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테리우스' 이덕진 "턱선은 무뎌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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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내가 아는 한가지'로 가요계에 등장, 그해 방송사 신인상을 휩쓸었던 이덕진.

1990년대 신성우와 함께 '테리우스'란 별명으로 소녀 팬들을 설레게 한 그가 최근 록밴드 '제라(ZERA)'를 결성해 10년 만에 활동을 재개한다.

제라는 오는 29일 오후 7시 광장동 악스코리아에서 '쉬즈 곤(She's Gone)'으로 유명한 미국 록밴드 '스틸하트'와 합동 공연을 한다.

최근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덕진은 턱선이 좀 무뎌졌을 뿐 치렁치렁한장발, 딱 붙는 스키니 바지, 팔목의 메탈 장신구 등 1990년대를 호령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올해로 데뷔 20년째. 그러나 그가 발표한 음반은 달랑 넉장이다. 1994년까지 이덕진으로 석장의 음반을 낸 후 7년의 공백기를 보냈고 2001년 록밴드 '노 페이트(NoFate)'로 재등장해 음반 한장을 내고는 다시 10년 간 잠행한 탓이다.

"고난의 나날들이었죠. 2000년대 초반 뮤지컬도 했는데 이후 게임과 영화제작 사업에 손을 댔다가 사기를 맞는 등 어려운 시간을 보냈어요. 헤비메탈, 하드록을 하고 싶은데 이런 음악을 원하는 기획사가 없으니 제가 돈을 벌어 음악 활동을 하려고 사업에 손을 댄거죠. 사업은 외도가 아니라 제가 원하는 음악을 하기 위한 수단이었어요."

오로지 음악만 하려 했다는 그가 두차례나 긴 공백기를 보낸 게 음악이란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는 "내 음악의 뿌리는 애초부터 록이었다. 고 3 시절 같은 반 친구인 장영규(어어부프로젝트 멤버)가 들려준 들국화 1집의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지난 시간들을 찬찬히 풀어놓았다.

고교시절 스쿨밴드 '야생마' 보컬로 마포 지역 유명 인사였던 그는 졸업 후 헤비메탈 밴드 '사월'과 '사자후'에서 활동했다. 이후 1987년 입대해 1990년 제대한 그는 밴드를 꾸리려 했으나 멤버를 모으는 게 여의치 않았다.

결국 자작곡이 담긴 데모 테이프를 들고 기획사를 물색, 록 발라드 '내가 아는 한가지'로 솔로 데뷔를 했다. 그러나 발라드는 원치 않는 음악이었고 적성에 맞지 않은 방송 활동까지 겹치자 기획사와 갈등이 컸다고 한다.

"원치 않는 음악에 절 연예인으로 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웠죠. 당시 개그 프로그램에서 가수가 웃기는게 유행이었는데 기획사가 그걸 시키니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어요. PD에게 잔소리를 듣고 잠수를 타곤 했죠. 당시엔 고집도 세 음반제작자의 입장을 이해 못했어요. 하지만 제가 지금 기획사(듀크엔터프라이즈)를 운영해보니 좀 이해가 되더군요. 미성숙에서 온 과오였죠."

결국 1995년까지 TV에 모습을 비춘 그는 이후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음악을 포기할까'란 고민으로 괴로워 술에 의지했다.

그는 "술때문에 건강이 안 좋아져 죽기 일보직전까지 갔다"며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시고 집안에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 몸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이때미국에서 록밴드 '미스터 빅'과의 음반 작업 제의가 왔고 곡을 만들었는데 또 일이 꼬이더라. 결국 그 음악을 노 페이트 음반으로 발표했다"고 설명했다.

다시 10년을 보낸 끝에 결성한 제라는 그의 음악 인생 터닝 포인트다. 그는 제라를 언급할 때면 의욕이 넘쳐보였다.

"제라는 '지저스 록 어겐(Jesus Rock Again)'이란 뜻으로 강한 어감을 주고자 앞머리 'J'를 'Z'로 바꾼 겁니다. 멤버는 기타 둘에 드럼, 베이스, 보컬 등 5인조죠. 예전에 함께 음악하던 동료도 있고 막내가 30살이니 꽤 연륜있는 멤버들이 모였어요."

스틸하트와의 합동 공연은 미국 교포 출신 기타리스트인 '토미 기타'의 도움으로 성사됐다. 스틸하트의 보컬과 친분있는 토미 기타를 통해 합동 공연을 제안한 것.

"아직 제라로 음반을 내지 못해 이번 공연에선 노 페이트 음악을 주로 연주해요. 또 제 솔로 시절 곡들도 록으로 편곡해 들려줄거고요. 다음 공연 때는 꼭 제라의 음악으로 무대에 오를 겁니다."

그는 제라로 두가지 활동을 병행한다고 설명했다.

"정통 록밴드 활동과 CCM 밴드 활동입니다. 싱글 음반으로는 헤비메탈, 정규 음반으로는 록이 되 노랫말을 달리해 CCM 음악을 발표할 계획이죠. 제라는 해외 무대를 염두에 두는데 특히 CCM 밴드 활동의 주 무대는 미국이 될 겁니다. 또 미국 여러밴드와의 배틀 공연을 기획 중이고, 국내 록밴드를 해외에 진출시키는 일도 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말미, 정상의 자리에 서봤던 그에게 '인기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팬레터를 하루에 두세박스 씩 받았죠. 팬레터 안에 자신의 누드 사진을 넣어 보내는 팬, 결혼하자고 집에 찾아오는 팬들도 있었죠. 하지만 인기가 부질없단 건 이미 1990년대 느꼈어요. 활동을 안 하니 바로 사라지는 거품이더군요. '오빠' 소리를 들으려고 음악한 게 아니니 좌절하진 않았어요."

이어 그는 "지난 세월은 허비한 듯 보이지만 나를 단련시킨 담금질의 시간이었다"며 "앞으로의 10년은 음악 안에서 노력하며 살고 싶다. 그렇기에 예전 음악으로 대중에게 비춰지고 싶지 않다. 뮤지션은 옛것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계속 진화해야 하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인생에서 아쉬운 대목은 있다.

"가정을 꾸리지 못한 겁니다. 나이가 들다보니 제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연을 만나는 건 자기 맘처럼 안되나봐요. 하하."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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