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에세이] 사랑은 '간'(間)이 부리는 조화 같은 것
<4>사랑이란 무엇인가?/ ② 소설가 김곰치
세상의 모든 것들 사이(間)에는 사랑의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그 사이로 온갖 것들이 다 끼어든다. 생을 바쳐 열심히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진은 영화 '사랑'의 한 장면. 부산일보DB사랑은 '간(間)'이 부리는 조화일 것이다. 어버이와 자식 간, 남자와 여자 간, 사람과 자연 간, 사람과 물건 간, 사람과 우주 간. 사랑은 '사이'에서 발생한다.
사람 중심의 나열이었을 뿐이다. 사람 빼고 자연과 자연 간의 사랑은 없을까. 추호도 사랑이 없다면, 이 지상에 자연이나 사물이 지금과 같이 번성할 수 있었을까. 산이 품고 있는 수많은 생명, 강이 품고 있는 수많은 생명을 생각해본다. 오래전부터 시인들은 어버이의 품과 같다고 칭송해 왔다. 사랑이 깃든다는 것이다.
어버이와 자식 간
남자와 여자 간
사람과 우주 간
그렇다면 人間은?
물건과 자연 간의 사랑도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소담스레 피어난 화분의 수국을 떠올려본다. 화분은 식물의 집이다. 흙의 습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바깥의 해로운 영향력을 차단해준다. 물론 화분도 흙이라는 자연으로 빚은 것이다. 세상의 모든 물건은 자연에서 나와 사람의 정성어린 노동을 거친 결과다. 좋은 물건이 뿜어내는 선한 기운이 있는데, 사람의 솜씨를 통하여 증폭되어 발현되는 사랑 같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물건도 저도 모르게 사랑을 수행한다. 사람도 자연도 물건도 애초에 같은 하나에서 나왔으므로 언제든 서로 공명할 수 있는 주파수를 내재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간'에서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공명의 음악, 그것이 사랑일 것이다.
그럴싸한 표현이 꼬리를 물고 물었지만, 사실은 하나마나한 소리다. 일체만물에 사랑이 범존한다고 하여도, 그 막연한(?) 사랑이 우리가 사는 하루하루의 구체적이고 변화무쌍한 순간들에 무슨 뾰족한 지혜를 제공해주지 않는다. 사랑이 만유의 법칙으로 편재하고 있는데도 왜 인간 세상에는 불행한 눈물들이 그치지 않을까. 사랑만큼 아니 사랑보다 더 강력한 것들이 '간'에 끼어들기 때문인가. '간'은 비어 있고 열려 있고, 그런데 온갖 음흉한 것들이 사랑을 밀쳐내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이다. 온 세상을 품고 싶을 만치 사랑이 충만할 때도 있지만, 어느 날 문득 주위를 둘러보면, 사랑은 자취도 없다. 그런 심사 괴로운 날이 내게 얼마나 많았던가. 이 세상에 이 우주에 사랑이 분명 있으되, 삶의 여러 복잡한 상황에서 무력할 때가 많다. 너무 흔해서 이리 차이고 저리 차이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가장 강한 것이 사랑이고, 가장 연약한 것이 사랑이었다. 가장 순수한 것이 사랑이었고, 가장 추잡한 것이 사랑이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사랑 중에서도 남녀 간의 이성애를 집중하게 되는데….
확실히 그렇다. 남자와 여자의 생명 그 자체에서 뿜어 나오는, 그 천부의 동력을 가지고도 아름다운 꽃 하나 못 피우면서 천지만물의 사랑 운운은 헛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즉 지금껏 내가 늘어놓은 말들은 죄다 헛소리였다고 실토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다. 수차례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성애의 실패만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우주 범유의 질서임에 분명한데도 가장 난해하고 가장 이루기 힘든 것 또한 사랑이라니 참 이상한 일이다. 가장 강한 사랑은 자기애이고, 두 번째가 모성애, 세 번째가 이성애라고 생각한다. 앞의 것들은 대체불가능하고, 세 번째는 상황만 된다면, 기회만 온다면, 남녀 공히 대상을 달리하여 시도 때도 없이 가능하다.
꽤나 폼 잡으며 시작한 이야기가 실패한 이성애의 꼴사나운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지라 지금 내 심사가… 그만 삐뚤어지려고 한다. 이러면 안 된다. 중학교 때였다. 도덕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철학'이 영어로 '필로소피', 뜻은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고 하셨다. 진리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고 깨끗이 감탄한 소년으로서(이성애의 실패 경험일랑 다 잊고) 자부심을 가지자. 자, 정신 차리자. 사랑은 사랑 이전에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대상을 향하여 분출되고, 특유의 대상이 없을 시 반드시 대체물을 찾아낸다. 성애 대신에 시를 사랑하고 벤치를 사랑하고 말을 사랑하고 음악을 사랑하고 먼지를 사랑하고 개를 사랑하게 된다. 진리를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주를 사랑하게 된다. 다시 한 번, 사랑은 만유한 것이기에. 지금은 그런 사랑의 시간, 아직도 기다림의 시간, 기다림도 풍요로운 시간이다.
서두에 사랑은 '간'의 조화라고 하였다. 서로 사랑하라고 우리는 이름부터가 '인간'이다. 정확히 말하자. 간에는 온갖 것들이 끼어든다고 했다. 우리는 사랑의 가능성이므로 인간이다. 가능성은 하기 나름이라는 소리다. 이번 생을 다하여 열심히 사랑하자고 우리는 인간이다. 사랑에 대한 하나마나한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