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진의 디지털 광장] 맨발걷기와 산복빨래방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맨발걷기 2000명 참가 7일새 마감
디지털 장벽 탓 실버세대 전화 쇄도
오랜만에 구독자와 직접 소통 경험
지구와 사람 몸 접촉으로 균형 회복
시민 만나려 빨래방 차린 일과 흡사
정보홍수·소외 속 언론 역할 찾아야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시민들이 화창한 날씨 속에 맨발걷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 정종회 기자 jjh@ 부산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시민들이 화창한 날씨 속에 맨발걷기를 즐기고 있는 모습. 정종회 기자 jjh@

기자는 고독한 직업입니다. 취재원과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성적 지지, 감성적 친밀함과 별개로 비판의 날을 언제나 벼려야 합니다. 인간관계뿐 아니라 어떤 사안을 대할 때도 빠져들지 않고 객관성과 냉철함을 유지하도록 훈련받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영상 플랫폼을 통해 넘쳐나는 정보가 뉴스를 대체한 시대, 레거시 미디어의 조상 격인 신문사 편집국 전화는 과거처럼 자주 울리지 않습니다. 신문 기자와 시민·독자의 접점은 포털 사이트 댓글이나 가끔 오는 제보 메일 정도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달 초 부산일보 모바일국 전화에 ‘불’이 났습니다. 오는 21일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여는 맨발걷기대회에 참가를 원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쇄도한 겁니다. 모바일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웹사이트와 모바일앱에서 손쉽게 부산닷컴 회원으로 가입하고 대회 참가를 신청할 수 있게 했는데, 왜 전화에 불이 났을까요.

실버세대 앞에 놓인 디지털 장벽 때문이었습니다. 어떤 웹사이트든 회원 가입 전에는 본인 인증 등 거쳐야 할 단계가 있는데 인터넷 사용이 익숙하지 않은 어르신들께는 회원가입부터가 장벽이었던 것입니다. ‘회원가입을 하지 않으면 맨발걷기 참가 신청이 불가하니 자녀나 주변 지인의 도움을 받으시라’고 안내해 드렸지만 개운치가 않았습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모든 주문을 화면 터치로 해결하는 시대가 되면서 멈칫거리게 되는 실버세대의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맨발걷기에 대한 뜨거운 관심 덕분에 2000명 사전 접수는 1주일 만에 마감되었습니다. 정보와 행동이 느려 미처 사전 신청을 하지 못한 어르신들을 위해 21일 오후 3시부터 현장 접수를 200명 더 받기로 한 것이 그나마 보완책이었습니다.

레거시 미디어의 한 종사자로서, 초고령화 도시의 시민으로서 실버세대가 관심 두는 분야에 무심했던 점을 반성했습니다. 청년 세대가 빠져 나가면서 초고령화로 돌진하는 비수도권의 한 축이므로, 실버세대의 디지털 장벽을 낮출 방안에 대해서도 지역사회의 체계적 고민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바일 업계에서는 ‘이용자’라 부르는 시민·독자와의 뜨거운 소통이 반갑기도 하고 조금은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뉴스를 다루는 미디어이자 하나의 플랫폼으로서, 활발하고 충성도 높은 회원과 구독자를 가능한 한 많이 모으는 것이 ‘플랫폼 대전환’이라는 과제 앞에 놓인 신문사들의 목표입니다. 젊은 세대에 비해 품이 많이 들 수도 있는 실버세대 회원 유치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앞으로 파크골프 등 다른 이벤트로 그 영역을 넓혀갈 예정입니다.

2000명 맨발걷기 신청 접수를 마감한 사흘 뒤 22대 총선이 치러졌습니다. ‘스윙보터’로 불리는 수도권과 충청이 정권 심판의 회초리를 매섭게 들었는데, 부울경에선 사전 여론조사와 달리 역결집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겨우 3석이던 부산의 야당 의석은 1석으로 쪼그라들었습니다. 정권 지지 여부를 떠나 지역 발전 관점에서 보자면 특정 정당에만 기대기보다는 여야가 비슷한 규모로 선의의 경쟁을 벌이도록 유도하거나, 총선마다 성과를 냉정하게 판단해 지역 다수당을 교체하거나 더 힘 싣는 방식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총선 결과 부울경은 기존 다수당에 힘을 더 싣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번에 선출된 선량들이 향후 4년 지역 유권자의 성원에 얼마나 보답하느냐에 따라 다음 총선이 판가름 날 테지요.

맨발걷기의 핵심은 맨몸의 인간과 지구가 아무 장애물 없이 바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지면의 위험물에서 발을 보호하느라 문명화 이후 인간이 신기 시작한 신발 때문에 지구와의 직접적인 접촉이 사라지면서 심신의 균형이 깨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2년 전 부산일보의 산복빨래방은 그해 각종 기자상을 휩쓸며 전국적인 화제가 되었고,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이라는 책으로도 엮어져 올해 원북원부산 선정 도서가 되었습니다. 압축 성장기 갖가지 이야기와 역사를 간직한 시민들과 직접 소통하려고 기자들이 빨래방을 열어 6개월간 주민들과 함께 웃고 울었던 이야기는, ‘언론판 맨발걷기’였습니다. 정보는 넘치지만 어떤 뉴스를 믿어야 할지 더 혼란스럽고, 온갖 SNS에 관계망은 더 촘촘해졌지만 그만큼 더 고독해지는 시민들에게 다가갈 미디어의 방법론도 결국 가림막을 벗어던지고 현장에서 시민들과 직접 소통을 늘리는 것 아닐까요.

이번 총선 이후 지역 정치권이 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지지받았다고 오만해질 일도, 더 쪼그라들었다고 좌절할 일도 아닙니다. 당의 조직력이든 후보 개인의 ‘밭갈이’든, 이전보다 훨씬 능동적인 유권자들과 직접 얼굴 맞대는 기회를 늘리는 방법뿐입니다.

지구와 인간, 시민·구독자와 미디어, 유권자와 정치인. 양쪽이 맨살로 부대끼며 균형을 맞춰가는 날을 그려봅니다.

이호진 모바일국장 jiny@busan.com


이호진 기자 jiny@busan.co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