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어정쩡한 태도가 한·일 독도분쟁 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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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 1947/정병준

한·일간 독도분쟁의 근저에는 미국의 존재가 결정적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가 밝혀 놓았다. 사진은 독도 전경. 부산일보DB

어느 외국인이 묻는다. 독도가 왜 당신네 땅이냐고. 자, 당신은 당당하게 그 외국인을 설득시킬 수 있는가? "울릉도 동남쪽~" 목청 높여 노래 부른다고 그들이 알아줄까? 어느 가수가 외국 언론에 '독도는 한국땅'이란 광고를 낸 것은, 그 뜻은 가상하나 얼마나 그네들을 설득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우리 땅을 굳이 소리 높여 우리 땅이라 외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 독도 문제의 실체를 명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병준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는 2005년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영국 외무성이 1951년 작성한 대일평화조약 초안의 부속지도를 보고 놀랐다. 독도는 분명 일본 영토에서 빠져 있었다. 그런데 왜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인가? 정밀한 학술적 연구에 몰입했다. 그 결과, '독도 1947'이라는, 무려 1천4쪽에 이르는 역저가 나왔다.


1947년엔 한국령으로 인정
1949년 이후 일본 쪽 기울어
1952년부터는 '나 몰라라'



'1947'은 1947년을 말한다. 왜 하필 47년인가? 미군정 하 남조선과도정부는 47년 당시 민정장관 안재홍의 명령에 의해 과도정부 조사단과 조선산악회가 독도학술조사대를 편성해 독도를 조사했다.

일본 외무성은 47년 평화조약 내용 중 독도와 관련된 내용의 팸플릿으로 제작해 연합국에 배포했다. 팸플릿은 독도와 울릉도를 일본의 부속 도서로 다루었는데, 이것이 48년 이후 미국이 독도문제를 판단하는 주요한 기준이 돼버렸다.

미국은 대일평화조약 초안을 47년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독도(당시 미국 표현으로는 리앙쿠르암)가 한국령임을 명확히 했다. 하지만 이 초안의 내용은 49년 친일 성향의 주일미정치고문 윌리엄 시볼드가 독도가 일본령이라는 주장을 펼침으로써 효력을 잃기 시작해, 결국 미국이 주도한 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회담의 최종 조약문에서 독도조항이 사라져 버렸다.

이처럼 47년은 전후 독도와 관련된 한국, 일본, 미국의 선택과 입장이 명확히 드러난 시점이자 전후 독도 문제의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의 본격적인 논쟁은 52년 한국의 해양주권선언에 대해 일본이 항의하면서 시작됐다. 한국은 역사적 영유권에 강조점을 둔 반면, 일본은 국제법의 측면에서 독도문제를 다루었다.

국제법상 근거는 크게 세 가지인데, 1905년 주인 없는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해 시마네현 현보에 정식으로 고시했다는 것, 52년 독도를 주일미군의 폭격연습장으로 지정했다가 일본 어민 피해를 이유로 해제했는데 미군이 이를 인정했다는 것,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독도의 일본령을 사실상 인정했다는 것이다.

이런 다툼에 대해 미국은 47년 무렵에는 한국령을 인정하다 49년 이후 일본령 쪽으로 기울더니 52년 이후에는 불개입·중립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한일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의 입장 선회는 당시 일본을 반공의 보루이자 동맹국으로 삼는다는 정책을 취한 데 따른 것이었다.

정 교수는 독도문제와 관련해 일본은 공격자, 한국은 방어자, 미국은 결정자였다고 정리한다. 즉, 전후 독도문제의 핵심에는 미국의 역할과 결정권이 엄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정자 미국! 우리의 운명과 관련해 걸림이 참으로 많은 나라이다. 정병준 지음/돌베개/1천4쪽/5만원.

임광명기자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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