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에 고통스러워야 한다”…전쟁 참상 기록한 ‘마리우폴에서의 20일’ [경건한 주말]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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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트로피를 손에 들고는 “이 영화를 만들 일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 감독이 있습니다. 바로 올해 3월 ‘마리우폴에서의 20일’(2024)로 오스카 장편다큐멘터리상을 받은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입니다.

우크라이나 영화로는 첫 오스카 수상작인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직후부터 20일간 항구 도시 마리우폴에서 벌어진 참상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감독인 므스티슬라우 체르노우는 AP통신 소속 영상기자로서 현장을 생생히 촬영했습니다. 화제를 모은 이 작품이 지난 6일 국내에서도 개봉했습니다. 극장에서 직접 관람한 후기를 옮깁니다.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Z’ 표식이 그려진 러시아 탱크들이 병원 주위를 포위합니다. 카메라는 병원 창문으로 이 모습을 몰래 촬영합니다. 이윽고 탱크 포신이 병원 쪽을 향해 돌아가고, 촬영팀은 황급히 창문에서 멀리 떨어집니다.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러시아의 침공이 임박했음을 예상하고 우크라이나 남부 항구 도시 마리우폴 현장을 찾은 기자들의 취재기를 담아낸 다큐멘터리입니다. 우크라이나 출신인 체르노우를 포함해 사진기자와 영상 프로듀서 등 3명의 AP통신 취재팀이 목숨을 걸고 촬영한 기록입니다.

영화는 침공 첫날인 2022년 2월 24일부터 시작합니다. “전쟁은 폭발음이 아니라 침묵으로 시작된다”는 체르노우의 말처럼 아직 시내는 조용하고 평화롭습니다. 그러나 이내 공습과 폭격이 시작되고 도시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됩니다. 임시 대피소로 변한 헬스클럽에 피난민이 몰려듭니다. 안락하고 안전한 침실에 있어야 할 아기들이 대피소 바닥에서 잠을 자고, 부모는 아이 걱정에 눈물을 훔칩니다.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는 러시아 측에서 ‘가짜’라고 주장하는 전쟁의 진짜 모습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러시아의 포격에 평생 살아온 집이 파괴된 중년의 여성은 울분을 토하고, 대피소에서 만난 어린 아이는 공포에 휩싸인 채 “죽고 싶지 않다”며 울먹입니다.

마리우폴은 날이 갈수록 처참해집니다. 러시아의 무차별 폭격은 사실상 민간인 학살입니다. 끊임없이 병원에 실려 오는 희생자들…. 4살짜리 아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 심폐소생술을 받는 장면은 차마 현실이라고 믿고 싶지 않습니다. 자식 잃은 부모는 참척의 고통에 짐승처럼 울부짖고, 분노에 찬 의사는 취재팀에 “푸틴에게 이 아이를 보여줘라”고 소리칩니다. 눈물과 분노를 참기 힘든, 지켜보기 고통스러운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현장에서 두 눈으로 이를 기록해야 하는 취재팀은 더욱 괴롭습니다. 체르노우는 “이건 보기 고통스럽다. 하지만 보기에 고통스러워야만 한다”고 읊조립니다.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안전을 위해 다른 외신 기자들은 진작 마리우폴을 벗어났지만, 취재팀은 시내의 한 병원을 거점 삼아 기록을 이어 갑니다. 끔찍한 비극은 멈출 줄 모릅니다. 생후 18개월 아기를 잃은 젊은 엄마의 절규가, 폭격 당한 산부인과에서 들것에 실려가는 임산부가 연신 충격을 안깁니다. 전기, 약품, 가스가 끊긴 가운데 의료진은 최선을 다하지만 역부족입니다. 쌓여 가는 시체를 감당할 수 없어 공무원들이 구덩이를 파고 집단 매장합니다. 취재팀은 한동안 이 미친 전쟁범죄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했지만, 인터넷이 끊긴 이후 영상을 외부에 전달할 수 없어 고심에 빠집니다.

러시아군 탱크가 마리우폴 시내까지 진입한 뒤로 상황은 더욱 급박하게 흘러갑니다. 영상을 외부에 공개하기 위해 우크라이나군 특수 기동대가 탈출 작전을 감행합니다. 이후 취재팀은 자동차 좌석 밑에 하드디스크 등을 숨긴 채 러시아 검문소 15곳을 통과해 점령지를 간신히 벗어나고 추악한 전쟁범죄를 세계에 고발합니다.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스튜디오 디에이치엘 제공

영화는 체르노우 기자의 담담한 내레이션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배경 음악, 핸드헬드 촬영기법 등을 활용해 긴장감과 몰입감을 조성합니다. 전쟁의 비참함을 단순히 글로 읽는 것과 시청각 자료로 접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 속 적나라한 참상은 그 어떤 극영화보다 강력한 반전(反戰)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만큼 후폭풍도 만만치 않습니다. 감정 이입을 잘하는 관객이라면 엔딩 크레디트가 모두 올라간 뒤에도 머리가 지끈거리고 울분이 가시지 않을 겁니다.

‘마리우폴에서의 20일’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다큐멘터리상을 비롯해 퓰리처상 공공보도상 등 여러 상을 거머쥐었습니다. 체르노우 감독은 지난 3월 오스카 시상식에서 “영화에는 미래를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바로 세우고 진실이 승리하도록 할 수 있다”면서 “이 상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공격하지 않은 역사와 맞바꿀 수 있다면 교환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조경건 부산닷컴 기자 pressjkk@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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