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경제 야사] <23> 인물편 김지태 ① 광복이전 기업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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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좌천동 재력가 집안서 출생

자명(子明) 김지태(金智泰)는 부산 지역 사회에 너무나 큰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기업인으로서의 그의 생애는 광복 전후 부산경제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1908년 부산 좌천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산에서 12대를 살아왔고 조부 김채곤은 통도사 신도회장을 맡았을 뿐 아니라 육영제(育英齊·부산진초등학교 전신)라는 학교를 세울 정도의 재력가였다.

그리고 아버지 김경중은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개화된 지식인이기도 했다.

그런 집안에서 태어난 김지태는 부산공립보통학교와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상고)를 졸업했는데 재학 시절엔 축구선수였다고 한다.

1927년 그의 나이 20세 때 동양척식주식회사(이하 동척) 부산지점에 입사했다. 그 시절 그는 정공단(鄭公壇) 옆에 부산정묘학교란 야간학교를 설립하여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교사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때 과로한 탓이었을까 동척 재직 중 폐결핵에 걸려 5년 만에 회사를 그만두면서 그 회사 울산농장의 땅 2만평을 10년 분할상환 조건으로 불하받았다. 이 땅에서 수확한 벼는 분할상환금을 갚고도 매년 100석 이상이 남았을 뿐 아니라 그 땅을 담보로 대출도 가능했다고 한다.

2년여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병세가 호전되자 이 농장을 바탕으로 1934년 부산진직물공장을 인수하여 기업인으로서 첫 출발을 했다. 범일동에 있던 이 공장은 방직기 40대에 종업원 70명의 인조견 생산회사였다. 그러나 경험 부족과 큰 기업과의 경쟁으로 1년반 만에 회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빚만 졌다.

첫 사업에 실패한 그는 재기를 위해 무엇을 할까 고심을 하고 있던 중 평소 친분을 쌓은 직물도매상 하기노 상점의 소개로 일본 오사카에 있는 이시이(石井) 철공소를 찾아갔다. 거기서 고속 권지(捲紙)기기 일체를 주문한 후 3개월간 그 공장에서 실습을 했다.

그리고 귀국하여 울산농장을 담보로 부산 제2금융조합에서 융자를 받아 1935년 9월 범일동에서 조선지기(紙器)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원료는 일본 굴지의 제지회사인 왕자제지와 태양제지에서 공급받았는데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회사설립 1년 뒤인 1937년 중일전쟁으로 전쟁 특수까지 겹쳐 회사는 더 한층 활기를 띠었다. 사업에 자신이 생긴 그는 지류생산업에 머물지 않고 식산은행 부산지점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지류 무역업에까지 사업을 확장했다. 재운이 있었던지 오사카에서 물품을 배에 싣고 부산으로 오는 사이 값이 폭등하여 횡재를 하기도 했고 창고가 모자라면 공장 부근의 소 마구간을 빌려 물품을 쌓아 두었다고 한다.

그는 부동산업에도 손을 대 부산뿐 아니라 김해와 동래,경주에까지 진출해서 기존 울산농장 외에 동래와 김해의 농토를 중심으로 목산(牧山)농장을 설립하는 한편 부산부동산회사까지 설립했다.

이처럼 지류와 부동산업으로 거대자본을 축적한 그는 1943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조선주철공업합자회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주물 위주의 기계류를 생산했는데 때마침 태평양전쟁 중이라 군수품 공업의 호경기에 편승할 수가 있었다.

그 무렵 김지태는 38세 젊은 나이로 부산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사람 중 호별세를 가장 많이 낼 정도로 재산가로서의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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