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강>섬진강의 기원
팔공산 데미샘서 발원 `명경지수`
섬진강의 유래는 어디이며 또 물줄기는 어느 산자락에서 시작될까.
가수 정태춘은 섬진강변에 서서 아침햇살에 신선하게 터지는 박꽃 넝쿨을 바라보며 리빠나 모노 데스네(좋은 것이군요) 를 연발하는 일본인 관광객들을 노래했다.
그의 노래를 잠시 들어보자.
,섬진강 물맑은 유곡나루.
아이스박스 차고 허리차는 고무장화 신고 은어잡이 나선 일본 관광객들, 긴밤내내 미끈한 풋가시내들 서비스 한번 볼만한데, 등살 푸른 섬진강 그 맑은 몸값이 6만엔이란다.
그런데 섬진강의 유래는 어디서 비롯됐는가.
원래 이 강은 고운 모래가 지천으로 깔려 모래내 모래가람 다사강(다사강) 두치강(두치.두치강) 따위로 불렸다.
일제시대에는 그 고운 모래에 탐을 낸 일본인들이 배로 실어가기도 했다고 유역민들은 증언한다.
고려 우왕 때인 1385년 강 하구에 왜구떼가 침입하자 수십만마리의 두꺼비가 울부짖어 왜구가 광양쪽으로 피해갔다는 전설이 내려오면서 두꺼비 섬(섬)자를 붙여 섬진강(섬진강)이라 불리게 됐다.
물론 신칸센 왕복기차값에 불과한 6만엔으로 입안에 살살 녹아드는 은어 소금구이를 그리며 은어잡이와 기생관광에 나선 일본 관광객들은 왜구(?)가 아니다.
또 옛날의 두꺼비 울음도 이젠 잦아 들었다.
그러나 정작 섬진강이 정말 좋은 것 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우리보다는 일본인들이 더욱 철저하다는 것은 어쨌든 씁쓸한 대목이다.
이제 섬진강의 발원지를 찾아 가보자.
발원지는 강의 족보와 같다.
보통 발원지는 강 하구에서 전 수계를 포함,가장 먼거리에 위치한 지류의 출발점을 일컫는다.
산경표(산경표)에 따르면 섬진강은 강은 산을 넘지 못한다 는 산자분수령(산자분수령)에 따라 백두대간과 호남정맥,금남.호남 정맥을 경계로 수계를 이루며 유역권 삶도 독특한 모습을 나타낸다.
택리지 연려실기술 등은 마이산을,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리승람 등은 지리산을 섬진강의 발원지로 기록했다.
그러나 지리산은 어림없는 이야기이고 현재는 지도상의 계측과 현장답사 등을 통해 전북 진안군 마이산과 백운면 원신암리 두 지점으로 압축되고 있다.
그런데 진안군을 상징하는 마이산의 숫마이봉 화암굴의 약수터가 발원지라는 얘기는 그 산의 신령스러움과 약수를 마시면 옥동자를 낳는다는 전설 때문에 고집스럽게 주장되는 경향이 있다.
사실 거리상으로 보자면 팔공산 산줄기인 진안군 백운면 원신암리 상추막이골 데미샘이 엄연한 발원지다.
원신암리 마을 들머리엔 섬진강 발원지 마을 이라는 입간판이 버티고 서 신비로움을 준다.
그러나 이 마을은 주인 잃은 집들이 이곳저곳 휑뎅그레 널려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자아냈다.
섬진강 상류지역은 사람들이 자꾸만 떠나는 오지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7대째 이 마을에서 살아온 김세두씨(57)는 "한때 30가구가 오손도손 계곡을 끼고 살았지만 이 골짝에서 도대체 먹고 살 길이 없어 도시로 다들 떠나고 7가구 정도의 노인들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원신암리에서 발원지까지 올라가는 길은 험했다.
주변 산자락은 한때 목장으로 개발돼 생채기를 드러냈지만 상추막이골은 짙은 녹음으로 잡인의 근접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같은 금역을 따라 옥처럼 맑은 명경지수가 도란도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발원지인 데미샘엔 광양제철소 환경동우회인 송암회에서 몇해전 세운 섬진강발원지 화강암 비석이 놓여 있다.
한줌 손으로 떠서 마신 섬진강 첫물은 신비로운 느낌과 함께 차갑고도 부드럽게 입안을 적셨다.
그런데 이곳 마을사람들은 먹는 물에 관한한 최대한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1급수에 해당되는 맑은 물이 마을을 가로 질러 흐르지만 빨래나 흙묻은 손을 씻는 허드렛물로 사용할 뿐 무심하기만 하다.
원적골이라는 마을 뒷산 골짜기에다 간이상수도를 마련하고 섬진강에서 가장 맑은 물만 먹고 있는 것이다.
이들 주민들은 대부분 배추 무 고추 등 고랭지채소를 길러 생계를 꾸린다.
그러나 요즘 돼지 염소 등을 키우는 축사가 들어서 발원지의 명성을 빛바래게 하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그러나 섬진강의 아픈 역사를 잘 알고 있다.
한국전쟁 때 빨치산 전북도당이 자리잡았던 회문산에서 덕유.지리산을 건너가던 길목인 팔공산 자락의 이곳 섬진강 발원지는 한때 핏빛으로 얼룩졌다.
도랑을 타고 며칠이나 핏물이 흘러내렸고 마을은 적성부락이라는 오명을 안기도 했다.
어디 이곳 뿐이랴.
진안 임실 순창 남원 곡성 구례를 거쳐 경남 하동 화개장터에 이르기까지 섬진강은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가장 통렬하게 앓았던 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