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내원사 암자 노전암 음식 '봄' 차린 공양에 세상번뇌 훌~훌

봄이 먼저 오는 곳은 어디일까? 아무래도 무채색의 도시보다는 새싹이 돋고 꽃이 피는 산과 들일 게다. 성마른 마음에 봄을 찾아 나섰다. 경남 양산시 하북면 용연리 노전암(爐殿庵)은 내원사의 암자로 사찰음식이 맛깔나기로 이름이 났다. 소문을 듣고 전화했다고 하니 "취재는 안 되지만 밥은 한 그릇 줄 수 있다"는 애매한 답변이 돌아왔다.
내원사 주차장에 도착한 뒤 산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니 노전암이 나왔다. '큰스님'이 대웅전에서 불공을 드리는 동안 주방 옆의 방에서 기다리라고 했다. 주방에서는 점심 공양 준비가 한창인지 고소한 냄새가 스며 나온다. 참기름 냄새에 고추장을 볶는 냄새가 섞여 있는 것 같다. 사진기를 꺼내니 주지 스님의 허락없이는 절대로 사진을 찍을 수가 없다고 한다. 역시나 밥만 줄 모양이어서 마음이 금세 어두워졌다.
주방 쪽을 바라보니 비구니 두 분과 공양을 도와주는 공양주 두 분이 나물을 무치고 반찬을 밥상으로 옮기느라 분주하다. 꽤 여럿이 둘러앉아 먹는 밥상을 4층까지 차곡차곡 포개어 쌓는다. 작은 비구니 암자에 평일인 데도 공양하러 오는 사람이 많은 모양이었다. 정오가 넘었는 데도 염불소리는 낭랑하니 그칠 기미가 안 보인다. '염불을 하면 배도 고프지 않나?' 배가 고프니 심술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오후 1시 가까이 되어서야 재가 끝나고 노전암 주지 능인(69) 스님을 만날 수 있었다. 19세에 출가해 이곳에서만 50년 가까이 있었다고 했다. '능히 인내한다', '능인(能忍)'이라는 법명으로 공양주 스님으로 노전암에서 평생 살아온 게 우연치고는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점심 공양이 나왔다. 그런데 도대체 반찬 가짓수가 몇 가지인가? 세어보니 무려 23가지이다. 사실 시장기까지 반찬에 더해져 24가지다. 대구에서 왔다는 한 보살은 "다른 절에는 기껏해야 반찬이 3∼4가지에 불과한데 여기는 한정식 집에서 먹는 것 같다"며 감탄을 한다. 그 옆의 보살은 "친정어머니가 해주는 반찬 같아서 너무 좋다"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는다.
반찬 가운데 우선 열무김치가 단박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지금도 주방을 지휘하는 능인 스님은 "봄이 다가와 어제 열무김치를 새로 담갔다. 열무김치는 담가서 금방 먹거나 아니면 푹 익어야 맛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겨우내 먹어서 군내 나는 배추김치 대신 아삭하게 씹히는 열무김치는 새봄을 알리는 것 같다. 사찰음식 아니랄까봐 야채들이 줄줄이 퍼레이드를 한다. 콩나물, 미역나물, 파래나물, 취나물, 고사리 무침, 토란 줄거리, 상추, 오이와 고추, 아주까리 잎, 우엉 조림, 당근으로 만든 산적, 매실장아찌, 김치 등등이다. 인공 조미료 하나 가미하지 않고 전부 천연조미료로 만든 것들이다. 밥은 아까 장작불에 가마솥으로 하는 것을 보았다.
저쪽 밥상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난 다이어트 중인데 벌써 두 그릇째야." "집에서는 취나물도 질겨지던데, 여기는 참 부드럽네. 어떻게 하는 거지?"
스님은 따로 쑥밥을 먹고 있었다. 별도의 작은솥에 쌀을 넣은 다음 그 위에 쑥을 넣고 찐 것이다. "옛날에 가난할 때 먹던 음식인데 신도 한 분이 쑥을 직접 캐서 들고왔다"며 먹어보라고 숟가락으로 쑥밥을 떠준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 중에 인삼, 쑥, 마늘이 으뜸이라고 하는데 쑥밥의 맛은 사실 잘 모르겠다. 쑥밥의 향을 느껴보려 애를 쓰며 그렇게 오래 염불을 하면 시장하지 않냐고 물었다. 스님은 "염불을 하지 않으면 소화가 안되어 밥이 잘 안넘어간다"고 했다.
입맛이 없기 쉬운 봄에는 무엇을 먹으면 좋냐고 물었다. "된장을 지져서 봄에 나는 쑥을 넣어 끓이면 봄에는 칼칼한 맛이 나지. 봄에는 열무김치에 도라지를 볶고 미역나물, 파래나물, 감자와 토란을 넣고 국 끓이고, 쑥국도 하고 미나리 시금치 나물로 먹으면 좋지. 겨울 지난 묵은 김치는 시래기 끓여먹으면 그만이고. 오이와 풋고추 상추쌈도 어울리고. 그런데 냉이는 음력설을 쇠면 맛이 없어져."
스님은 봄에는 나물을 많이 먹으라고 했다. 미나리는 논에 나는 나물, 시금치와 취나물은 들에 나는 나물, 미역과 파래는 바다에 나는 나물이다. 노전암 반찬 가운데 매실장아찌를 빼놓을 수 없다. 사철 먹는 매실장아찌는 매실 농축액을 빼고 간장에 설탕 넣고 담갔는데 달콤하다. 잘 먹고 났으니 "절 음식은 다 웰빙음식이지요?"라고 아부성 발언을 했다. 그랬더니 "대한민국 음식은 다 웰빙이다. 식당에서 사 먹는 것 말고 어머니가 해주는 반찬은 역시 다 웰빙"이라고 이야기한다. 채소에 된장과 나물, 거기다 더 얹어봐야 조기 한 마리의 엄마 밥상이 웰빙이 아닐 리 없다는 것이다.
노전암의 음식은 짭조름하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고 했다. 간장, 참기름, 깨소금으로 간을 해 간이 딱 맞는 데도 인공조미료에 길이 들다보면 그런 이야기를 한다. 스님은 양산대의 요청으로 양산대에서 사찰음식 20여 가지로 전시회를 연 적도 있다. 스님은 음식의 비법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정성과 손맛, 그리고 간이 딱 맞아야 맛이 있다. 가족이나 대중에게 맛있게 먹여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음식을 하다보면 자연히 맛이 있어진다고 한다.
노전암에 오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밥이 맛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는 사람들이다. 왜 그렇게 하시냐고 물었더니 "여러 반찬으로 밥 맛있게 먹으라고 그런다"고 대답했다. 이제 그만 가야겠다고 인사를 하자 봄에 또 밥 먹으러 오라고 한다. "그때는 반찬이 달라지느냐?"고 묻자 "나물 한두 가지가 더 있으려나" 한다. 바람을 쐬는 스님을 뒤로 하고 절을 나서자 절 입구의 나무에 까치가 두 마리 앉아서 울어댄다. 개울에는 겨우내 얼었던 물이 졸졸졸 하며 흐른다. 절 앞 나무에는 연등이 꽃처럼 열려 있다. 까치가 우니 반가운 손님이 오려는 모양이다. 반가운 손님은 바로 '봄'이다.
글·사진=박종호 기자 nleader@busan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