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게 만나는 현지인, 오지여행의 진정한 즐거움 [세상에이런여행]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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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아니아의 섬 ② 솔로몬제도>

세계일주 스위스 커플과 공항 택시 공유
다이빙 클래스 운영하며 여행 경비 충당

소매치기 위협 피해 낯선 주택 들어가자
한국 어딘지도 모르는 집주인 선뜻 도움

숙소 주인과 예정에 없던 저녁 투어 나서
노상 장터에서 과일 사고 어울려 춤까지

파푸아뉴기니에서 불과 며칠 사이에 사귄 젊은 친구들 그리고 경찰관 캄보가 솔로몬제도로 떠나는 나를 배웅하러 공항까지 나왔다. 안심시켜주려는 배려에서인지 캄보가 포옹하며 말한다.

“솔로몬제도는 안전해요. 자유로운 영혼인 레미는 마음껏 다닐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언제 또 만날지 모를 친구들과 석별의 정을 나눴다. 그들과의 추억은 평생 지워지지 않고 가슴에 담겨 있을 터. 짧은 만남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을 감고 회상하는 머리에서 흐른다.

공항에서 만난 스위스 커플의 숙소에 따라가 코코아 음료수를 나눠 마셨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공항에서 만난 스위스 커플의 숙소에 따라가 코코아 음료수를 나눠 마셨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파푸아뉴기니 동부에 위치한 솔로몬제도는 동남쪽으로 뻗은 1000여 개의 섬으로 이뤄졌고 120개의 언어를 쓰는 섬나라다. 스페인은 1568년 섬을 발견하자 천연자원이 풍부할 것으로 생각하고 성경에 나오는 ‘풍요의 왕’인 솔로몬을 섬 이름으로 붙였다. 이후 1978년 독립할 때까지 솔로몬의 역사는 외세 침략의 연속이었다.

솔로몬제도에 도착해 환전을 하고 나니 택시기사들의 호객행위가 시작됐다. 그러나 터무니없는 금액에 바가지를 뒤집어 쓸 수는 없어 주저하는데 마침 비행기에서 만난 스위스 커플이 지나간다.

“혹시 시내로 가는 길이면 같이 타고 가는 게 어때요. 택시비도 나누고….”

내 제안에 그들은 반갑게 웃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도 좋지요.”

섬에 웬 차가 그리 많은지 교통체증이 부산보다 더 심하다. 시내까지 약 20km 거리를 가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다. 다행히 택시에 갇힌 시간은 스위스 커플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그들은 15년째 연애 중이며 1년 내내 세계 곳곳을 여행 중이라고 했다. 프로다이버여서 여행 중에 현지에서 다이빙클래스를 운영하며 여행경비를 충당한다고 했다. 내가 아직 가보지 못한 곳 중에서 좋은 여행지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다.

솔로몬제도 한 마을의 전경. ⓒ도용복 오지여행가 솔로몬제도 한 마을의 전경. ⓒ도용복 오지여행가

“다음에 필리핀의 블리보스 섬에 가보세요. 무인도인 그 섬은 여행자가 원하는 만큼 살고 나올 수 있고,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자생 생존을 체험하는 곳입니다. 자연과 하나가 된 원시적 삶을 만끽할 수 있으니 오지여행가 레미가 더 원할 듯해 적극 추천합니다. 디지털시대의 현재를 원시시대로 돌려놓는 곳이거든요.”

늘 가지고 다니는 작은 메모장에 ‘필리핀, 블리보스 섬, 무한자유의 원시’라고 적었다. 다음에 꼭! 아직도 가야 할 곳이 많이 남았다는 사실은 축복이다.

어느새 그들이 묵을 ‘코럴 시 리조트’에 도착했다. 리조트 직원이 건네는 환영 음료수인 코코넛을 나도 엉겁결에 한 잔 얻어 마시고 내가 머물 숙소로 출발하려는 찰라 그들이 붙잡았다.

“레미. 오늘 택시 타고 오는 시간이 참 재미있었어요. 감사의 보답으로 저녁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같이 드시겠어요?”

솔로몬 최고급 리조트의 레스토랑에 만찬을 초대받았지만 아쉽게도 정중히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이드를 동반한 오지마을 방문이 예정됐고 현지인들이 사는 주택가의 작은 아파트에 머물 예정이라 찾아가려면 시간이 꽤 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이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즐겁게 놀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어린이들이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즐겁게 놀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시장을 지나고 주택가를 벗어나 구불구불한 언덕길에 들어서니 건장한 체구의 청년들이 다가와 그림을 내민다. 호기심 많은 내가 고개 숙여 그림을 들여다보는 순간, 주머니 안으로 한 청년의 손이 쓰윽 밀려 들어왔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그의 손을 제지하고 소리를 질렀지만 행인들은 보고도 듣고도 모른 체한다. 혼자 해결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급박감에 손에 잡힌 청년의 손을 비틀며 제압하자 손을 뿌리치고 도망친다.

거리를 두고 적개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그들의 행동에서 그냥 물러날 것 같지 않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할렘 같은 어두침침하고 고불고불한 좁은 주택가는 불안을 더 가중시켰다. 달리 피할 방법이 없어 가까운 집으로 가서 마치 잘 아는 집인 양 문을 두어 번 두드린 후 고개를 들이밀었다. 흰색수염을 기른 서글서글한 인상에 대머리로 구릿빛이 돋보이는 속옷 차림의 솔로몬 아저씨가 나온다.

“길을 잃었습니다.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그는 다급해 보이는 외국인을 순순히 집안으로 받아준다. 나를 소개하자 대뜸 질문부터 던진다.

“한국이 어디 있느냐?”

메모지에 중국과 일본 사이의 호랑이 모양의 한반도를 그려 보이니 고개를 끄덕끄덕. 한국인은 처음 만난다면서, 숨가빠하는 나에게 주황색 열대과일 포도를 내민다. 방심하고 자만했던 것일까. 친절한 스위스 커플을 만나 경계심을 잃은 것일까. 나의 행동을 점검하듯 돌아보는 동안 서서히 소매치기 일당의 공포가 사라졌다.

안정을 되찾고 다시 미지의 숙소를 향해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장대비가 쏟아진다. 알려준 지도상의 숙소 근처에 왔지만 찾는 아파트는 보이지 않는다. 큰 나무를 우산 삼아 소낙비를 피하는데 아이들의 환호성이 거센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초등학교 저학년쯤일 아이들이 철버덕 철버덕 소나기를 반기며 소리를 지르는 장면에서 세상의 모든 아이들의 천진난만을 엿볼 수 있었다.

솔로몬제도 시장 상인들이 과일을 정리하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솔로몬제도 시장 상인들이 과일을 정리하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인근 주민들에게 묻고 물어 간신히 찾아낸 숙소는 아파트가 아니라 우리나라 시골집 길가의 도로보다 낮은 움막 같은 아주 작은 가정집이었다. 일부러 이런 숙소를 찾았으니 잘됐다 싶었다. 이미 해는 져서 예정된 일정은 내일로 미뤄야 했다.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변명으로 들렸을 텐데 숙소주인이 더 미안해하며 예정에 없던 저녁투어를 하러 가자고 앞장섰다.

이런 횡재가! 오지탐험의 ‘찐’은 예정이나 예상을 깨는 것에서 시작된다. 산골짜기의 노상좌판에서 상인들과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저렴하게 과일도 샀다. 버스킹 같은 시골장터의 라이브 공연과 전통춤도 볼 수 있었다. 솔로몬제도의 전통춤은 뉴질랜드의 하카와 매우 유사하지만, 노를 젓고 씨를 뿌리는 등 일상 그대로의 어부와 농부의 삶이 깃든 노동요라서 공격과 방어의 전투를 연상케 하는 하카와는 사뭇 달랐다.

한참 솔로몬 전통춤에 빠져 있는데 누군가 반갑게 인사한다. 스위스 커플이다.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내가 선창한 “얼씨구절씨구. 좋구나, 좋아!”로 덩실덩실 함께 춤을 추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한 교회 결혼식 리허설에서 신랑신부 지인들이 축가를 연습하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한 교회 결혼식 리허설에서 신랑신부 지인들이 축가를 연습하고 있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오세아니아 섬나라 여행의 특징은 나라 간의 직항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개 호주나 뉴질랜드를 경유해 새 목적지를 향해야 한다. 비행편이 매일 있는 게 아니어서 태풍 같은 악천후 때에는 꼼짝없이 며칠간 일정을 연기해야 한다. 솔로몬제도에서 그런 경우가 생겼다.

시간이 많아진 나는 솔로몬제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신호를 분석해 가야 할 곳을 결정하는 것은 오랜 여행 경험에서 나오는 나만의 노하우다. 보이는 것만큼 들리는 것이 중요하다. 멀리서 희미하게 퍼져 나오는 노랫소리가 흥미로워 발길을 돌린 곳에 교회가 있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보니 안에서는 결혼식 리허설이 한창이다. 그들의 축가가 노인 여행객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것 같아 쉽게 자리를 뜨지 못했다. 여행이란 이렇듯 ‘보물찾기’가 아닐까.

여행을 다니다 늦은 밤 지친 몸을 뉘고 천장을 보니 문득 맹자가 한 말이 떠오른다. ‘불위야비불능야(不爲也非不能也). ‘하지 않는 것이지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즉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지닌 능력보다 할 의지가 중요하단 말일지니. 이 먼 태평양의 외딴 섬나라 오지에 온 것만으로도 나는 행동했고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는가, 하며 씨익 자화자찬에 빠져 우쭐해진다.

도용복 오지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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