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는 한국 불교의 당당한 한 축
승가교육·수행 면면히 유지
"내 본분사도 모르는데 어떻게 남의 구족계를 줍니까?"
"비구니계의 수장이시니 소임에 적임자입니다."
"글을 몰라 계목을 읽을 수 없습니다."
"기역니은부터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눈이 침침해 계목을 읽지 못합니다."
"계본을 써 드리겠으니 사양하지 마십시오."
당시 81세의 고령이었고, 백내장으로 한 쪽 눈이 안 보이는 상태였음에도 1982년 조계종단에서 주관한 단일계단에서 비구니승 최초의 전계화상으로 추대된 정행 스님과 일타 스님의 대화다. 애써 사양하고 애써 종용하는 비구니와 비구 스님의 훈훈한 일화로 지금까지 한국 승가에서 회자되고 있다.
비구니는 비구와 함께 불교 승단의 두 축이다. 그러나 그동안 불교계에서는 비구니 스님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위상이 상당 부분 폄하돼 왔으며, 법맥의 흐름조차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최근 나온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예문서원)이라는 논문집은 그같은 비구니 스님들의 삶과 수행 과정, 법맥을 최초로 총괄 정리했다는 점에서 교계의 이목이 쏠려있다.
이 책을 엮은 이는 전국비구니회. 1968년 발족한 '우담바라회'를 전신으로 하여 교육과 수행, 포교 및 복지의 역량 있는 실천을 위해 결성됐다. "한국 비구니 승단의 여법한 교육과 수행상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도 현실에서의 위상은 그렇지 못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이 그들이 밝힌 발간 이유다.
그렇다면 그런 한국 비구니 법맥의 흐름은 언제부터 시작된 걸까?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국 비구니사에는 쟁쟁한 스님들이 많았다.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불자는 신라 모례의 누이 사씨(史氏)를 들 수 있으며, 이후 삼국시대에는 일본 최초의 비구니가 된 선장 스님, 일본 천왕의 병을 '유마경' 강설로 쾌유시켰다는 법명 선사 등이 이름을 떨쳤다. 이미 한국 불교의 시작과 함께 비구니의 수행이 불교 문화의 한 토대가 됐던 것이다.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쇠미해진 불교를 근대에 중흥시킨 인물로 누구나 경허 선사를 지목한다. 쓰러져 가는 선풍을 붙들어 일으키고 근대 선수행의 새벽을 연 독보적 비구 스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비견되는 비구니 스님이 있다. 묘리당 법희(1887~1975) 선사가 바로 그다. 경허 선사의 법제자인 만공 선사로부터 직접 법을 받았으며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을 일으킨 이다.
그와 만공 스님의 일화 한 토막. 어느 날 만공 선사가 만해 스님이 읊조린 '설한(雪寒)에 도화(桃花)가 조각조각 나르네'라는 오도송 한 구절을 두고 "흩날린 꽃송이 어느 곳에 있는가?"라며 대중에게 한 마디씩 일러 보라고 하니, 법희 스님이 이르기를 "흰 눈이 녹아지니 한 조각 땅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만공 선사는 "자못 일편지(一片地)를 얻었도다"라며 칭찬했다.
법희 스님이 우리나라 근현대 비구니 선맥의 중흥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디게 된, 정식으로 법을 인가받는 순간이었다.
대강백으로 이름난 비구니 스님도 있었다. 정암당 혜옥(1901~1969) 스님이 대표적인데, 그는 불과 15세 때 사미니 신분으로 청암사 사부대중을 모아놓고 당당하게 법상에 올라 '초발심자경문'을 강설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밖에 세속에서 신여성 문필가로 이름을 떨쳤지만 38세 때 수덕사 견성암에서 한소식을 접한 후 25년 동안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던 일엽(1896~1971) 스님, 현대 한국 불교정화운동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운문사 비구니 강당을 개설하면서 근대 이후 3대 법사 중 한 사람으로 불리는 금룡(1892~1965) 스님 등 비구니 스님들은 한국 승가에 뚜렷한 족적을 남겨놓았다.
현재 비구니 스님들이 주로 활동하는 곳은 동학사, 봉년사, 삼선승가대, 운문사, 청암사 등 5대 강원을 비롯해 수덕사 견성암 등 전국 39곳에서 선원이다.
전국비구니회는 그같은 곳에서 묵묵히 수행과 교육을 통해 불도에 전념해왔던 비구니들의 모습을 통해 비구 중심의 한국 불교현실을 타파하고 당당한 승가의 일원으로 수행전통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고 있다.
"한국 불교교단의 당당한 한 축을 맡고 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숭고하고 고매한 선각의 빛나는 과거를 반추해 모든 불자의 불법수행에 등불이 돼야 할 것"이라는 전국비구니회 회장 명성 스님의 당부가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임광명기자 kmyim@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