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모니카! 얕보지 마!… 이 작은 악기가 오케스트라로 뭉치면…
한국국제하모니카오케스트라
유럽서 공부한 뒤 하모니카 외길 걷는 박기국 회장 비롯
부산 남구에 거점 둔 창단 12년 된 실력파 오케스트라
들숨·날숨이 만든 인간적 음색으로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소프라노·알토·베이스·코드 하모니카 입체적 화음 연출
손안의 하모니카가 만드는 웅장하고 다양한 울림에 매료
하모니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합주 연습. 이원준 기자 lwj@
‘It’s nine o’clock on a Saturday(토요일 밤 9시가 되었네요).’
미국의 록 싱어송라이터이자 피아니스트인 빌리 조엘의 대표곡 ‘피아노 맨’의 첫 구절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사랑받는 이 명곡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간을 꼽으라면 단연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하모니카 연주일 것이다.
이 곡에서 빌리 조엘이 사용한 악기는 ‘다이아토닉 하모니카’ 중에서도 ‘블루스 하프’라 불리는 종류다. 주로 블루스, 록, 포크 음악에서 특유의 거칠고 애절한 음색을 낼 때 쓰인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하모니카는 학창 시절 음악 시간에 몇 번 만져본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모니카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다채롭다. 발음 구조와 음 배열, 연주 방식에 따라 구분되는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에 달한다.
역사도 깊다. 하모니카는 기원전 3000년경 중국의 전통 악기인 ‘생’에서 기원했다고 전해진다. 박통이나 통에 여러 개의 대나무 관을 꽂아 소리를 내는 형태다.
다만 현대적 의미의 하모니카를 누가 처음 발명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1821년 독일의 크리스찬 프리드리히 부시만이 발명했다는 설이 대표적이나, 그전부터 유럽에서 비슷한 형태의 악기가 판매되고 있었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국내에 하모니카가 들어온 역사는 비교적 짧다. 음악사 연구에 따르면 1907년 무렵부터 하모니카 수입이 이뤄졌으며, 공식적인 시초는 1928년 평양고등보통학교의 하모니카 합주단으로 전해진다. 오는 2028년이면 한국에 하모니카가 도입된 지 100주년이 되는 셈이다.
국내 학교나 일상에서 가장 흔히 접하는 악기는 ‘트레몰로 하모니카’다. 같은 음을 내는 리드 두 개가 위아래로 붙어 있어 ‘복음 하모니카’라고도 불린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특히 대중적으로 쓰여 일명 ‘아시안 하모니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하모니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합주 연습. 이원준 기자 lwj@
반면 북미 지역에서는 ‘다이아토닉 하모니카’가 널리 쓰인다. 트레몰로 하모니카와의 가장 큰 차이는 구조와 크기다. 보통 20~30홀(구멍)로 이루어진 트레몰로에 비해 다이아토닉은 10홀 정도로 크기가 매우 작다.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 덕분에 고개만 살짝 움직여도 모든 음계를 연주할 수 있으며, 빌리 조엘처럼 목걸이 거치대에 고정한 채 기타나 피아노를 치며 동시에 연주하기에도 적합하다.
여기에 유럽을 중심으로 클래식이나 재즈에 자주 쓰이는 ‘크로매틱 하모니카’까지 더하면 대중적으로 가장 사랑받는 3대 하모니카 라인업이 완성된다.
혼자서도 다채로운 소리를 내는 하모니카지만, 이 작은 악기들이 하나둘 모이면 또 다른 경이로운 무대가 펼쳐진다. 바로 ‘하모니카 오케스트라’다.
손바닥만 한 악기 수십 개가 모여 하나의 웅장한 오케스트라를 이룬다는 사실이 선뜻 그려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모니카 오케스트라는 현악기와 관악기가 가득 찬 클래식 교향악단 못지않은 깊이와 스케일을 자랑한다.
통상적으로 하모니카 오케스트라에서는 소프라노, 알토, 베이스, 코드 하모니카가 주역을 맡는다. 맑고 높은 음역대의 소프라노 하모니카가 주선율을 끌고 나가면, 알토 하모니카가 부선율과 풍성한 화음을 더한다. 여기에 음악의 뼈대와 리듬을 잡는 베이스 하모니카와 화성적 박자감을 입히는 코드 하모니카가 어우러져 거대한 입체감을 완성한다.
국내외에서 활동하는 전문 하모니카 오케스트라 단체도 단연 눈길을 끈다. 1980년대 중반 한때 단원 수가 300~350명에 달해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했던 영국의 ‘캠브리지 하모니카 오케스트라’부터, 세계적 권위의 독일 ‘세계 하모니카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활발히 활동 중인 국내의 ‘서울 솔로이스츠 하모니카 오케스트라’가 대표적이다.
부산에도 실력파 하모니카 오케스트라가 존재한다. 남구에 거점을 둔 ‘한국국제하모니카오케스트라’가 그 주인공이다. 박기국 회장이 감독 겸 지휘자를 맡고 있는 한국국제하모니카협회 산하의 이 단체는 2014년 창단된 부산·경남 최초의 하모니카 단일 구성 오케스트라다.
하모니카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합주 연습. 이원준 기자 lwj@
이들은 2015년 서울국제하모니카페스티벌 경연대회 노년부 대합주 부문에서 우승을 차지했을 만큼 뛰어난 기량을 인정받은 실력파 단체다. 그만큼 공연 일정도 숨 가쁘게 이어지는데, 내년 1월 부산에서 열리는 정기연주회를 시작으로 6월에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초청 공연을 떠날 예정이다.
취재진이 방문한 부산 남구의 한 연습실에서는 단원들이 연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약 20명의 단원들이 소프라노, 알토, 코드 등 자신이 맡은 역할에 따라 선율을 이어갔다. 악보 군데군데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형광펜 자국은 그간 치열하게 연습해 온 시간을 짐작게 했다.
이날 연습에서 박 회장은 캐스터네츠와 피아노 등으로 박자를 맞추며 단원들을 지도했다. 현장에서는 1970년대 대중가요인 ‘무인도’를 편곡한 곡과 블루스 버전의 크리스마스 메들리가 울려 퍼졌다.
한국국제하모니카오케스트라 단원 중에는 고령층이 많다. 가장 젊은 단원이 48세, 최고령 단원은 82세다. 대부분 10년 이상 하모니카를 잡은 베테랑들이다.
연주 내내 호흡을 조율해야 하는 악기 특성상 나이가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까. 박 회장은 “오히려 하모니카는 건강에 도움을 주는 악기”라고 설명한다. 관련 연구에 따르면 하모니카는 음계에 따라 바람을 불고 마시는 동작이 명확히 구분되어 있어 자연스럽게 복식호흡과 횡격막 호흡을 유도한다. 이 덕분에 폐활량 증진은 물론, 어지럼증이나 가래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도 보고된다.
연습이 끝난 뒤 박 회장과 대화를 이어갔다. 그는 부산에서만 20년 넘게 하모니카 교육을 이어온 ‘하모니카 외길 인생’이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라몬룰대학교에서 전문연주자 성악 석사과정을 마치고 파블로 카살스 음악학교 등에서 하모니카 교육 과정을 수료한 그는 귀국 후 시니어 대상 하모니카 교육과 함께 〈하모니카 교본〉(1~8권) 등을 출간하며 국내 하모니카 교육계의 입지를 다져왔다.
대중적 악기로 인식되는 하모니카는 사실 수십 가지가 넘는 종류가 존재한다. 베이스 하모니카, 다이토닉 하모니카, 크로매틱 하모니카, 베이스 하모니카, 코드 하모니카 모습(위)과 부산 하모니카 오케스트라 협회 박기국 회장(아래) 모습. 이원준 기자 lwj@
박 회장은 “2008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지역 문화예술에 보탬이 되고 싶었다”며 “그중에서도 하모니카를 선택한 건, ‘장난감 같고 저렴한 악기’라는 대중의 인식을 바꿔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유럽 유학 시절 수집한 희귀한 악기 보관품들도 소개했다. 독일의 악기 명가 호너(Hohner)사에서 제작한 하모니카 전용 위생 테스트 도구 ‘이그제미나(Examina)’가 대표적이다. 매장에서 하모니카를 판매할 때 손님이 입을 대지 않고도 위생적으로 소리를 점검할 수 있도록 만든 풀무 형태의 도구다.
1920년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롤모니카(Rolmonica)’도 눈길을 끌었다. 자동 피아노의 원리를 접목한 하이브리드 악기로, 손잡이를 돌리며 바람을 불어넣으면 롤에 뚫린 구멍에 맞춰 연주가 완성되는 방식이다.
박 회장은 “하모니카 악보에는 숫자가 함께 적혀 있어 악보를 잘 읽지 못하는 어르신들도 금세 배울 수 있다”며 “휴대성도 뛰어나 언제 어디서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최고의 악기”라고 애정을 드러냈다. 이어 “부산이 ‘노인과 바다’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문화와 바다가 어우러진 활기찬 도시로 만들고 싶다”며 “작은 하모니카가 만드는 웅장한 울림에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덧붙였다.
빌리 조엘의 음악처럼 잊고 있던 추억을 불러오는 악기, 하모니카. 하모니카는 들숨과 날숨 사이에 가장 인간적인 음색을 담아내는 악기다.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가는 이 작은 악기가 홀로, 또 함께 모여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선율이 오늘도 부산에 은은한 온기를 더한다.
김준현 기자 joon@bus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