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間 (인+간)] 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 감독 안익수
가출·음악다방 DJ·나이트 웨이터…축구는 늦게 내게로 왔다, 운명처럼
부산 아이파크 안익수 감독의 축구 인생은 언제나 도전이었다. 그는 정상에 설 때마다 두 개의 공 가운데 하나를 골라 새 길을 걸어갔다. 김경현 기자 view@
공부를 잘하는 고등학교 2학년 아들이 갑자기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한다. 당신이 부모라면 어떻게 할까. 온갖 수단을 동원해 아들을 설득해서 계속 공부를 하도록 시킬까, 아니면 "평생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아들의 소망을 들어줄까. 부산 아이파크 안익수 감독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는 고2 때까지 공부만 하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랬던 그가 부모 속을 태운 끝에 축구로 인생 방향을 바꿔 결국 프로축구 선수, 월드컵 국가대표는 물론 프로축구팀 감독까지 됐다. 남들보다 축구를 7~8년이나 늦게 시작한 그가 어떻게 이런 성공신화를 일궈낼 수 있었을까. 안 감독의 인생 속으로 한번 들어가 보자.
■남들보다 7, 8년 늦은 출발
안 감독은 경기도 안산이 고향이다. 그는 군자초등, 군자중 때는 물론 문일고에 진학해서도 공부를 잘했다. 반에서 5~10등 이상 성적을 항상 유지했다.
안 감독은 축구를 무척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클럽활동으로 축구를 하기도 했다.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그는 고2 때 중대 결심을 했다. 당시 문일고 축구부 박화덕 감독을 찾아간 것이다. "감독님, 저도 축구를 하고 싶어요." 그는 그렇게 해서 마침내 축구부에 가입했다. 대부분 축구 선수들은 초등 3~4학년 때 시작하는 운동을 고2 때 입문한 것이다.
남들보다 한참 늦은 고2 때 축구 입문
받아주는 대학 없어 한때 방황의 늪
우여곡절 끝 입학한 인천전문대서 두각
국가대표 선수 거쳐 女국가대표 감독까지
문제는 아들이 공부하기를 원했던 부모였다. 그는 처음에는 몰래 운동을 했다. 어느날 수업을 마치고 축구 연습을 하고 있는데 운동장 한쪽에 낯익은 얼굴이 서 있었다. 아버지였다. 아들의 성적이 자꾸 떨어지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담임교사와 면담하러 왔다가 아들을 본 것이다. 안 감독은 연습을 중단하고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갔다. 그는 부모에게 "축구를 안 하면 평생 한이 될 것 같다. 도전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강력히 반대했다. 아들은 2주일 정도 학교에도 안 가며 반항했다. 결국 어머니가 "자식이 원하니 시켜주자"고 도와준 덕분에 그는 축구를 할 수 있게 됐다.
■방황의 늪
안 감독은 숭실고로 전학했다. 키가 커서 포스트플레이 요원으로 뛰었다. 고교졸업반이 됐지만 그를 특기자로 받아주는 대학은 하나도 없었다. 축구를 한 지 이제 겨우 1년 정도밖에 안 된 데다 대학 진학에 필요한 성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축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자 안 감독은 방황의 늪에 빠져들었다. 무단 가출했다. 그는 서울에서 가장 먼 부산으로 무작정 내려왔다. 평소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서면의 한 음악다방에서 DJ(디스크 자키)로 일했다. 저녁에는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로 일했다. 아버지가 어떻게 알았는지 아들을 잡으러 왔다. 그가 가출한 지 6개월 만이었다.
안 감독은 다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1984년 학력고사를 쳐서 중앙대 체육학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리고 바로 중앙대 축구부 김기복 감독을 찾아갔다. "축구를 하게 해주십시오." 한 번 본 적도 없는 신입생의 당돌한 요구에 김 감독은 껄껄 웃고 말았다고 한다. 그는 대학 등록을 포기했다.
이듬해 그는 인천전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당시 그 학교에는 클럽형 축구팀이 있었다. 지금은 별세한 최추경 행정학과 교수가 감독을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곳에서도 축구를 할 수 없었다. 학교에 입학한 뒤 서클대항 축구대회가 열렸다. 최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다가 안 감독을 발견하고 축구부로 불렀다. 그의 복잡한 사정을 다 들어본 최 감독은 "나하고 같이 한 번 해 볼래"라고 제안했다. 다른 선수들이랑 함께 직접 찍어 만든 벽돌로 기숙사도 만들었다.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안 감독은 대학에서 매일 새벽, 오전, 오후, 밤으로 나눠 하루 4번씩 운동했다. 수업시간에 맞춰 연습을 한 게 아니라 연습시간에 맞춰 수업을 조정했다. 노력은 성과로 나타났다. 인천전문대는 1986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 전문대로서는 처음 4강 진출이라는 신화를 이뤄냈다. 축구를 늦게 시작해 개인기가 모자라는 그는 포지션을 수비수인 스토퍼로 바꾼 상태였다.
이 대회는 안 감독의 축구 인생에 전환점이 됐다. 인천전문대가 선전을 거듭하자 많은 축구인들이 4강전을 보러왔다. 그중에 당시 김호 울산 현대 감독, 김용배 상무 감독이 포함돼 있었다. 두 사람은 대회가 끝난 뒤 안 감독에게 스카우트를 제의했다. 그는 상무를 선택했다. "상무는 당시 국가대표급 선수들만 갈 수 있었죠. 그런 팀에서 저를 데려간다고 하니 그저 놀랄 뿐이었습니다."
상무는 그에게 엄청나게 새로운 기회였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축구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는 그곳에서 비로소 체계적인 축구를 배울 수 있었다. "신들린 사람처럼 운동을 했어요. 다른 형들은 고교, 대학, 실업에서 제대로 실력을 닦은 베테랑이었지만 저는 기교 없이 투박할 뿐이었습니다." 거기서 제대로 된 웨이트 트레이닝을 배운 덕분에 몸이 균형을 찾게 됐다. 몸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터미네이터'라는 별명을 얻었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다
상무를 제대한 안 감독은 성남 일화 창단 멤버가 됐다. 새 팀에서 그는 1년간 뛸 수 없었다. 2군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남에는 고정운, 김용세, 백종철, 김종건, 김종부, 장정 등 쟁쟁한 선수들이 뛰고 있었다.
안 감독은 연습에만 매달렸다. 그는 단체훈련이 끝난 뒤 장충단공원, 동국대, 남산 등을 오가며 개인훈련을 펼쳤다. 마침내 기회가 찾아았다. 주전 스토퍼가 경고 누적으로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된 것이었다. 프로 데뷔전 상대는 유공이었다. 그가 맡아야 할 선수는 국가대표 스트라이커까지 지냈던 노수진이었다. 그는 노수진을 찰거머리같이 물고 늘어졌고, 결국 노수진은 후반 15분 만에 교체당했다. 이후 안 감독은 팀의 주전 수비수가 됐다.
1994년에는 국가대표로도 발탁됐다. 미국 월드컵을 앞두고 김호 감독이 그를 대표팀에 불러들인 것이다. "대부분 선수들은 청소년, 올림픽 등 각종 국가대표를 거쳤죠. 고3 때 축구를 시작해서 그 흔한 청소년대표 한 번 안 해 본 국가대표 선수는 저뿐이었습니다." 그가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자 그동안 애만 태웠던 아버지, 어머니가 그렇게 기뻐했다고 한다.
축구는 늦게 내게로 왔다, 운명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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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익수 감독은 늘 선수들에게 축구 이후의 인생을 준비하기 위해 항상 책을 읽으라고 권한다. 부산 아이파크 클럽하우스에 책장을 마련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김경현 기자·부산일보 DB |
■지도자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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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감독이 경기장에서 선수들을 다그치는 모습. 김경현 기자·부산일보 DB |
"30년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기량·승부사기질 아닌 혼신 다하는 열정
성남·FC서울서 부산 사령탑 맡기까지
끝없는 도전 인생… 마침표는 없습니다"
성남에서 5~6년 정도 지도자로 일하면서 그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느꼈다고 한다. 안 감독은 영국 축구 유학을 결심했다. 준비를 다 마친 뒤 당시 대교캥거루 여자축구팀을 맡고 있던 대학교 은사 최 감독에게 인사를 하러 갔다. 여기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최 감독이 느닷없이 "일을 1년만 도와 달라. 코치를 맡으라"고 말한 것. 그는 당황했지만 은사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름은 코치였지만 실제로는 그가 감독 역할을 다했다. 은사는 담낭암 수술을 받고 1년 뒤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나중에 사모님께서 말씀해 주시더군요. '남편이 암에 걸린 사실을 알고 자네에게 팀을 맡기고 싶어 하더라'라고요."
안 감독은 대교 선수들을 여자라는 특성에 맞춰 가르쳤다.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여자축구 선수들은 머리를 짧게 잘라 중성화된 모습을 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머리를 기르도록 했다. 평소에는 화장도 하게 했다. 외출을 할 때는 절대 슬리퍼를 신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선수들에게 공부를 시켰다. 오전에 영어, 컴퓨터 등 학원에 다니게 했다. 훈련은 오후에만 실시했다. 선수들은 저마다 피아노, 요리, 요가, 음악 학원에 등록했다. 이렇게 하자 오후 훈련 효과가 오히려 커졌다. 선수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연습에 참여했고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에서도 벗어났다.
안 감독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대한축구협회에서 그에게 여자축구대표팀 사령탑 자리를 맡긴 것이다. 그는 대표팀을 20대 안팎의 어린 선수들로 개편했다. 협회에는 '2012년 런던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내건 기획안을 냈다. 협회의 지원을 받아 여자축구 사상 처음 미국전지훈련을 두 번이나 다녀오기도 했다.
첫 출전했던 아시안컵에서 북한에 0-4, 일본과 호주에 0-2로 져 예선탈락했지만 2년 뒤 같은 대회에서는 일본에 3-1, 대만에 2-0으로 이겼다. 아쉽게 호주에 0-1로 지는 바람에 골득실에서 밀려 예선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상승세를 탄 여자축구는 결국 성적을 냈다. 2009년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여자축구 사상 처음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내 축구는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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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점한 선수와 함께 기뻐하는 모습. 김경현 기자·부산일보 DB |
수석코치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은 그는 지난해 11월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자리를 다시 옮겼다. 좋은 선수가 없어 만년 하위권에 머물던 팀이었다.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던 선수단을 추슬러가며 시즌을 치렀다. 결국 부산에 6년 만의 플레이오프 진출이라는 선물을 안겼다.
안 감독이 부산 사령탑을 맡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책꽂이를 만든 것이었다. 여기에 각종 서적 150여 권을 사서 비치했다. 인문학 책이 대부분이었다. 그는 선수들에게 "현재 독서량은 중년에 승부수를 뛰울 수 있는 밑바탕"이라고 강조했다. 축구에서 은퇴한 뒤 새로운 삶을 살 때 생존하기 위해 꼭 책을 읽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책에서 읽은 좋은 문구를 메모해 뒀다가 나중에 선수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 때 책 읽는 습관이 안 돼 있던 선수들로서는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당수 선수들이 책을 읽는다고 한다.
안 감독에게 '당신의 축구는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뜻밖에 "열정"이라는 대답을 내놨다. 기량, 승부사 기질 같은 것보다는 열정이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고, 지금도 그렇다고 말했다. 그는 '마인드 스포츠'라는 책에서 한 구절을 보여줬다. '현재 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헌신하지 않으면 배에 구멍이 생겨 물이 차기 시작할 때 도망갈 궁리만 한다.' 안 감독이 가장 좋아하는 격언은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한다. 취임 인사 때 선수들에게 가장 먼저 한 말이기도 하다. "아쉬운 인생을 살지 말자는 것이죠. 사소한 게 모이면 큰 것을 만듭니다."
그는 축구를 시작하면서부터 도전 인생을 살아왔다. 성남에서 FC서울에 이르기까지 항상 좋은 성적을 낸 뒤에 팀을 떠나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만족은 없습니다. 항상 또 다른 새로운 도전의 계기를 찾습니다. 언제나 끝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안 감독은 오는 20일 수원에서 수원 삼성과 프로축구 K리그 6강 플레이오프 경기를 갖는다. 이 경기는 그에게 다른 도약을 위한 한 단계일 뿐이다. 그의 도전이 어디까지 이어질지는 그 자신도 모른다. 남태우 기자 leo@busan.com
고도의 절제 겸손으로 무장된 '불 같은 지도자'
안병모 단장이 본 안익수
안익수 감독은 무서운 사람이다. 고도의 절제와 겸손이 외면을 둘러싸고 있지만 내면은 불 같은 지도자다. 목표를 세우면 어떤 일이 있어도 원칙에 따라 제 길을 간다. 그는 선수 생활을 늦게 시작했기 때문에 노력밖에는 살 길이 없었다.
부산 아이파크 구단이 그를 감독으로 영입할 때 구단에는 3가지 원칙이 있었다. '40대, 내국인, 현역' 지도자라는 것이었다. 부산은 좋은 선수를 데리고 운영하는 구단이라기보다는 어린 선수를 길러내는 팀이다. 안 감독의 성장 과정을 보면 선수들을 이름값만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른 감독들은 선수들을 1~11번 주전만 선호하지만 안 감독은 "12~25번 백업선수들이 잘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여자축구 감독을 할 때 선수들을 차별하지 않고 잘 키운 점이 돋보인다.
대부분 감독들은 취임사에서 "첼시나 바르셀로나 같은 팀을 만들겠다. 패싱플레이를 강화하고 중원을 지배하겠다"는 등 천편일률적인 이야기를 한다. 안 감독은 이런 이야기들보다는 '하우 투(how to)'를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 것인지를 안다는 이야기다. 선수들에게 그것을 잘 가르친다. 부산 아이파크 단장
[약력]
1964년 5월 6일 경기도 안산서 출생
1989~1995년 프로축구 성남 일화
1994년 미국월드컵 국가대표
1996~1998년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
1999~2005년 성남 일화 천마 코치 · 대한축구협회 기술분석위원
2006년 대교 캥거루스 여자축구단 수석코치
2007년 대교 캥거루스 여자축구단 감독
2007년 12월~2009년 12월 여자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8년 5월 경기도 안산시 스포츠 홍보대사
2009년 12월 FC 서울 수석코치
2010년 11월~ 부산 아이파크 감독