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빈집, 또는 공가(空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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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 잠시 멈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곳은 내가 다녔던 중학교가 있고, 어머니한테 가려면 거쳐 가야 하는 곳이라 나는 아직도 거기를 '우리 동네'라 한다. 우리 동네 근처에 30여 년 된 5층짜리 아파트 몇 동이 고층 아파트로 재건축되면서부터 그 일대는 재건축 바람이 불고 있다. 낡고 오래된 주택이 많은 동네지만 교통편이 좋은 데다 지하철까지 생기면서 우리 동네는 일찌감치 건설사들의 입질에 오르내렸다는 것이다.

그곳이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자 주변의 가게 대부분은 부동산 중개사무실로 바뀌었고 '최고의 명품 아파트로 보답하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이 여기저기 내걸렸다. 빈 가게의 유리문이나 벽에는 붉은색 스프레이로 '공가(空家)'라고 적혀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다는 뜻에서 '공가'라고 썼을 테지만, 같은 뜻의 '빈집'과는 느낌이 달랐다.

마음껏 메울 수 있는 '빈집'
재건축으로 빼앗긴 '공가'

인구감소 추세대로 가면
많은 아파트 곧 비워질 것

공가는 욕망이 뚫은 검은 구멍


'빈집'은 누구나 그곳을 드나들어도 되고, 보는 이의 마음대로 무엇이든지 메울 수 있음을 암시하는 문학 뉘앙스마저 설핏 풍긴다. 또한 '빈집'이라는 낱말을 입에 올리는 순간, 체적을 덜어낸 듯 홀가분하다.

'공가'는 으르고 공갈하는 누군가의 눈초리가 스민 듯하다. 재건축조합원일지라도 많은 추가부담금을 물어야만 아파트 한 칸을 차지할 수 있으니, 그럴 형편이 못 되는 이들에겐 재건축은 으름장과 공갈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게 재건축은 내 집을 빼앗기고 변두리로 내몰린다는 뜻이다. 다수들에 의해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합의는 했지만, 내 집을 웃돈 얹어 다시 매입하게 해 놓은 건설사의 셈법을 따져 볼 언턱거리도 없다. 공가 여기저기 붉은색으로 그어진 가위표는 헌 집을 매끈한 새집으로 바꿔주는데 입도 벙긋 말라는 협박 같았다.

사람들이 떠난 빈집마다 쓰레기더미들이 널브러졌다. 이리저리 흩어져있는 빗자루 몽둥이나 사금파리, 헌신짝 등만이 한때 그곳에 사람이 살았음을 일깨워주었다. 머지않아 가림막이 세워지고 빈집들은 순식간에 부서졌다. 주변의 주민들과 학교 측에서 '먼지와 소음을 일으키는 ○○건설사는 당장 공사를 중지하라'라는 현수막을 내걸었지만, 공사는 착착 진행되었다. 거푸집들이 점점 올라가고 크레인이 분주히 허공을 휘젓는가 싶더니 어느덧 삼천 세대가량의 아파트가 모두 지어졌다. 시야는 고층아파트에 가려 꽉 막혔다.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기 전의 우리 동네 모습이 그새 가물거렸다. 마트 입구에서 골목으로 들어서면 피아노교습소가 있었다. 삐죽 열린 철 대문 틈으로 수돗가나 꽃밭이 보는 집, 담 너머로 무화과나무가 보이거나 담에 장미 넝쿨이 휘감긴 집들도 있었다. 골목 모퉁이의 점집을 지나면 버스정류장으로 연결되던 긴 계단이 있었다. 골목에는 이따금 고장 난 시계나 텔레비전을 산다는 고물쟁이 아저씨의 목소리가 확성기를 타고 흘렀다.

오밀조밀했던 동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만 시야를 턱 막았다. 그야말로 상전벽해였다. 재건축으로 주택들이 허물어지는 동네가 우리 동네뿐 아니다. 도심을 지나다 보면 곳곳이 재건축조합건립을 축하한다는 현수막들이 나풀거린다. 어딜 가나 주택을 부수고 아파트를 짓느라 중장비들이 으르렁거린다. 사람들이 소음과 석면가루에 둔감해질 대로 둔감해진 이야기는 별도의 성토 거리다.

인구절벽을 한탄하는 신문기사의 앞뒷면으로 아파트 분양 광고가 나온다. 지금도 변두리나 시 외곽의 오래된 아파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 많다. 인구감소가 이 추세대로 간다면 도심의 많은 고층아파트는 예상보다 빠르게 비워질 것이다. 3000세대의 저 아파트는 내년 봄에 입주란다. 입주도 안 한 저 많은 아파트가 내 눈에는 벌써 공가로 보인다. 욕망이 뚫어 놓은 검은 구멍 말이다.


이병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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