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 보문당(普門堂) 정일(淨日) 스님 - 부산 소림사 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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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야말로 정진하는 힘 ! 주저하면 깨달음은 없느니…'

믿음이 바로 정진의 힘. 의심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신심으로 열심히 수행할 것을 강조하는 보문당 정일 스님. 강원태 기자 wkang@busanilbo.com

"신심(信心)이 없는 수행자는 무기 없는 군인과 같다. 먹고 살 걱정 하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면 호법선신(護法善神)이 반드시 도와주어서, 물이 있으면 고기가 모이듯이 자연히 살아가기 마련이니 열심히 정진하라. 부처님의 참 제자가 되어 진리를 알려면 부지런히 정진하는 길 밖에 없다."


부산 동구 초량동 소림사 회주 보문당 정일(75) 스님은 "믿음이 바로 정진의 힘이다. 이를 바로 하지 못하고 의심하여 주저하면 큰 깨달음을 배우고 익히지 못하여 범부의 길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겨 수행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도심지의 수행 전법 포교도량

소림사는 도심지 사찰로서 부산 불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 비구니 수행도량이면서 도심포교 활동의 센터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특히 선지식 초청 법회와 산림(山林)법회는 60년 세월을 이어와 전국적으로도 유명하다. 정일 스님은 "저보다 앞서 이 절을 맡아 운영하신 여러 스님들의 뜻을 이어가는 것이 제가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라며 꾸준히 웃어른의 뜻에 거슬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한다.

-남이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 수행자의 자세다

"우리 스님을 사람들은 인욕보살이라고 합니다. 저희들이 보아 넘기기 어려운 일인데도 스님께서는 마음에 두시지 않는 일이 많습니다." 정일 스님의 상좌로 지금 주지를 맡고 있는 혜전 스님의 말이다.

"도회지에서 부처님 법대로 살려면 어려운 일, 겪기 힘든 일이 많지 않습니까? 스님께서는 부처님 말씀이 아닌 것은 하지마라, 경전에 어긋난 언행은 하지마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무슨 일을 하든 부처님 법대로 충실히 하라고 늘상 말씀하십니다."

-젊었을 때 더 잘 배우고 더 노력했으면…

정일 스님은 1952년 19세에 출가했다. "나이 들고 보니 아쉬운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내가 왜 출가했느냐. 부처님을 알고 싶고 부처님과 닮은 삶을 살고 싶어 출가한 것이 아니냐. 그런데 세월을 보내고 보니 내가 왜 젊었을 때 더 많이 배우고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는가 하는 마음이 자꾸 듭니다."

정일 스님은 금광(金光) 스님의 상좌다. 금광 스님은 1950년대 일본 불교 잔재를 청산하고 청정가풍의 수행을 다짐한 스님들이 운문사에 모였을 때 초대 주지를 맡은 스님이다. 금광 스님은 통도사 강주였던 혜륜 스님을 모시고 운문사에 비구니 강당을 설립했으며 자신도 경학에 밝아 비구니로서 강단에서 경전을 강설했다. 정일 스님은 그러나 당신의 스승처럼 경학을 많이 공부하지 못했다고 한다.

"정화 이후 운문사에 들어간 저희들은 지금처럼 공부에 몰두할 환경이 아니었습니다. 해야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도량정비도 예삿일이 아니었지요. 큰 법당 지붕 위에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여자이지만 저희들이 지붕 위에 올라가 그 풀을 다 뽑았습니다. 겨울엔 꽁꽁 얼어붙은 냇물에 가서 얼음을 깨고 물을 길어왔습니다. 그 당시의 고생이야 말로 어찌 다합니까. 그런데도 저희들은 중이 되면 그리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어른 말씀을 어기지 않고 해냈습니다."

-개울 건너 재 넘어 가는 길, 그 길이 그리도 힘들었다

"운문사 가는 길은 지금은 편하지요. 길도 잘 닦여 있고 교통도 편하지 않습니까. 50여 년 전 그때는 달랐지요. 기차를 타고 경산에서 내립니다. 동곡재를 넘어가면 또 큰 개울이 있지요. 지금은 운문댐이 된 그 개울입니다. 겨울이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맨발로 그 개울을 건너고 나면 찬 물에 온몸이 시리고 아픈 것은 말로 할 수 없었지요. 그렇게 한번 나들이에 하루가 다 갔습니다. 먹고 입는 것 또한 궁박하기 그지 없었지요. 지금 사람들에게 그런 옛 일을 얘기하면 '정말 그랬을까?'할 정도였습니다."

-주지 안할려고 도망다녔는데…

정일 스님이 소림사 주지를 맡은 것은 1970년이다. 스님은 "주지 안할라꼬 몇 번이나 도망갔는데 결국 맡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형이 맡고 있다가 돌아가셨습니다. 다른 사형들이 '네가 맡아라. 우리가 도와줄게' 해서 마지못해 맡게 된 것이지요. 절집에서 주지가 할 일은 아무나 못합니다. 저로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지요. 그런데도 어떡합니까. 해야 할 일이라면 해야지요."

산중의 큰 절도 아니고 도심지에서 한 사찰을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스님은 일을 맡은 바에는 해야할 일에 충실히 하겠다는 큰 원(願)을 지니고 소림사를 지금과 같이 번듯한 도심지 사찰로 일궈 놓았다.

-나는 공부를 많이 못했지만 너희들은 그럴 수 없지 않느냐

정일 스님은 평소 "나는 내가 원하는 만큼의 공부를 못했다. 당시의 환경이 그러한 것도 있지만 나 스스로 게을렀던 점도 있다. 그러나 너희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면서 당신 상좌들에게는 누구 못지않은 높은 교육열을 드러낸다.

스님의 뜻이 그래서인지 상좌들 가운데는 공부를 많이 한 스님이 많다. 그 중에는 외국 유학하고 박사학위를 딴 상좌도 있다. 스님은 상좌들에게 경전 연구를 하라, 참선을 하라는 등으로 말하지 않고 "네게 맞는 공부를 찾아 각자가 하고싶은 공부를 하라"고 한다. 스승의 그 말이 상좌들에게는 커다란 경책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스님이 저희들에게 공부하라고 그토록 너른 마음을 보이시는 데 우리가 어찌 망상 피우고 게으름을 부리겠습니까!"

-60년을 이어 온 소림사 산림법회

산림(山林)이란 사찰에서 일정한 날을 정해놓고 대중과 함께 자신의 선·악업을 드러내고 이를 바로 닦아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소림사는 법회를 통해 산림의 본 뜻을 일깨우고 출가·재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파해 왔다. 그 세월이 60년이다. 지난 1947년부터 시작해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소림사 산림법회는 금광 스님에서 비롯됐다. 금광 스님은 1947년부터 화엄경을 10년간 강설했고 이어 법화경을 1957년부터 10년간 강설했다. 소림사는 1966년 금광 스님 열반 후에는 1967년부터 10년간 열반경 산림을 했다.

1977년부터는 참회산림을 병행하여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소림사는 지난해 참회산림 30주년, 산림법회 60주년을 맞았다. 이 법회에서 설법한 스님들은 현대의 고승들이었다. 전국의 많은 선지식들이 소림사에서 설법했으며 불자들 또한 이 긴 역사 속에서 설법을 듣고 자신의 선업을 닦아 나갔다.

-학생들 발 냄새, 땀 냄새가 싫으냐? 그럼 너희들이 길거리에 나가 포교해라

소림사는 연중 매일 법회가 열린다. 학생법회 때의 일화다. 정일 스님의 제자들이 학생법회 때면 그들의 발 고린내, 땀 냄새에 코를 싸 쥐는 경우가 잦았다. 그때 스님이 나무라신 한마디다.

"그래, 그게 싫고 역겨우면 너희들이 길거리에 나가 북을 치면서 '여러분, 불교 믿으시오' 하거라. 시내 한복판에 있는 절에서 주인이 따로 있고 객이 따로 있느냐. 또한 네 식구 내 식구가 어디 있느냐. 주인도 객처럼, 객도 주인처럼 그렇게 사는 거다. 중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정일 스님은 "절에 오면 열심히 부처님 법을 듣고 또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자의 도리"라고 한다.


▶ 정일 스님은?

1933년 출생, 운문사로 출가하여 1956년 금광 스님을 은사로, 동산 스님을 계사로 수계. 1970년 부산 동구 초량동 소림사 주지. 현 소림사 회주.

이진두 객원기자 bibbab@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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