직 결의로까지 비화되었다. 의대 증원이 의사의 존재 가치를 의사 스스로 부정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수호하는 종교계는 왜 이번 사태에 침묵할까? 많은 의료기관을 거느린 종교계의 이해관계 때문일까? 낙태에 대해서는 그토록 강한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종교계가 아니었나? 이런 의문들은 의대 증원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고 의료계에 내재된 불합리한 건강보험제도와 잘못된 의료 관행 및 의료체계의 구조적 문제들이 한계 상황에 도달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진다.

의협은 “의대 증원이 국민의 건강권을 침해하고 전공의들이 의사직 자체를 그만두고 의료 현장을 떠나게 함으로써 한국의 의료를 근본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의대생, 전공의, 교수들까지 동조하고 나선다. 의대 증원으로 초래될지도 모를 미래의 의료 붕괴를 사전에 막기 위해 불가피하게 진료 거부로 현재의 의료를 붕괴시킨다?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심지어 의협은 전공의들의 집단사직을 정의로운 행동이라 주장한다. 사회의 정의가 위협받을 때마다 정의의 수호를 외치던 정의구현사제단은 의협의 정의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공의들은 36시간 연속 근무하고 많을 때는 주 120시간까지 격무에 시달린다. 체계적 교육 시스템 없이 밀려오는 환자들을 보기만 하고, 이런 극한 상황에서 필수의료 전공의들은 그만둘 생각만 한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사라져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는데, 의대 증원 발표는 여기에 방아쇠를 당겼다.” 전국전공의협의회 회장의 주장이다.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이 제대로 보상받지 못하는 열악한 업무 환경 때문이고 의대 증원은 단지 집단행동의 불쏘시개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전공의들의 근무 환경은 상당 부분 비합리적이고 위계적인 수련 과정에서 기인한다. 1년 차에서 4년 차까지 수직적으로 위계화된 전공의 체계는 당직이나 일상적으로 행하는 많은 일들을 거의 전적으로 저연차들의 몫으로 돌리고 고연차로 갈수록 이런 업무에서 자유로워지게 한다. 4년 차가 되면 전문의시험을 핑계로 병원 업무에서 거의 벗어난다. 36시간 연속 근무와 주 120시간 근무 등과 같은 비상식적인 노예적 상황이 발생하는 조건들이다. 이런 과정을 이미 거치고 지도전문의가 된 교수들은 극한적인 노예적 상황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고 수련 과정에서 겪어야 할 당연한 통과의례로 여긴다. 이런 과정을 견디고 전문의 자격을 취득하더라도 고생에 대한 보상을 담보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의대 증원 반대의 진짜 이유다.

서울대 한승희 교수는 지적한다. “이번 사태는 의료문제를 넘어 의사를 길러내는 의학교육 전반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의대 교수들이 집단사직 결의에 앞서 깊이 자성해야 할 지점이다. 전근대적인 봉건적 수련 체계를 개선하지 않는 한, 전공의들의 집단행동은 언제든지 발생할 개연성이 있다. 교육병원의 비합리적인 수련 체계와 과도한 전공의 의존이 문제의 핵심이다. 필수의료 전공의에 대한 임금 보조는 문제의 본질을 호도한다.

의대생들은 왜 증원에 반대할까? 저학력자들의 의대 진입이 자신들의 자긍심에 생채기를 낼까 봐서일까. 의학교육의 질 저하에 대한 우려 때문일까. 의대 증원이 의료의 질 저하로 이어져 결과적으로는 국민의 건강권을 헤친다는 주장은 의사와 의대생들의 전형적인 엘리트 의식에서 나온다. 상위 5% 정도의 학력이면 의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충분하다. 상위 0.1%의 학력자가 의대로 몰리는 게 오히려 비정상적이고 국가적으로도 손실이다.

미래의 의료계를 이끌어가야 할 의대생과 전공의들의 교육을 책임진 교수들이 이들의 교육현장 이탈을 방조하고, 심지어 집단사직 결의로 이들의 집단행동을 방조하는 행태는 교육자로서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다. 의협, 의대생, 전공의, 교수들로 이루어진 의사사회의 견고한 이익공동체의 집단의식 발로로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모 국립 의대 보직교수들의 삭발 퍼포먼스는 교수들의 비교육적 행태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한 편의 블랙코미디다. 의대졸업식에서 의사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성찰을 구하는 학장이라도 있어 그나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이번 의료위기는 그동안 누적된 의료적폐 해소와 의료개혁의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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