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의 역사가 곧 부산의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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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여년 전 장산국 때부터 '부산의 중심'

동래를 보면 부산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사진은 1900년대 동래장터 모습. 사진제공=동래구청

2천년 가까이 부산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해온 동래지역의 주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 동래 사람들은 "동래 역사가 곧 부산의 역사"라고 자신있게 이야기한다. 부산에서 처음으로 구 차원에서 문화재전문위원을 둔 곳도, 매장문화재를 전시·보관하는 복천박물관이 있는 곳도 다름 아닌 동래다.

살아 숨쉬는 양반·유교 문화

부산 동래구 복천동(읍내길)에 자리잡은 동래구청 청사는 부산 지역 16개 구·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몇해 전 'KBS 전국노래자랑' 팀에서 공연을 하러 왔다 청사를 보고는 '보태주고' 싶어했다는 후문이 있을 정도인데, 46년이나 된 낡은 건물을 새로 짓지도, 옮기지도 못하는 데는 사연이 적지 않다.

가장 큰 이유는 인근 상인들의 반발이지만, 이밖에 "동래읍성 밖으로는 관청을 절대 옮길 수 없다"는 지역 어르신들의 반대가 있어서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금의 동래구청은 동래읍성의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는데, 동래구청이 이전지로 택했던 현 동래 메가마트, 명륜초등학교, 동일고무벨트 자리 등은 읍성 밖에 있다는 점이 택지가 될 수 없는 한 이유가 됐다.

새로 짓자니 지하에 각종 유물들이 많아 지하 공사를 하기에도 여의치가 않다.

오랫동안 부산의 행정·문화적 중심지였던 만큼 동래에는 양반들의 문화가 지금도 많이 남아 있고, 예의를 중시하는 유교 문화도 많이 남아 있다. 요즘도 동래구청장은 물론 동래경찰서장이 되면 기영회와 동래향교 등에 가서 지역의 어르신들께 인사부터 올릴 정도다.

동래에 오랫동안 양반 문화가 뿌리내렸다는 것은 동래야류, 동래한량춤, 동래학춤, 동래고무 등을 통해서도 전해진다. 이 중에서도 특히 동래야류는 부산의 10대 자랑 중 하나로 꼽히는데, 양반과 노비, 평민의 신분차가 있긴 했지만 탈을 쓰고 양반을 풍자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줬다는 점에서 수준 높은 문화로 평가받고 있다.

부산 역사 오롯이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동래부가 부산부로 바뀌기 전까지 '동래'는 곧 부산이었다.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일제는 철저히 동래 문화를 파괴하려 했고, 그 결과 동래부라는 명칭은 사라졌지만 그전까지 동래는 2천여년 전 장산국(또는 거칠산국)으로, 신라 시대인 757년부터 조선시대까지는 동래군, 동래현, 동래부 등의 형태로 부산 대부분 지역을 관할해 왔다.

당시 동래부사는 곧 오늘날의 부산시장이었는데 동래부사가 머물렀던 곳이 동래읍성이며 동래부사가 사무를 봤던 곳이 읍성 안 동헌이었다.

이 때문에 동래구에 오래 살았던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도 동래가 옛 부산의 중심이었으며, 부산 문화의 태동이었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지금도 동래시장 주변 동래읍성 안팎에서는 각종 역사의 흔적들이 자주 발견되곤 한다. 얼마 전 동래 구간 지하철 공사 중에도 유물들이 대거 발견돼 공사 담당자들이 진땀을 흘리기도 했다.

동래는 일제시대 이후 동래군, 동래출장소 등으로 지위가 격하되긴 했지만, 1957년 구제가 실시되면서 다시 동래구로 승격됐다.

당시 동래구에는 지금의 수영구와 해운대구, 금정구, 연제구 지역도 다 포함돼 있었는데, 당시 동래구 지역이 부산면적의 46%인 177.65㎢에 이르렀을 정도로 컸다. 지금도 동래구에서 떨어져 나간 다른 구에서는 동래구를 '큰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동래는 또 1960~70년대 신혼여행지 및 관광명소로도 이름을 떨쳤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동래온천과 각종 유적지, 해운대·광안리 해수욕장, 금정산, 범어사 등이 모두 동래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동래 말살 정책

일제는 동래의 역사와 문화를 지역의 뿌리로 봤기 때문에, 문화를 격하시키고 말살하려 했다. 동래읍성 4대문의 여닫는 시간을 북을 쳐서 알렸던 곳, 망미루를 금강공원 입구로 옮긴 것도 일제였다.

'그리워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누각'이라는 뜻을 가진 망미루는 옛날 동래시장 오거리 동헌 쪽 입구에 있어서 사람들이 즐겨찾던 곳이었는데 일제는 이를 금강공원 입구로 옮겨 출입문으로 사용했다.

동래의 오래된 체육행사였던 동래줄다리기 또한 1938년 일제에 의해 맥이 끊겼다.

당시 동래부민들은 매년 음력 1월 15일이면 옛 대동병원 앞~동래시장~동래구청~명륜초등학교 앞에서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2일 또는 3일 동안 줄다리기를 했는데,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이 때문에 일제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반일 운동을 일으킬 것을 두려워해 이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현정 기자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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